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하나님의 신의 강림 (민수기 11:24-30)

by 【고동엽】 2022. 9. 22.

하나님의 신의 강림    (민수기 11:24-30)  

언젠가 제가 잘 아는 모 교회 여 집사님께서 상담전화가 왔습니다. 그녀는 제가 서울의 모 교회에서 중·고등학생을 지도할 때 중학생이었는데, 성장하여 이제는 대학 교수가 된 피부과 의사입니다. 그녀는 가끔 저에게 전화를 해서 신앙과 인생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회계 집사로 봉사하는데 어쩌다가 한번씩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학회 관계로 빠지기도 하고, 혹은 남편의 성화로 놀러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죄스럽고, 늘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교회 여 집사 한 분이 그런 자신에게 저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 여 집사님은 "당신이 하나님께 불충성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시려고 칼을 갈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집사님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상담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저는 먼저 그 집사님에게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여 집사님에게 "당신이 어떤 일로 하나님께 죄지은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귀하게 쓰시기 원하십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 집사님을 안심시켰습니다.
저는 가끔 주일을 지키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집사님보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성도에게 저주를 퍼붓는 그 집사님이 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 집사님이 정말로 '칼을 갈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상대방을 정죄하려는 목적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절대로 그렇게 그런 법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고,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고, 남의 죄를 가려주고, 기도해 주게 할지언정, 그렇게 저주를 퍼붓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악령이 받은 것이지 성령을 받은 자의 소행이 아닙니다. 성령은 언제나 남을 도와주고, 위로와 격려를 통해 힘을 주며, 따뜻하게 합니다.
간혹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이 성령 충만한 척하며, 그렇게 점쟁이처럼 요사스럽게 남의 허물을 폭로하거나, 배타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다만 자신의 교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인데, 우리에게 임하시는 '보혜사'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도와 능력있는 크리스찬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남의 약점을 알아내고 그것을 폭로하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연약함을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나를 헌신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바로 '위로의 능력', '겸손의 능력'인 것입니다.

아현감리교회에 김지길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감리교육원 목사로써 감리교 감독회장까지 지내신 저명한 목회자이십니다. 사람들은 그 분의 명성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는 그와 함께 30여 년을 부목사로 섬긴 이 목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들은 동갑인데 김지길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계시는 30년 동안, 이 목사님은 담임목사님을 섬기면서 심방을 주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심방만 하면 병든 자들, 실패한 자들, 외롭고 슬프고 고달프고 낙심한 자들이 다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한 번 다녀가시기만 해도 성도들이 힘을 얻고 다시 회생했다고 합니다. 담임목사님 못지 않게, 이 목사님도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이런 위로의 은사는 대설교가나 저명한 목사가 된 것보다 못지 않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시내 반도를 지나 모압 평지로 이동할 때 있었던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도 싫증이 나서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망과 불평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 중 원로 70인을 뽑아 하나님을 만나는 장막을 진 밖에 세우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는데 모세에게 내린 하나님의 신이 그 70인에게도 임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후에 예수의 승천 후 성령강림의 사건을 예시하는 사건입니다.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는 오늘 이 자리에도 성령이 임하는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1. 교회 공동체는 성령이 이끌어 가야 합니다.

이집트 왕자로 양육된 모세는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환상적인 미래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을 결심하고 미리암 광야로 향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에서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그때 애굽을 버리고 미디안을 향한 것은 하나님의 신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어떻게 화려한 애굽 궁을 버리고 자기 민족을 위해 고난을 받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한 결단 뒤에 다가온 시련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지만, 그는 애굽의 화려함에 투항하지 않고 기나긴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지내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40년 동안 적막한 광야에서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하던 모세는 마침내 호렙 기슭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떨기나무'란 사막에서 자라는 키가 크지 않은 나무인데, 사막의 강렬한 태양 빛에 자연적으로 타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볼품없이 타서 사라지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타 없어지지 않은 모습을 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세상 풍파에 쓰러져 버린 연약한 자라고 생각해 왔던 모세는 신기하게 그 광경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약한 떨기나무도 타 없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자기도 또한 그 떨기나무처럼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이 임한 모세는 늘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신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하시므로 교회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출애굽 공동체나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끈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교회도 개인이 아닌 성령이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가 이 세상에 생명수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인도하는 교회만이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구원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2. 교회 공동체는 성령 받은 성도들이 협력해서 사역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출애굽의 역사를 경험하였으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굽의 생활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로 연명하였지만 곧 그것에도 싫증을 내고 애굽에서 먹던 음식과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나 영생보다는 오늘 당장 편하고 달콤하게 살고 싶다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불평을 늘어놓자 그 소리를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고 죽을 지경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출 11:15).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응답하시기를, 백성 중의 장로 70인을 모으면, 모세에게 임한 똑같은 신을 그들에게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모세를 돕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출 11:16-17). 또한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질릴 때까지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출 11:20).
그러자 모세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냐고 반문했습니다. 성경 그대로 보자면 "보행자가 육십만 명"인데 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장정이 60만 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한 사람들의 전체 숫자는 대략 200만 명 가량 된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200만 명을 일 개월간 먹이기 위해선 어머어마한 양의 고기가 필요한데, 황량한 광야에 그런 고기를 어디서 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꾸짖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출 11:23)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장로들을 장막 주위에 모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내려 주신 신을 70명의 장로들에게도 똑같이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70명이 장로들은 제각기 예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모든 문제를 이길 힘을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받은 사람과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불평 불만으로 서로의 관계를 악화시키지만, 성령 충만한 자들은 기도로 하나님께 하소연함으로써 능력을 받고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사역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서로 연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연합한다는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보면 부족한 점이나 약점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때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남의 부족한 점을 약점으로 삼아 이용하는 것은 연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함께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약점은 잘 찾아내지만 그것을 감싸주거나 채워주는 데는 인색합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두고 보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없는 이야기로 상대방을 모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는 그러한 얕은 수가 통해서 사람을 속일 수 있을는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독불장군식으로 자신의 생각과 주장만이 옳다고 강변하는 것 또한 성령의 사역이 아닙니다. 항상 열린 마음과 열린 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때에는 편견 없이 모두를 수용하고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다 보면 서로의 의견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합니다. 자신의 말만 하고 마음과 귀를 닫아 버리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어떤 일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가장 안 좋은 선택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편 133편 1절에서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합하고 서로 협력할 때 하나님의 교회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3. 교회 공동체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인정하며 서로 공동체의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70인의 장로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사실을 가시적으로 증명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70인 장로'에게 복종하도록 하기 위한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회막에 나아가지 않았던 두 사람 '엘닷'과 '메닷'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 고하기를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민 11:27)라고 했습니다. '예언'과 같은 신령한 일이 거룩한 회막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거처인 진(陳) 중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신약시대에 유대 할례자들이 이방인 중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실에 놀랐던 것과 흡사합니다(행 10:44-48).
이때 모세를 수종들던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지 말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는 엘닷과 메닷이 아무런 모세의 지도나 중재도 없이 개인 거처에서 예언하는 것이 모세의 권위를 침해하는 일로 단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고 말하며 여호수아를 꾸짖었습니다.
여기서 '시기하다'란 '카나'라는 단어는 '샘내다' '질투하다'는 뜻으로서 여호수아의 건의가 매우 감정적이고 불순한 동기에서 이뤄졌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그는 모세의 권위가 높아져야 그를 수종드는 자신도 유리할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예언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에게 임한 성령이 다른 사람들에게 임한 것을 보고 전혀 시기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세례 요한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전해지기만을 바랬던 것입니다.
성령은 진 주변에 모인 70인 장로에게와 아직 참여하지 못한 두 사람에게도 임했다는 것은 장소에 제한 받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특정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거룩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거룩한 장소요, 성령이 역사하시는 장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요엘서 2장 28절의 "말세에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는 말씀처럼 사모하는 누구에게나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의 일을 한 사람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공동체를 원만하게 이끌어 가게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사도들이 여러 가지 일을 겸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자, 집사직을 두어 사역을 분담함으로써 성숙한 교회로 발돋음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은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성령충만한 자는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나갑니다. 우리들 가운데 아직도 교회에서 멀리 있는 이들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성령을 받아 서로 협력하여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