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0:15~17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현재 쓰이고 있는 10억 개의 영어 단어를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Time, 시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시간을 뜻하는 비슷한 단어들도 많이 쓰이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 관한 단어들도 아주 많이 쓰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Person, Man, Child, Woman 등이 많이 쓰인 단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통계 분석 결과를 통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역사란 사람이 시간 속에 사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사는 사람의 삶이란 것이 그 통계의 다른 결과들을 볼 것 같으면 별로 안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유롭지도 못하고 또 평화롭지도 못한 것 같다는 말입니다. Work, 일이라는 단어는 16위인데 비해 Rest, 쉰다, Play, 논다는 단어는 100위 안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War, 전쟁은 49위이지만 Peace, 평화는 순위에서 아예 빠져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우리 인류의 역사는 일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듯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난 한 해를 두고 생각해 봐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 지난 생애를 두고 돌이켜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일찍이 모세가 탄식하듯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시편 90편 10절 말씀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렇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누구에게 있어서나 삶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리고 수고와 슬픔은 늘 우리에게 위기를 안겨 줍니다. 때로는 경제적 위기가 닥칠 때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인간 관계, 특히 가족 관계가 붕괴되는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위기를 겪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심각한 위기 상황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위기가 닥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성경이 그와 같은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독한 이사야 30장의 말씀은 남쪽 나라 유다를 히스기야 왕이 다스리던 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북쪽의 앗수르가 전성기를 구가하며 무자비하게 영토를 확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미 북쪽 나라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습니다. 백성들은 앗수르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북쪽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죽자 팔레스타인 지역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산헤립 왕은 막강한 전력의 앗수르 군을 투입하여 팔레스타인 정복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남쪽 나라 유다는 위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앗수르 군에게 치욕적인 모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모색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첫째는 애굽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사 30:2~3) 또 16절 말씀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애굽의 지원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나 도망가서 훗날을 도모하려는 것이 모두 다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었고 위기는 더욱 심화되지 않았습니까?
그 때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교훈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인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1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여기서 돌이키라는 것은 완전히 방향을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와 같은 표현입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장 많이 던진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돌이켜 회개하고 내게 돌아오라!”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돌이켜야 합니까? 그 때 히스기야는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과 앗수르의 공격을 피하여 도망하는 것을 놓고 선택의 고심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두 가지 방법 모두를 버리고 그런 생각에서 돌아서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근본적인 정책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누구보다 신앙적었습니다. 아하스 시대에 저질렀던 많은 악습과 잘못된 정책들을 바로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교에 있어서 지나치게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는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적 계산과 정치적 수단에 의해서 국가의 위기 상황을 넘겨보려는 생각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생각으로부터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우상 숭배를 척결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지만 그 자리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대신 채울 것 같으면 그것은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전적인 강대국들 틈에서 약소국의 지도자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히스기야도 많이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고민, 그런 염려, 그런 계산 등 모든 인간적인 생각으로부터 돌아설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그 어떤 심각한 위기 상황이 닥칠지라도 믿음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만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위기 그 자체보다 불안한 마음, 허둥대는 자세, 조급한 생각 등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호수의 수면에 물결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할 것 같으면 마치 유리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밑바닥의 물고기와 돌과 풀까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파문이라도 생길 것 같으면 보이는 모습이 일그러지고 끝내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때문에 조용히 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잠잠하고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애굽 군대의 맹렬한 추격과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 사이에 갇혀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만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위기는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위기를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생각을 돌이켜 하나님만 신뢰하는 단순하고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만을 고집할 것 같으면 그 결과는 참으로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17절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결과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 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그러나 조용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기다리는 자들을 복 있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이사야 30장 18절, 19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자는 결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 부르짖는 소리에 친히 응답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돌이켜 하나님만 신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참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슬프고 고달픈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도 수고와 슬픔은 계속될 것이며 위기도 계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며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의지해야 했고 그 결과 늘 불안과 초조 속에 살았던 삶의 모습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문제 해결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그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이나 능력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고 의지하여 한 사람이 꾸짖어도 천 사람이 도망가는 초라한 삶이 아니라 천 사람이 소란을 피워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 꼭대기의 깃대처럼 외롭고 처량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늘 함께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인간적 생각에서 돌이켜 조용히 하나님만 신뢰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믿음의 삶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 위의 기름진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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