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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령의 열정을 가지십시오 (로마서 9장 1-3절)

by 【고동엽】 2022. 9. 23.

구령의 열정을 가지십시오  (로마서 9장 1-3절)

<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 >

2004년 몇 명의 목회자로 시작된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연맹(KECMA)’ 소속 목회자가 어느덧 40명이 넘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소속 목사님들의 교제가 깊어지며 만날 때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선교를 도전하는 은혜로운 역사가 넘쳤습니다. 저는 능력도 없는데 2년간 ‘한복기선연’의 총무를 맡으면서 모임의 발전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에 있는 85개의 한인이민교회가 소속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한인총회(KDCMA)’에서는 ‘한복기선연’ 소속 한국 목사님들이 미국으로 방문해서 같이 인적인 교류를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방문 비용이 만만찮아서 거의 인적교류를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KDCMA의 감독이신 문형준 감독님은 지난 2년 동안 총무인 저라도 미국에서 열리는 총회에 참석해주기를 바랐지만 여건이 쉽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금년 1월, 미국 방문 결심을 하고 한 달에 일정부분 재정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다니던 영어학원, 미술학원, 수학학원을 다 끊자 매달 80만 원 이상 절약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 외로 재정이 잘 축적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모일만하면 선교사님들이 방문해서 모았던 재정이 푹 줄고, 또 조금 모일만하면 어렵게 사는 후배 목회자들을 만나서 모았던 재정이 푹 주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요새 북한에 대한 ‘퍼주기 논란’이 있습니다. 다행이 우리 부부 사이에 ‘퍼주기 논란’은 없습니다. 다만 아내는 저의 태도를 기꺼이 지지하면서도 가끔 농담 섞어 말합니다. “우리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우리에게는 우리를 재정적으로 돕는 목회자는 하나도 없고, 우리가 도와야 할 목회자만 수두룩하네요.” 그러면 제가 말합니다. “그것이 축복이에요.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도 목회자는 아니더라도 가끔 평신도들의 도움을 받잖아요?”

결국 가정 경제를 생각해서 미국 방문을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고민 끝에 미국 방문을 결정했습니다. 이번 방문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 선교사 훈련학교의 비전을 나누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한국 목회 15년 동안 한번도 미국의 동료 목사님들에게 후원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미국 교단 소속으로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을 한국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저는 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미국의 동료 목사님들과 교단 본부에 “저희 사역을 후원해 달라!”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님들을 더 후원해야지 한국에서 편하게 목회하면서 후원받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이제까지 후원요청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료 목사님들과 기도제목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달라!”는 얘기를 잘 못합니다. 이번에도 그 얘기를 잘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회와 분위기를 허락하시면 그 기도제목을 나눌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면 누군가 헌신할 수도 있고, 그런 헌신이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길 것입니다. 약간 소극적인 생각인 것 같지만 그렇게 살았어도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게 채워주셨습니다.

물론 여러 면에서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신비하게 넘치도록 채워주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왜 가끔 내게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까요? 그것은 내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남의 것만 큰 줄 알기 때문입니다.

< 내 것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

옛날에는 바나나가 귀할 때 부자들만 바나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바나나 한번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가끔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과가 최고 과일이다!”라고 하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나나가 최고지 무슨 사과가 최고인가?” 저는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바나나를 먹어보았습니다. 그때 바나나를 먹어봤다고 은근히 시간 날 때마다 간증 비슷하게 자랑했습니다.

그 뒤 바나나 수입이 쉬워지고 많아지면서 점점 사과가 바나나보다 훨씬 맛있고 좋은 과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시간이 지나면 진짜 가치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이 좋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화려하게 보이는 이국적인 바나나보다 우리 것인 사과가 훨씬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서울 이태원에 사는 한 남편이 가끔 생각했습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예쁜 서양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나도 한번 사귀어 봤으면 좋겠다.” 어느 날, 진짜로 그 꿈이 이루어졌는데,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결국 3년 만에 서양 여자에 대한 환상도 깨지고 가정도 깨졌습니다. 그처럼 다른 여자가 좋은 것 같지만 한번 지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몇 년 지나면 자기 아내가 제일 좋은 것을 깨닫습니다.

너무 바나나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너무 평범해 보이는 사과가 이국적인 바나나보다 좋다는 하나님 말씀과 인생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것이 지혜롭고 복된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어떤 은사를 가지고 기적을 체험한 다른 사람의 화려한 신앙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내게 있는 것이 더 좋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가 사실상 내게는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며 불평하면 받은 것이 별로 없는 것 같고 결국 하나님께서 있는 축복도 거두어 가시지만 하나님께서 내게도 주신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면 정말 받은 것이 많다는 영안이 열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더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진정으로 원하면 시련을 만나도 감사하고, 소유가 없어도 감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근심하지 말고 끝까지 감사하겠다고 각오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

본문에는 동족을 향한 사도 바울의 애틋한 사랑과 근심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이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큰 근심이 있다고 고백하는데, 사실 그런 근심은 필요합니다. 근심에는 선한 근심과 나쁜 근심이 있습니다. 선한 근심은 필요하지만 나쁜 근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무려 300번 이상이나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염려로 키를 한 자도 자라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다고 아무리 근심해도 1000원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조금 더 기도하고 조금 더 땀을 흘리는 것이 낫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 말씀을 보면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근심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쓰레기와 같습니다. 쓰레기를 버러지 않고 남겨두면 온 집안이 악취가 진동하고 건강도 나빠지는 것처럼 마음속에 근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 그 쓰레기로 우리의 마음과 육체까지 병들게 됩니다.

잠언 17장 2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뼈는 피를 만드는 곳입니다. 그런데 근심은 바이러스와 같아서 뼈를 마르게 해서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의사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질병의 70%이상이 근심과 불안과 공포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의 근심과 무거운 짐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중에 평안을 주시고 이제 더 이상 항상 제가 고민하고 근심하는 그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마음속에 놀라운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

< 선한 근심은 필요합니다 >

그처럼 나쁜 근심은 버려야 하지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가진 것과 같은 선한 근심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근심했습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은 동족을 사랑해서 동족에 대한 깊은 근심을 가지다가 동족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이 저주 받아도 좋다는 마음까지 가졌습니다.

모세도 자기 민족이 죄를 짓자 가슴아파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하셔도 좋습니다.” 예레미야도 자기 백성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고급하나이다. 내 눈이 어찌하여 눈물 근원이 될꼬 하고.” 그렇게 울며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거리를 헤맸습니다.

미국에 찰스 피니라는 유명한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카고의 거리에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갑자기 거리에서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우셔요?” 피니가 대답했습니다. “보세요! 저렇게 영생을 모르고 지옥으로 가는 무리를 보십시오.” 그러면서 거리에서 가슴을 쥐어뜯고 통곡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중에도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주님은 방황하는 무리를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주님의 근심과 눈물을 가지고 내 주변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도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는 눈물로 씨를 뿌릴 구령의 열정을 가진 일꾼이 필요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95%의 교인들은 영혼을 한 사람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아직도 교인의 90% 이상이 일꾼이 아닌 구경꾼이라는 말입니다. 왜 성도들이 전도를 안 합니까? 어떤 성도들은 말합니다. “저는 전도할 줄 몰라요. 전도는 제 은사가 아니에요.” 그러나 전도는 방법이나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었던 삼중고의 소녀였습니다. 그런 소녀를 어떻게 교육합니까? 아무도 교사로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설리반은 교사로 자원하며 말했습니다. “그녀를 교육하는 단 한가지의 교육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터치입니다.” 그 사랑의 터치로 설리반은 헬렌 켈러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적의 여인으로 키워냈습니다. 우리는 한 영혼의 가치와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세기 미국에 스티브 팩스턴이라는 주일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교회 친구가 그를 유혹했습니다. “스티브! 이번에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데 주일도 일하는 일인데 아주 수익성이 좋네! 그 일을 하면 앞으로 10년이면 넉넉히 5만 불은 벌 수 있네!” 당시 5만 불은 굉장한 돈이었습니다. 그 유혹을 받고 스티브가 말했습니다. “친구! 좋은 정보를 주어서 고맙네. 그러나 나는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포기할 수가 없네.”

결국 그 친구는 주일에 일하는 곳을 택해 세상으로 나가고 스티브 팩스턴은 계속해서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우연히 둘이 다시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정말 큰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의기양양하게 팩스턴에게 말했습니다. “스티브. 내가 말한 대로 되었네. 10년 만에 나는 5만 불을 벌었어.”

이때 당시 큰 교회의 주일학교 부장으로 있던 스티브 팩스턴은 대답했습니다. “축하하네. 그런데 10년 동안 내 손을 통해 교육받은 어린이들도 한 5만 명쯤 될 거야.”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성공했다고 하지만 진짜 성공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준 사람입니다.

< 구령의 열정을 가지십시오 >

이제 세속적인 성공만 추구하지 말고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전도한 한 사람을 통해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편 126편 5-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나는 씨 하나를 심어도 거둘 때는 단으로 거두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오직 한 사람, 자기 형제 베드로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인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해서 설교할 때 한꺼번에 3천명을 단으로 거두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잊지 말고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힘써 전도해야 합니다. 내가 전도한 한 사람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미국에 에드워드 킴볼이란 주일학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반에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뜨기 학생이 새로 출석했습니다. 그에게 “뭘 하느냐?”고 묻자 구둣방에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다음 주에 킴볼이 소년의 구둣방을 방문하자 그 소년은 구두 닦는 자기 모습이 부끄럽다고 뒷문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그 소년을 따라가 그를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전도자 디 엘 무디였습니다.

킴볼은 한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지만 무디는 전 미주와 유럽에 복음의 불을 질러서 백만 명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심기는 씨 하나를 심었지만 거둘 때는 단으로 거둔 것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한 영혼을 교회로 인도하고 양육하는 것은 더욱 훌륭한 일입니다.

기네스북을 부면 전 세계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가장 오래 한 분이 나와 있습니다. 메인 주의 포틀랜드의 임마누엘 뱁티스트 교회의 미스 엘리자베스 에이게슨이라는 분입니다. 그녀는 19세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해서 100살에 죽기 한 달 전까지 81년 동안 주일학교 선생으로 쉬지 않고 봉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시고 얼마나 흡족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영국에 윌리암 부쓰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영국 교인들의 삶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일단의 무리를 조직해서 “전도는 단순히 전도가 아니다. 전투다.”라고 하며 군대식으로 전도하고 사회 구석으로 들어가 최대한 봉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교단이 구세군입니다. 처음에 영국 사람들은 구세군 운동을 무섭게 핍박했지만 점차 사람들이 구세군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907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7세가 부쓰를 왕궁으로 초대했습니다. 식사 후 여왕이 기념 앨범에 부쓰의 친필 싸인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부쓰가 앨범에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Some men's ambition is art. Some men's ambition is fame. Some men's ambition is gold. But my ambition is souls of men.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이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성이고,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그러나 나의 야망은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혼을 향한 불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이 시간에 전도의 사명을 새롭게 해보십시오. 말을 잘 못하면 설리반 선생처럼 사랑의 터치로 힘든 영혼의 등을 두들겨 주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전도는 화려한 말이나 좋은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전도하면 어디선가 반드시 열매는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 악이란 선의 결핍입니다 >

요새 사람들의 표정이 대개 어둡고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는 혼란하고 경제는 어렵고 취직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면 너무 비관적인 내용이 많아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는 나라 같습니다. 사회가 마치 어둠의 세력에 조종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와 성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 사도 바울처럼 근심하며 더욱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악이나 악마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에 악과 악마가 많습니까? 사실 세상의 악과 악마를 만들고 있는 것은 사람입니다. 악마는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미움과 죄가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악마를 키우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입니다. 결국 “내 탓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철저한 회개만이 우리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변화된 후에 세상에 있는 악한 현실 때문에 오랫동안 번민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지는 않았을 텐데 왜 악이 이리 많을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결론을 내렸습니다. “악이란 선의 결핍이다.” 즉 우리가 빛을 비추며 살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가 어두운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진정 ‘세상의 희망’이 되고 있는가에 대한 자책과 안타까움과 근심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주일 저녁에 안성 온누리 교회에서 몇 교회 연합으로 임병철 선교사님을 모시고 선교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임병철 선교사님이 장장 1시간 30분 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어떤 결론을 내리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또 새로운 얘기를 했습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너무 설교가 길어지니까 저의 왼쪽 뒤에 있는 사람이 설교가 끝날 것 같다가 새로운 얘기가 시작되면 “주여!”라고 몇 번이나 탄식을 했습니다.

요새 설교학에서는 설교가 짧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설교를 짧게 하는 것은 남의 시간을 배려하면서 엑기스를 전달하려는 사려 깊은 태도이기도 합니다. 또한 회의를 할 때나 대화를 할 때도 혼자 말을 독점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사실상 대표기도도 길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 뉴욕에서 총각 전도사 때 교회를 개척한 적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아파트 방에서 약 10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저의 개척사역을 도와주는 나이 많은 한 여자 전도사님이 주로 예배 기도를 맡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저의 개척목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한 가지 문제는 너무 대표기도를 오래 했습니다.

한번은 시간을 재보니까 9분을 기도했습니다. 같은 개척 동역자니까 말은 못하고 그 주간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구 전도사님이 대표기도를 짧게 하게 하소서!” 그 다음 주간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이제 아무개 전도사님이 대표기도를 해주시겠습니다.”라고 대표기도를 시키고 시간을 재보니까 장장 15분 동안 기도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기도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이 전도사님이 말씀 전해주시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게 도와주소서!”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도록 도우려면 기도 좀 짧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설교 줄거리도 잘 잡히지 않아서 설교는 14분만 하고 끝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설교를 길게 하거나 대표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을 보면 비 호감입니다.

원래 임병철 선교사님은 제가 잘 압니다. 그분은 원래 설교를 짧게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설교가 길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원래 대화를 독점하는 그런 인격을 가진 분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날에는 그분의 긴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임 선교사님이 성도들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선교에 조금이라도 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저렇게 애쓰는구나!”

우리에게도 영혼을 향한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포기하지 말고 우리라도 다시 새롭게 일어서야 합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금세 밝아집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침이 되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안에 빛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어느 때보다 ‘사랑과 용서와 이해’라는 주님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 빛이 우리로부터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자신이 속한 처소에서 주님의 작은 빛을 비춤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승리하며,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전도함으로 하나님 나라 부흥의 초석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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