분노한 살인자 (창세기 4:1 ~ 10)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4:1-10
오늘은 ‘장애인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초창기부터 주일에는 ‘사랑부,’ 주중에는 ‘사랑의 학교’를 통해 장애인 사역을 해왔습니다. 이들의 예배를 돕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많은 선생님들이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랑부 사역은 우리 교회의 큰 축복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배우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장애에는 신체장애, 정신장애, 정서장애, 성격장애, 학습장애, 발달장애 외에도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독특한 성격 때문에 본인뿐 아니라 가정과 주위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데 학습장애로 집중을 못 하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예기치 않은 일로 장애를 얻기도 합니다. 뇌졸중이나 교통사고로 장애가 생기기도 하고, 아무 일 없이 일생을 살았어도 70세를 넘으면 이런저런 장애가 찾아옵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눈이 침침해집니다. 귀도 잘 들리지 않아요. 관절염이 생겨서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다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장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언젠가 장애를 겪게 될 것이니까요. 우리 주위에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댈 어깨를 내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고, 그들과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해줘야 합니다.
최근에, 성격 장애와 특히 정서 장애를 가진 조승희라는 청년이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학생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미국 최악의 교내총기살인극을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재미교포들은 혹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미국인들에게 반한감정이 일어나서 한미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한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큰 걱정입니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한국이나 한국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가 미국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그 가족을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버지니아 공대 교정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와 함께 그의 추모비도 함께 세웠습니다. 그 추모비에는 “네가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다. 머지않아 네 가족이 평안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축복이 너에게…” 라는 글귀를 적어놓았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우리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해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와 인격, 문화가 부럽고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조승희는 어려서부터 말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물어도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학교수업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고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가 다녔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철없는 일부 아이들이 조승희의 외톨이 성격을 놀리고 모욕감을 주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버지니아 공대 영문과에 재학 중인 우수한 아이였으나 그의 정서, 그의 영혼은 병들어 있었습니다. 좋은 머리만으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미국에 오래 살면서 교포들과 사역했기 때문에 그 사회를 잘 압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 새벽에 일하러 나가서 밤늦게 돌아옵니다. 자녀들을 위해 미국에 갔는데 이민 생활에 적응하느라 막상 자녀들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방치되었습니다. 자기들이 알아서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갑니다. 학교서 집에 돌아와도 맞이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채 1분도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어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 아이들은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도 먹지 못하고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지냅니다. 조승희 가족의 생활도 이랬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승희는 성장하면서 아이들과 잘 사귀지 못했고 놀림을 받고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대학 수업시간에는 충격적 내용의 수필을 발표해서 교수와 학생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몸서리가 쳐지고 오싹해질 정도로 분노와 독기가 가득 찬 내용이었습니다. 다들 ‘어떻게 저런 글을 쓸 수 있나?’하고 이상하게 보았을 뿐 누구 하나 “너 요즘 어떠니?”하고 말을 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문과 교수 한 명이 이상을 느끼고 이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학교 정신과 의사에게 보냈지만 의사는 문제가 없다며 아무 조치도 없이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조승희는 결국 32명을 죽이고 30여 명의 학생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자살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조승희는 NBC에 글을 보냈습니다. “내가 한 일이야. 그렇게 해야 했어. 오늘의 참사를 막을 방법은 수없이 많았지만 너는 결국 내 피를 보겠다고 결정한 거야. 너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내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는 없었어.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너는 이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 피를 내 손에 묻히게 한 거야.” 그가 말하는 ‘너’가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는 부자들을 증오했지만 이것은 부자들만 놓고 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탄인 것 같아요. “사탄이 결국 내 피를 보게 했다.” 그 속에 악령이 들어갔습니다. 그도 “너는 내 머리에 암 덩어리를 집어넣었고, 내 심장을 위협하고, 내 영혼을 항상 짓밟았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어. 내가 이러는 이유는 내가 아닌 내 아이들, 내 형제, 자매들을 위한 것이야!” 23살이 무슨 아이들이 있습니까? 살인은 마귀의 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8:44).
그 부모가 그를 낳았을 때 온 식구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전통적으로 아들을 바라는 한국에서, 첫 아이로 딸을 낳은 후 얻은 아들이니 혈통을 이을 아들이 생겼다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살인자로 끝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첫 아들, 가인을 낳았습니다. 너무 좋아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습니다. 국어성경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아”라고 했지만 히브리 성경을 그대로 번역하면 “내가 아들 구세주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네게서 날 후손이 마귀, 뱀의 머리를 찍어 인류를 구원할 것이요, 그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 하와는 자신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날 것을 이미 약속 받았습니다. 가인을 낳자 “이 아들이 바로 메시아로구나! 이 아들이 우리 가문을 일으키고, 하나님을 섬길 것이고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내가 구세주를 얻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일,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부모의 기쁨과 기대가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동생을 죽인 악마 같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대로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빴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두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가인은 제 마음대로 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두 유형의 혈통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때 양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 너는 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해.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하고 곡식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나도 내 나름대로의 종교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가인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감정, 사상, 생각, 욕망으로 살아온 가인이 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슴 속에 가인이 들어있다면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가인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아벨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사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파멸입니다.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분이 저와 상담을 했는데, 성령에 충만해서 가족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서도 그런 사람을 보았는데 한국에도 있더군요. 미국에서 제 학생이었던 공군 장교가 결석을 했습니다. 다음 주에 그를 만나 왜 결석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제 아내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제 아내에게 ‘네 남편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아내는 메모를 남겨놓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기 위해 2주 동안 전국의 친척, 친지 집을 다 다녔지만 성령께서 아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너무 잘 믿어 가족과 멀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가 아니고 악마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헤어진 사람을 만나게 하고,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다투는 사람을 사랑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를 통치하시고 만유를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시지, 잘 살던 가족을 떼어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여러분이 혹시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여러분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그 어려운 관계의 문제를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십니다.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분노는 미움을 일으키고 미움은 죽음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니라.” 사람이 왜 미워하게 됩니까? 화가 나고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조승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그의 사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총과 칼을 들고 있는 그의 눈 속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회를 향한 분노, 심지어 교회를 향한 분노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는 나를 박해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 주셔서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누이도 동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이가 미국의 방송국과 버지니아 공대에 보낸 사과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동생은 제가 함께 자라고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사람을 제가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명 있는 누이마저 자기 동생을 잘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했고 가깝고 평화로웠던 가족이었습니다. 저희 동생은 과묵했지만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동생이 이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아들을 몰랐고, 가장 가까웠던 누이도 동생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간에 충분한 대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분노가 있으면 그것을 내놓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지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니?” “그리고 나서는?”하면서 대화의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아이들이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딱 끊어 버리고 “넌 네 방에 가 있어!” “뭘 그따위 소리를 하냐?” “듣기 싫어!” 한다거나 “너는 왜 혼자만 끙끙대니? 말 좀 해, 말 좀!”한다면 누가 말하고 싶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바빠서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목회적 돌봄 훈련인 PACE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이 훈련을 받지 않으신 분은 매 학기마다 열리는 이 강의를 꼭 한번 들으십시오. 12주의 강의를 듣고 나면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돌봐야 되는지, 가족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됩니다. 분노한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 실망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이 변해야 됩니다. 말을 못하게 하고, 듣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의 귀가 필요한 사람,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가슴속의 분노, 실망, 상처, 슬픔, 외로움을 들어주고 살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교회 공동체와 우리 이웃에게 듣는 귀를 가진 사랑의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만일 조승희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한 마디라도 들었더라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아픈 자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주고, 그들의 분노를 들어 주고, 성령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사역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도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너를 기다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네가 죄를 다스려야 하느니라”(7절)고 경고했지만 죄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조승희 역시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죄가 그를 다스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는 때로 슬픔과 아픔, 상처, 외로움이 있습니다. 혼자 끌어안고 방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도 가인에게 “네가 그렇게 되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아. 밭을 갈아도 그 땅이 효력을 내지 못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해 다니는 방황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속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갈라지고, 사람과 하나 되지 못하고, 결국 방황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 길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방황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로 분명히 방향을 정하십시오. 슬픔과 아픔과 분노를 혼자 끌어안고 있지 말고 예수님께 가지고 와서 “주여, 내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습니다!”하고 여러분의 마음의 문제들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 치유와 회복의 근본이 되어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출처/김상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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