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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친구되신 예수 (눅 19:5-7)

by 【고동엽】 2022. 9. 25.

삭개오의 친구되신 예수 (눅 19:5-7)

10월은 종교개혁의 달입니다. 나의 믿음을 점검하고 나의 신앙이 지금 얼마나 건강한가를 한번 되새겨보고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지난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의 활짝 열린 마음과 믿음과 생각과 삶을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만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만한 역할도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나 뜻 그리고 사명을 이룰 수 있고 더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쩨쩨하고 소신도 없고 믿음에 대한 확신도 없고 자기신앙을 표현도 못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숨기며 산다면 그 사람이 세상에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모습이 가장 추하고 보기 싫은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삶의 차원을 기꺼이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해서 분명한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품고 세상을 안고 수많은 장벽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세상을 가슴에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생각도 크고 섬김적이고 때로 투자도 하고 손해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삶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하고 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좀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이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작정만 하면 주님께서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제자의 삶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평등사상”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평등사상이 기독교의 중심사상입니다. 세상에는 차별과 계급과 지배와 노예와 종과 상하구조로 짜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세상에는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혼신을 다하고 열정을 다하고 하나님의 형상과 자질과 인격을 부여해서 만드신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노예로 종으로 부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독재하고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독재자는 하나같이 그 종말이 처참하고 불운하게 종말을 맞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종말이 하나같이 쿠데타로, 암살로, 반란으로 비참하게 끝난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독재자를 친히 심판하십니다.
                                   I

그래서 기독교는 평등의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안에는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고치신 것이 이 상하구조를 평등구조로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하고 차별하고 탄압하고 무시하는 모든 구조를 평등구조로 바꾸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움직이신 모습들을 종합해 보면 모두 이 평등사상을 이루고 강조하고 표현하려고 애쓰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실 때 밖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밖에 모친과 형제들이 와 있다“고 하자 예수님은 정색을 하시며 ”누가 내 형제며 자매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생각이나 개념이나 생각하는 구조가 다르지 않습니까. 또 예수님의 족보를 보십시오. 그 족보 속에 여자 이름들이 여러 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의 족보에 여자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네 여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크게 공적을 남긴 여자들이 아니고 삶에 추한 얼룩을 남긴 여인들의 이름을 삽입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일입니다. 그 여인들은 죄에서 모두 구원받고 개종해서 하나님을 믿은 여인들입니다. 그 여인들을 족보에 넣은 의도는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과거의 신분이나 조건이나 죄를 묻지 않으신다는 싸인 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유대인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나 여자 그리고 노인은 숫자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는 모두 남자 장정만 센 숫자입니다. 그 시대는 어린 아이나 여성들을 소홀히 했습니다. 어린 아이나 여성이 소홀히 여겨지는 사회는 대부분 계급사회이거나 차별사회거나 상하구조로 조직된 권위주의적인 사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세워놓고 제자들에게 준엄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바다에 가서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상하구조를 평등구조로 바꾸려는 예수님의 숨은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본문에 나와 있는 삭개오를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이 삭개오를 지극히 증오했습니다. 당시 세리는 동족을 무자비하게 착취하여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 이 세리였습니다. 그 세리중 하나인 마태를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세리인 삭개오를 사람들이 무시하고 사람대우를 하지 않았을 그때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어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거기서 뭐하느냐, 빨리 내려오라, 내가 오늘 저녁 네 집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이 행동은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입니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증오하고 멸시하는 대상을 예수님이 인정하고 친구되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댔겠습니까.

                                   II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그 구질서를 바로잡고 새 질서를 세우려 애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 정신이 함께 들어가고 이 정신이 그 사회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로마 시대를 보십시오. 로마에는 노예들이 자그마치 6천만 명이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 노예는 말 그대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살아있는 재산이었습니다. 노예는 오직 주인의 손에 생명권이 주어져서 살게 하면 살고 죽이면 그냥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노예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 기독교가 들어갑니다. 그 노예들 중 먼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후에 뒤늦게 주인들이 믿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에서는 노예였고 교회에서는 종이 주인보다 높은 직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엄한 상하구조 사회에서 주인과 노예가 한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이 기독교의 능력이고 영향이고 사상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이 종과 주인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상놈과 백정과 양반의 제도입니다. 한 시대 우리사회에 이 제도가 얼마나 맹위를 떨쳤습니까. 당시 이 양반과 상놈은 서로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라고 상놈과 백정이 양반에게 말을 하며 한자리에 앉기를 했습니까. 그것이 당시 질서였습니다. 그래서 상놈이나 서자나 백정 출신의 자식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사회에 진출하거나 입신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홍길동 임꺽정 이야기가 나온 것 아닙니까. 홍길동도 임꺽정도 모두 서자출신이라 특출한 능력이 있음에도 입신할 기회조차 주질 않으니까 그 시대 야인으로 활동한 것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사회의 상하구조였습니다.  

또 족보에도 항렬이 있습니다. 항렬이 높은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존중받았습니다. 저는 나이는 어려도 항렬이 높아서 할아버지들로부터도 존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들도 날 보고 대부라고 불렀습니다. 길가다 만나면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때 제가 항렬이 높기 때문에 노인들을 보고도 말을 놓지도 못하고 올리지도 못하고 아주 어정쩡하게 대했던 기억이 남습니다. 또 그분들도 저에게 어정쩡하게 대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계급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남녀유별, 이것도 얼마나 강한 상하구조였습니까. 100년 전만 해도 이 땅의 여인들이 사람대접을 받고 사람처럼 살지를 못했습니다. 여인들은 문밖출입조차 자유롭게 하질 못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상하구조로 짜여져 있던 우리 사회였습니다. 이 상하구조들이 우리나라를 골병들게 만든 병든 구조입니다. 그러던 이 땅에 이 평등의 정신을 지닌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이 구조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양반과 백정이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백정의 자식들이 비로소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고 이 땅의 여인들이 자유롭게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파격입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파격뿐이 아니고 이것은 사회개혁이고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복음의 정신이고 이것이 복음이 지닌 능력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평등정신을 세상에 이루는 것이 이상이고 뜻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이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요 이 정신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원 뜻이 얼마나 신선하고 참되고 선한 곳입니까. 적어도 교회는 이런 선한 뜻을 이 세상에 이루며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III

  그런데 이런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언제부터인가 이미 없어져버렸던 이 상하구조가 새롭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 안에도 새로운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상당히 권위적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안수도 안줍니다. 또 어느 교회에서는 여성들은 강단에도 올라가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강단을 한없이 높게 하고 한결같이 빨간 카펫을 깔아놓았습니다. 모두 상하구조로 바뀌고 권위적으로 변모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가 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상실되고 인간적인 면만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때로 갈등하고 불화하고 의견이 많은 것입니다.

또 교회마다 담임목사를 당회장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당회장이 높습니까. 담임목사가 높습니까. 당회장이라는 말은 당회 때나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아무 때나 사용하고 부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실” 하면 될 것을 “당회장실”이라고 써서 붙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권위적이고 상하구조적인 발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 안에 없어져 버렸던 새로운 구조가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오늘 장로직분도 또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장로직분은 순전히 섬김의 직분입니다. 헌신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새 교회 안에서 계급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장로면 상당히 진급하고 출세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장로석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은연중 특별석처럼 여기는 풍조입니다. 그리고 그 장로가 되기 위해서 상당히 힘쓰고 신경 쓰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러다 장로가 되면 승진한 것으로 자리를 얻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오래 믿은 사람을 만났을 때 “아직도 장로 못 땄느냐”고 말합니다. 모두 계급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하구조이고 계급이지 뭡니까.

이것은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사직도 순전히 섬김직입니다. 권사가 되면 집사 때 보다 더 섬김의 삶에 뜻을 모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권사취임 전에 그렇게 하겠느냐 하고 다짐도 하고 서약까지 했는데도 취임 이후 전혀 책임감 없이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섬김 생활을 감당도 못하면서 주면 마다하지 않고 받습니다. 먼저 내가 섬김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고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권사가 집사만도 못한 분이 있다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목사 장로 권사직분은 계급이 아니고 섬김직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섬기고 더 헌신하고 더 책임감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소중한 직분들이 섬김 직이 아니고 어느새 계급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을 향해서 활짝 열리고 탁 튀였으면 좋겠습니다. 검은 사람도 받고 흰 사람도 받고 너도 흔쾌히 받고 부족한 사람도 받고 관계도 시원하고 삶이 매력적이고 나에게서 확신 있는 신앙인의 중심, 철학, 믿음, 헌신, 정신이 풍겨나는 삶을 사는 삶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그때에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하고자 하시는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정신과 섬김의 삶이 당시 권위주의적이었던 로마를 이겨냈고 점령했습니다. 그 정신을 품은 이 복음이 마침내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복음이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이 땅의 고질적인 계급이던 장벽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교회 안에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하게 되었고 양반과 백정이 한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 복음의 정신이 마침내 온갖 차별과 편견과 질시로 찌들어 있던 우리사회를 신선하게 개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혁명이 아닙니까. 그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혁명이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이 지닌 정신이고 힘이고 능력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편견 속에 살아가던 삭개오를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서 사랑과 정에 굶주린 그 눈을 보셨습니다. 사회의 온갖 냉대와 편견과 질시 속에서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그의 갈증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뽕나무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뭐하는 거야, 빨리 내려와, 오늘 저녁에 네 집으로 갈 거야.” 그때 삭개오는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와 예수를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늘 저는 재산에서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세금을 걷는 동안 떼먹은 돈을 4배로 변상하겠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이 주는 은혜이고 내용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사상입니다. 복음입니다.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삶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현하고 실천하고 행하고 나누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다시 교회 안에, 우리 사회 안에, 우리 신앙 안에 이 평등사상으로 가득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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