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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딤전1:9-11)

by 【고동엽】 2022. 9. 21.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딤전1:9-11)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옳은 사람을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옳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옳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중 9-10절 말씀을 다시 보면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여러 종류의 옳지 못한 사람들을 언급하는 순서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사실상 십계명의 순서를 따라 그 각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한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 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지켜야할 계명들인 첫 네 계명을 어기는 사람들을 대충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라 한 것은 모두 율법을 거스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율법을 거스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을 어기는 행위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이라 했는데 여기서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겉모양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가 결핍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하나님을 온갖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한 제2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유다서 15절에서는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라는 말로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을 하나로 묶어놓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는 순서가 바뀌기는 했으나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제3계명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4계명을 위반하는 자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보다 명확하게 십계명의 순서를 따라 그 계명들을 어기는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라 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어떤 사람입니까?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입니다. 이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을 어기는 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은 “살인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어긴 자입니다. 그 다음에는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어긴 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인신매매를 하는 자”입니다. 십계명의 순서대로 하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을 어긴 자를 언급해야 할 자리에 “인신매매를 하는 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루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을 위반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제10계명 즉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한 계명을 어긴 자를 언급해야 할 자리에서 사도 바울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십계명의 어느 계명에 명확하게 딱 들어맞는 언급을 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옳지 못한 자들을 열거하며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각 계명을 어기는 자들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제8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 한 계명을 어기는 자를 말하는 대신 “인신매매하는 자”라고 한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십계명의 제8계명을 이해하려고 할 때 사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10계명과의 관계입니다. 제10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와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제8계명은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것”이고, 제10계명은 “남의 것에 대해 탐내는 것조차도 하지 말라”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두 계명 다 남의 소유에 관계된 계명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계명이 수십 개라면 그 중에는 더러 겹치는 것들이 있다 해도 이해가 가겠지만 이 수평적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을 포함시켜도 여섯 가지 뿐인데 그 중 두 계명이 소유에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뭔가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8계명을 제10계명과 꼭 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남의 소유에 손대는 일을 금하는 계명이라기보다 도둑질 중 가장 악질적인 도둑질인 사람도둑질, 즉 납치를 특별히 지목해서 금한 계명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성경의 말씀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도둑질하는 자”라고 할 법한 자리에서 “인신매매를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인신매매가 뭡니까? 사람을 도둑질해서 팔아먹는 것입니다. 납치는 살인과 간음에 이어서 사형에 처해질 범죄행위라는 것이 구약성경의 규정입니다. 반드시 자기의 생명으로 갚아야 될 만큼 아주 악하고 중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출21:16을 보면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 지니라” 했습니다. 신24:7에서는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 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 지니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납치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임이 분명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가 그곳의 반정부 무장집단인 탈레반에 의해 납치된 23명의 한국 젊은이들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그 가족들과 우리 한국교회와 온 국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납치행위는 살인행위와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납치를 저지른 사람은 이미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납치행위는 피랍자를 살해하는 일로 귀결되곤 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가 더 이상의 희생 없이 하루 속히 끝나기를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이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인 납치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도 납치행위의 극악무도함에 대해서 보다 깊은 인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납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외계인들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렇게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범죄인 납치사건이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발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를 납치해서 앵벌이 시키거나 돈을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일이나 여인들을 납치해서 매춘을 강요하는 일이나 남자들도 납치해서 외딴 섬에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일이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또는 법적 권한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온갖 감금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요즈음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옛날 그 소리만 들어도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해지던 “중앙정보부”니 “안기부”니 “보안사”니 하는 기관에서 얼마나 사람들을 잡아다가 구금하고 고문하고 그랬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악하기 이를 데 없는 범죄를 국가기관에서부터 저질렀던 것입니다. 국가기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빚쟁이들도 빚 받아 내려고 납치 감금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 그런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안 되는 것입니다. 채권자라고 채무자를 납치하고 감금할 권리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국가수사기관뿐 아니라 옛날 운동권 학생들도 툭하면 총장도 납치 감금하고 교수들도 잡아 가두고는 며칠씩 안 놔 주곤 했으며, 파업하는 근로자들도 툭하면 사장, 전무 등 잡아 가두기 일쑤였습니다. 허긴 국회의원들부터 걸핏하면 국회의장을 감금하고 방에서 못나가게 하고 의사당에서 사회도 못 보게 하곤 하니 누군들 안 하겠습니까? 최근에는 재벌총수가 자기 아들이 어디서 얻어맞았다고 사람들을 납치해다 직접 폭행까지 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그의 십계명을 아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유민주국가의 정상적인 시민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납치가 왜 나쁩니까? 첫째로 납치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납치는 가족들로부터 부모나 형제자매나 자녀를 강탈함으로써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고 가정을 송두리째 파탄 내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개구리 잡으러 나갔던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없어진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소위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입니다. 그 부모들의 삶, 그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납치는 살인보다 더 악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 가족에게 일생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며 가슴에 피멍과 원한이 맺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죽었다 하면 그것으로 빨리 단념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납치되어 가지고 돌아오지 않으면 일생을 그 가족들은 피멍을 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납치당한 부모가 어찌 편한 마음으로 직장을 다니겠습니까? 직장 관두고 집도 팔고 있는 것 다 팔아 가지고 아이 찾는 데 일생을 바치느라 가정이 다 파탄 나고 맙니다.

   “~ ~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형식으로 주어진 모든 계명들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제8계명을 납치금지법으로 이해한다면 그 계명의 보다 적극적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하여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했습니다. 자유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자유는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 없는 삶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그 자유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참 인간이기 위하여 생명과도 같은 것이 자유이기에 그 자유를 박탈하는 납치는 바로 인간을 죽이는 행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납치행위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납치는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자유를 짓밟는 폭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자유로움을 방해하거나 제약하는 모든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 같아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침해하거나 제약하는 행위는 제8계명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남의 자유에 대한 존중심이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심해지면 납치까지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으며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직폭력패들만 폭력배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칫하면 폭력배가 될 수 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다리 꼬고 앉거나 다리 벌리고 두 사람 앉을 자리 혼자 차지하고 있는 것, 차안에서 또는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것,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는 것, 주차 아무렇게나 해서 다른 사람의 주차를 방해하는 것 등 아주 간단한 행동들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폭력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차봉사단의 안내를 따르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주차하는 행위도 스스로를 폭력배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의 자유를 생각하기 이전에 남의 자유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자유를 박탈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제8계명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훈련을 하고 습관화해야 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는 달리 말하면 사랑입니다. 말에 있어서나 행동에 있어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며 사랑을 논하는 것은 공허한 일입니다. 듣기 싫은 꽹과리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으로 남을 배려하는 노력,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정의가 서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사랑으로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힘씁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행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길이고 해야 할 일들만을 열심히 행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길입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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