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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by 【고동엽】 2022. 9. 24.
 
 

 

히 5장11절-6장12절


군대에서 잘 쓰는 말 중에 "대강, 철저히"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시키면 '대강 해서 빨리빨리 마치되' 그러면서도 '검열에는 걸리지 않을 만큼만 철저히' 해 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이 말이 군대생활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그 얼마나 요긴한 제1요령인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열심히, 너무 완벽하게 하려 하다보면 시간 안에 다 못할 뿐 아니라 스스로 지쳐서 뻗어버리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인 것이 '완벽주의자'(perfectionist)입니다.
  매사에 꼼꼼하고 모든 것이 완벽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주로 약간 비꼬는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저도 제 어머니 핏줄을 타고난 까닭에 그런 완벽주의의 성격이 조금 있습니다.
  제 어머니로 말하자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시켜 놓으면 그 병실 창틀에 낀 먼지까지 손수 깨끗이 닦아내어야 편안히 잠이 오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저의 경우를 예를 들면, 미술시간에 색종이 모자이크를 할 때 다른 친구들은 다 시간 내에 완성했는데 저만 그 색종이 모자이크 조각을 너무 작게 잘라서 꼼꼼하게 붙이려 하다가 반도 채 완성하지 못하는 따위의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공부하러 오신, 경향교회 출신의 한 강도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아파트(월세집)들은 주로 다 카펫 바닥이라서 진공청소기를 하나 사게 되었는데, 이분은 물비누를 쓰는 진공청소기를 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자기는 카펫에 먼지가 조금만 있어도 기관지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비누 진공청소기는 일 년에 한두 번만 써도 충분하고, 또 그것 한번 쓰면 카펫 완전히 마르는 데만 해도 며칠씩 걸릴 텐데 어떻게 감당하시겠느냐고 했더니, 그제야 포기하고 일반 진공청소기를 사셨던 것입니다.
  조금 더 사귀어 보았더니 그 강도사님은 저 같은 사람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진짜 완벽주의자인 것을 알게 되었고 저는 정말 두 손 번쩍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주의라 할지라도 실제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더 완벽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지, 그 어떤 사람도 먼지 한 톨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청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전 장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구구절절 강조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장 11절에 와서는 갑자기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 관한 심오한 진리가 많이 있는데, 지금 이 히브리서를 받아 보고 있던 어느 초대교회의 수신자들이 그런 깊은 진리를 이해할만한 수준이 아직 못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해 해석해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참, 이 사람들이 아직 이 말을 완전히 이해 못하지...' - 바로 이런 생각이 언뜻 들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까지 역설해오던 주제를 잠시 벗어나서, 신자의 신앙생활 성장과 그 완성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까 완벽주의자의 경우처럼, 그 어떤 신자도 자신의 생활을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그 완벽함을 향한 부단한 노력과 성장이 있어야만 그 신앙은 살아 있는 진짜 신앙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대망의 2006년 첫날을 첫주일로 맞이하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말씀을 통하여 올 한 해를 통하여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생활의 첫걸음을 함께 내디디고자 합니다.

  1.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생활의 성장은 제대로 중생 받은 신자라면 필연적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이라는 그 자체가 본질상 성장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5장 12절부터 14절에 기록하기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라는 말은 '이미 복음을 영접하고 신앙생활 시작한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만큼 당연히 이제는 남을 가르칠만한 수준에 도달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초보"라고 번역된 말의 원문은 문자 그대로 '알파, 베타, 감마'라는 헬라어의 첫 세 알파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초보"란 바로 "회개,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안수, 부활, 심판" 등에 관한 교훈을 두고 하는 말로서, 정말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 중의 기초, 그야말로 '가나다'에 해당하는 교리들입니다.
  바로 그런 기초 교리들을 두고 "물론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하기는 하지만, 너희들이 여태까지 이런 것조차 완전히 습득하지 못하고 다시 배워야 한다면, 참말로 젖 먹는 어린 아이 같은 신자들이다."라고 이 히브리서 기자가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는 말씀은, 젖 먹는 교인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장한 교인의 차이는 바로 그 배운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진보가 없는 교인은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써 먹을 줄을 모르고 축복의 체험을 해 보지 못하는 반면에, 자꾸 자라는 교인은 그 말씀에 스스로 훈련을 받아서 자기 행동의 선악을 말씀에 따라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12절 하반절에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는 말에서 '되었도다'란 말은 영어로 하자면 "you have become"이라는 완료형으로서, 오히려 젖먹이 수준으로 '되돌아가버렸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본래 뜻은, 신앙생활에서 성장한 후에 다시 초보로 후퇴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 자라난 것이 없는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을 과장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 믿은 후 "때가 오래" 지났으면 당연히 성장이 있어야 마땅할 것인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고 무언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때가 지나면 젖먹이로부터 성인으로 자연히 성장합니다.
  만약 성장 발육이 없다면 그 자체가 이미 무슨 큰 병에 걸려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라지 못하는 병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불치병과 꼭 같이 심각하고 중한 병인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역시 그것이 진짜로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 본질상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신앙생활에 진보가 없다면, 사실은 그 신앙이라는 것의 소유 여부 자체부터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처음 예수 믿고 은혜 받은 때로부터, 내가 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오늘까지 얼마의 세월이 흘러왔는지를 이 시간에 각자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때가 이미 오래 지났는데' 그 처음 때의 자신의 신앙생활과 지금의 신앙생활 사이에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떤 진보가 있었는지를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일 성수나 십일조 생활이 여전히 부담스럽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기도가 안 나오고 전도하기가 부끄럽습니까?
  그런 발육부진의 신앙생활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현상유지하고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아직도 가장 기초적인 복음의 젖을 빨아야 할 신생아의 상태에서 위태롭게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이라는 말 자체가 '다시 태어남'이라는 뜻 아닙니까?
  예수 믿은 후의 생명이라는 것은 그 이전의 상태에서 더 나아지고 호전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옛날의 헌 생명도 그 육신이나 인격이 자라면서 유지되었었는데,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된 신자에게 어떻게 신앙생활의 성장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믿은 사람, 정말 구원의 확신을 얻은 중생 신자는 반드시 그 생활에서도 진보가 있게 되어 있는 줄 알고,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이 새 한 해를 이제 부쩍부쩍 자라나는 기회로 선용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생활의 진보 즉 성화가 없으면 실상은 가장 위험한 퇴보 상태에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6장 4절 이하 8절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에 진보가 없을 때, 결국에는 도달하게 될 최악의 상태를 경고해 줍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말씀은, 일단 복음에 접할 기회를 얻고 어쨌든 신앙생활의 은혜와 소망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겪어 본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6절에 보면 이처럼 신앙생활의 기초적인 은혜를 맛보고 난 후에도 "타락한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퇴보만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도무지 다시는 새롭게 회개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타락에 이를 수 있음을 무섭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한번 복음의 비췸과 은혜의 맛을 본 후에도, '뭐 적당히 신앙생활하면 되겠지.'하면서 전혀 진보 없는 삶을 계속하면, 그런 안일함과 방종이 그 사람의 영혼을 무서운 마비상태에 빠뜨려서 결국에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최악의 구제불능 상태까지 몰고 가게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아예 예수의 '예'자도 모르고 성경 한 줄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전도 받고 분명한 구원확신과 큰 변화의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한번 받았던 사람, 일단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복음의 은혜를 맛보았던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의 영혼이야말로 더욱 위험한 상태라고 진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진리를 듣고 배우면서도 그것이 그 사람의 영혼 속에서 자라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불택자일 가망성이 더욱 높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해 듣고 오랫동안 배워 왔으면서도 확신된 신앙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그 구원의 복음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던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지극히 배은망덕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과 은혜를 접해 본 사람이 신앙의 진보가 없이, 오히려 다시는 기회가 없을 최악의 타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을 가리켜 7절과 8절에서 '채소냐' 아니면 '가시와 엉겅퀴냐' 하는 말로 비유했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면 그 땅에서는 "합당한 채소"가 자라든지 아니면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말씀과 성령이라는 은혜의 단비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합당한 열매가 자라나지 않는다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실상은 가시와 엉겅퀴가 대신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엉뚱한 것들이 자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심하고 앉아만 있으면, 결국 그 영혼을 그 가시와 엉겅퀴들을 몽땅 태우는 저주의 심판만이 그 사람에게 남아 있을 따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정말 "자주 내리는" 은혜의 비를 담뿍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이 귀한 말씀의 은사, 천국의 소망, 성령의 역사를 가장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면서도, 자신의 신앙생활이 구체적으로 자라나지 않고 있다면, 도대체 어디서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 영혼이 구원 받을 길이 있겠습니까?
  주일마다 비춰 주시는 은혜의 비췸을 받고도 내 영혼이 까딱도 하지 않고 태연자약, 요지부동이라면, 정말 나라는 사람은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구제불능의 심령의 소유자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지 않습니까?

  '교회 적당히 다니면 됐지, 뭘 그리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뭐, 세월 지나 때가 되면 절로 좀 나아지겠지.' - 이렇게 스스로 편리하게 막연히 얼버무리는 동안, 그 사람의 영혼 속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영혼은 결국 다시는 진정으로 회개할 마음도 가지지 못하고 끝내는 저주의 불심판으로 직통하게 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진보가 없다는 것은, 곧 퇴보를 의미하며 그 퇴보의 끝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심판일 뿐입니다.
  진보 없는 신앙생활은 가장 무서운 불치의 영적 병을 앓고 있는 상태인 것을 깨닫고, 이 새해에는 이런 고질병에서 벗어나서 정말 건강한 신앙생활을 새로 시작하는 축복의 날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영화(榮化)를 향하여 계속 성장하는 신앙생활만이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6장 9절로 12절까지의 말씀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이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까지 말해 왔던 것과는 아주 달리 그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라는 말은 '비록 우리가 너희에게 자극이 되게 하고자 너희를 젖먹이라고 경책하고, 그런 상태로 가다가는 구제불능이 될 수도 있다고 엄히 경고하고 있기는 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고 하면서, 또한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꾸짖고 경책하기는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너희들이 나름대로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봉사하며 노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알고 계시고, 또 우리들 역시 너희들의 신앙생활이 그처럼 악화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고무적인 격려인 것입니다.

  이어서 11절과 12절에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꼭 같은 열성을 끝까지 나타내어서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결코 신앙에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이전에 믿음과 인내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았던 신앙 선배들을 본받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에 이르러 이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애써 왔는데 여기서 도중하차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라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해 주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하려고 노력해 온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좀 더 노력하고 꾸준히 성장하여 끝까지 풍성하게 자라도록 하자. 계속 인내하고 진보하는 신자들만 누리게 될 약속의 기업을 받는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 가자.'라는 아주 뜨거운 권면인 것입니다.

  목사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교인에게도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어떤 때는 책망도 하고 극단적인 경고의 말까지 하기도 하지만, 그 의도는 어디까지나 성도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영위해 오고 있는 신앙생활에서 도중하차하지 않고 마지막 결승점에 도착하도록 이끌어가려는 데에만 있습니다.
  그래도 남들 다 늦잠 자는 주일 아침에 예배드리러 나오고, 그래도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했는데, 그래도 생판 교회생활 전혀 모르는 불신자들보다는 애도 많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혹 약속된 구원의 기업에는 이르지 못하는 교인이 있다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차리라 아예 화끈하게 죄만 짓고 철저히 방탕하게 미련 없이 살다가 심판 받게 되면 오히려 억울할 것이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꽤 한다고 하다가 그만 도중하차하게 되면 정말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게 될 사람'이 바로 그처럼 도중에서 탈선한 교인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왕의 잔치에 초청'을 받고 잔치자리에 앉기도 했던, 즉 전도를 받고 교회 출입도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도 받고 기회도 있었던, 즉 직분자 이름도 가졌고 교회봉사의 사명도 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시기도' 했으며 '주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듣기도' 했던, 제법 교회생활의 기쁨도 맛보고 말씀에 은혜도 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런 자들 중에서 정작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는 지옥으로 떨어질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차라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전혀 해보지 않았다면 오히려 덜 억울할 텐데 그처럼 구원에 가까이 도달했다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으니, 불신자들과 같이 지옥을 가면서도 이 사람들은 그 원통한 마음에 특별히 '슬피 울며 이를 갈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도 지금까지 유지해 온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망치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억울하지 않습니까?
  오직 '동일한 부지런으로,' 끝까지 '게으르지 아니하고,' 또한 '오래 참으면서' 신앙생활의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만,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이 끝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 도달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이란 오히려 불신앙보다 더 못합니다.
  받은 은혜를 늘 되새기고 주신 사명을 소중히 여겨 충성하여 자신의 신앙생활을 계속하여 성장 또 성장시키는 가운데, 우리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에는 성화의 완성 곧 영화(榮化, glorification)에 꼭 이르고 구원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왜 우리의 신앙생활은 완전한 데로 향하여 자라나야만 합니까?
  진짜 신앙은 그 생활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진보가 없으면 그 영혼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자리로 떨어질 위험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신앙생활의 진보만이, 지금까지 지키고 이루어 왔던 것들을 헛되이 하지 않고 구원 약속의 완성에까지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절에 해당되는 6장 1절로 3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즉 '아주 내어버리고'가 아니라 '이 수준을 넘어서서'라는 말이지요,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성화(聖化)를 통하여 영화(榮化)에 이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결코 자기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일임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택하신 성도는 바로 '성령의 견인(堅忍)'을 통하여 이것을 분명히 도와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완전한 데까지 나아갈 것이다' -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바로 이런 선한 욕심, 이런 멋있는 목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교회가 전체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개인 신앙생활의 성장이 반드시 나타나야합니다.
  그 성장이 있어야 개인구원이 완성될 수 있고, 개인구원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교회가 그 존재목적을 제대로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새로 전도해오고 교인 수자는 늘어가도 걸핏하면 낙심하고 조금만 지나면 금세 배교자가 되는 사람들만 양산한다면 그 얼마나 헛된 수고이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절대로 그런 교인,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인 한에는 출생한 이후에도 계속 자라나게 됩니다.
  만약 자라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단이 아니라 사실상 퇴보요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신자의 중생 역시 한 순간에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신앙고백을 통한 진짜 중생일 때에는 반드시 성화의 과정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초보'라 할지라도 진짜 초보이면, 반드시 '완전한 데'로 즉 성인 신자로 성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강, 철저히'는 지금도 군대에서는 여전히 부동의 제1요령이겠지만 신앙생활에서는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완벽주의자'가 되자는 것도 또한 아닙니다.
  완전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살 동안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고 흠 하나 없이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 모두를 주님 당신처럼 완벽하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그 완전을 향하여 부단히 성장해 나가는 것 - 이것이 바로 실제적으로 '완전한 신앙생활'입니다.
  지난 2005년 동안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무와 같은 우리를 주님께서는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지지 않으시고 금년에도 우리 주위를 '두루 파고 거름을 주시면서' 다시 한 번 새 기회를 주신 줄로 알고, 꼭 자라서 실과를 맺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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