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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약2:14-26)

by 【고동엽】 2022. 9. 24.

믿음과 행함    (약2:14-26)

생명과 죽음의 영원한 차이

겉모양이 달걀이라고 해서 모든 달걀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생명이 있는 정란 달걀과 생명이 없는 무정란 달걀이 있습니다. 정란은 어미 암탉이 품고 있으면 때가 되어서 새로운 생명인 병아리가 나오지만 무정란은 아무리 품고 있어도 생명을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란은 생명 인자를 소유한 살아있는 달걀이요, 무정란은 생명 인자가 없는 죽은 달걀입니다. 이것은 생명과 죽음의 영원한 차이입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나는 순간에 울음을 터트리며 몸을 움직이지만 사산된 아이는 똑같이 눈, 코, 입이 있고 손과 발이 있어도 울음이 없고 움직임도 없습니다. 모양은 같으나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큰 차이는 불교에는 깨달음은 있으나 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콕스(H. Cox)는 “오늘날 우리는 복음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무효화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아 불신자처럼, 때로는 불신자들보다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믿는다는 것이 별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강한 인식을 갖게 한다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때문에 복음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좌우되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좌우되는 것은 마음과 행동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함수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명쾌하고 활발한 행동을 하게 되지만, 마음이 우울하고 무거운 사람은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운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서 선한 행위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 없으며, 선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원리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과 죽은 믿음

믿음에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는데 산 믿음은 행위를 낳지만, 죽은 믿음은 행위를 낳지 못합니다.‘산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새 생명을 소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믿음인데, 이 믿음은 사람마다 그 믿음의 수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행위를 수반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새 생명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이해로만 끝나는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헌신이나 봉사, 선행과 같은 행위를 수반하는 실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죽은 믿음’은 머리속으로만 이해하고 승인하는 차원에만 머무는 교리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그 자체에 생명이 없는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행위를 낳지 못합니다.


우리 믿음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동을 통해서 보여지고 입증됩니다. 행함은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잎과 나뭇가지를 통해서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선한 행실과 충성, 헌신, 봉사를 통해서 아름다운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그 행동을 통해서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증거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 믿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자녀가 부모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서 부모님에게 효도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 남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에서도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는 학생이 좋은 성적을 나타냅니다. 국가의 법을 잘 지키고 법에 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결국 지도자가 되고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믿고 순종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증거를 보여줘야 됩니다.


신앙의 증거는 그 인격이나 생활의 현저한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을 통해서 먼저 삶이 변화를 받습니다. 삶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성숙됩니다.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가치와 이념이 달라지며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말과 행동이 변화되며 새로운 인격자로 변화되어 성장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도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 축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증거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상이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보다는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것입니다.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말씀은 믿음을 가진 신자가 실천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 결론이 오늘 본문 말씀 26절인데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믿음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누구나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신자의 생활은 그 자체가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에 대해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믿음에 대한 강조를 하면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자의 생활에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믿음,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신자의 삶은, 믿음을 밖으로 나타내 보여줍니다. 야고보는 그 믿음이 우리 주위에서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자매를 향해서 도움을 주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5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어서 성령께서 저를 도와주라고 마음을 감동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돕지 아니했다면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최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물론 이런 변화가 하루아침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은 날마다 변해가야 합니다. 이 변화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이 변화의 뚜렷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선행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행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나면 의무가 따릅니다. 그 의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삶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의 의무입니다. 선행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행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  하나의 의무인 것입니다. 교회가 구제 사업에 힘쓰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다 아름다운 것은 아픔을 지닌 우리 이웃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은밀히 구제의 손길을 펴는 것입니다. 성경은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했습니다. 26절에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 20-26절 말씀은 산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뿌리라면, 믿음의 뿌리에서 행함이란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있습니다. 여기 두 사람의 이야기는 믿음과 행함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참된 믿음의 나무에서 행함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은 믿음의 열매이며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마 7:20). 한 사람이 가진 진실한 믿음은 행함에 의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행함이 일치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면서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주일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녀들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기리며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보다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몇 년 전에 삼성생명에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업광고를 냈던 적이 있습니다. 스물 하나- 당신은 고개를 두 개 넘어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씨 댁의 큰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스물 여섯- 시집온 지 오년 만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시댁 어른들한테 며느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서른 둘- 자식이 밤늦게 급체를 앓았습니다. 당신은 자식을 업고 읍내 병원까지 밤길 이십 리를 달렸습니다. 마흔 -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자식의 외투를 입고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당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외투를 입혀주었습니다. 쉰 둘 - 자식이 결혼할 여자라고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은 분칠한 얼굴이 싫었지만 자식이 좋다니까 당신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순 - 환갑이라고 자식이 모처럼 돈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자식의 보약을 지었습니다. 예순 다섯 -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깊게 주름진 얼굴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용인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 아홉 살에 그는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 네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일곱 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 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하는 얘기입니다. 쉰 세 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 한 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즐겁게 하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거워하라. 기쁘게 해드리라고 말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 그의 지혜, 그의 경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리 속에 중요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니며 불쌍히 여기지 마시고 높이 존경하고 그 지혜와 경험과 그 거룩한 본을 우리가 존중해야 됩니다.


유대인의 사회에서 노인은 인생 막바지 황혼을 걷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생 안식년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년에 일을 할 수 없다 해도 심리적인 열등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나 유대인의 전통에서 노년기는 구원의 희망을 향해 가는 시기요 인간 성숙의 정점인 자기실현을 위한 안식년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인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고귀한 목적에 자신을 바치게 됩니다.


사람은 철이 들고 나서야 부모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암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한 의사는 5월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불효자라는 죄책감에 마음이 짓눌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종종 재래시장을 찾곤 하는데 시장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나물을 팔고 계신 할머니를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런 할머니를 볼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참회의 눈물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가난을 벗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는데, 막노동을 하던 중에 철근에 깔린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나물을 캐고 다듬어서 시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용돈이라고 내게 기쁜 마음으로 주셨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싫어서 뿌리치고 달아나곤 했어요. 나는 잘 먹고 잘 입지는 못했지만 악착같이 공부했지요. 그래서 부자 집 자식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어요. 부자 집 자식들은 그런 나를 미워했어요...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어느 날 4교시 수업이 끝날 때에 친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복도를 보니 낯익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절뚝거리면서 교실로 들어오시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시장에 내다 팔려고 다듬은 나물 한 봉지를 들고서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자 부자 집 아들이 어머니의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면서 나에게 ‘야, 너네 엄마 병신이었냐?’ 하며 비아냥거리는 거예요. 순간 교실에 있는 아이들은 ‘와~’ 하며 낄낄대며 웃더라구요. 나는 참을 수 없어서 부자 집 아들을 정신없이 두들겨 패줬지요.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잘 차려입은 아주머니와 그 부자 집 아들이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며 호통을 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 거야? 못 배우고 없는 티내는 거야 뭐야. 자식 교육 좀 잘 시켜. 어디 감히 우리 집 귀한 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느냔 말이야. 으응?. 어머니라는 작자가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부자 집 아주머니가 내뱉은 듣기 거북한 말을 듣고서도 어머니는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당당하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어요.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수업료를 꼬박꼬박 챙겨주셨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나를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ooo야, 네 어머니께 잘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어제 주신 나물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주거라.”...


그 후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처가(妻家)에서 병원도 개업해 주고 너무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를 잊고 살았어요. 솔직히 잊고 싶었던 겁니다. 어머니에게는 매달 생활비를 보내드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찾아가 뵙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우리 집 앞에서 한 노인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싸우고 있는 거예요. 야윈 얼굴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었는데 다리를 절고 있었지요. 그 노인은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기뻐하면서 “애, oo아, 많이 좋아졌구나.”하고 다가 오시더라구요. 가정부가 보고 있어서 그랬는지 순간 나는 차가운 말로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할머니. 저는 oo이가 아니라 최oo입니다.” 어머니는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돌아 가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자, 가정부는 “별 노망든 할머니가 다 있다”며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 후에 나는 한 달 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나머지 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지요. 어머니는 내가 생활비를 보내주었지만 여전히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면서 기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만히 곁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그때 나물을 사려는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할머니,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하고 물었어요. 어머니는 “아니여. 우리 아들은 서울 큰 병원 의사여. 자꾸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디. 내가 싫다고 혔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식 신세를 져. 요즘도 자꾸 올라오라는 거 뿌리치느라고 혼났구만. 우리 아들 같은 사람 세상에 둘도 없어. 우리 아들이 효자여, 효자.” 하며 자랑하시면서 나물을 듬뿍 주고 있었어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도 달려갈 수 없었어요. 곧장 어머니가 살고 있는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에 들러 방 틈으로 돈 봉투만 넣어두고 돌아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지날 무렵이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내려오라”는 부고였습니다. 부고를 받고 시장에 들렀는데, 정말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어요. 집에는 선생님 혼자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잠시 후에 저를 불렀습니다. “oo아, 내 옆에 와서 잠깐 앉아라" 선생님은 나에게 어머니가 쓰시던 낯익은 보따리를 주시면서 “풀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돈이 있었습니다. “이거, 돈 아닙니까?” “그래 돈이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 동안 네가 돌아오면, 혹시나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모아두신 돈이란다. 너 하나 믿고 무슨 미련인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너를 기다리셨다. 너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 해 하시더구나. 내가 가끔 네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드렸는데, 나에게 네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단다. 그리고 네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함께 말이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적이었다. 너를 키워주신 부모님이 퇴근길에 집에 오는데, 네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것을 보셨단다. 마침 너의 부모님은 자식이 없던 터라 너를 데리고 가서 키우기로 했단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었지만 너를 데리고 와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랐다고 하셨다. 어린 너를 혼자서 집에 둘 수 없어서 항상 공사판에 데리고 다녔는데, 네가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뛰어들었단다. 네 목숨이 위험하게 되자, 너의 아버지가 너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는데 그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게 되셨단다. 그러니 너는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 덕에 살아났다는 거야. 다리를 다쳐 벌이가 시원치 않아 생활이 어려울 거라고 염려하던 주위 사람들이 네 어머니에게 “키워봤자 소용이 없으니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다는구나.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너를 버리지 않고 당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키웠다는 거야. 네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에 네 어머니는 암이 걸리셨는데, 그것을 알고도 네 학비를 대기 위해서 병원에 가지 않으셨단다. 그리고 네가 암 전문의가 되어 명성을 날리자, 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너를 보려고 물어물어 서울에 올라가셨다가 집에 내려오셨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나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울 좋은 인간의 가식에 머리를 들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영정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로 이 불효자를 바라보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모님이 우리의 곁에 가까이 계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자식들이 부모님 곁에 가까이 있습니까? 사람은 철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전문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철이 든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철든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은혜를 알 때 비로소 철이 든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때 철이 든 것입니다. 철들기 전에는 뭐든지 떨떠름합니다. 깊은 맛이 없어요. 철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아래만 보입니다. 내리 사랑만 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철들고 나서야 비로소 위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것입니다. 철든 신앙인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철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철들지 못한 사람은 청개구리처럼 비가 올 때마다 웁니다. 철들지 못한 사람은 어버이날이 다가올 때마다 불효자로서 우는 것입니다. 복은 받았지만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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