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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2:27-50)

by 【고동엽】 2022. 9. 21.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2:27-50)

당신 말을 믿으라고?
국회의원이 타고 가던 승용차가 빗길에 미끄러져서 그만 절벽 아래 논두렁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하던 농부가 논을 살피러 나왔다가 그 현장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농부는 땅을 파고 국회의원을 정성껏 묻어주었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파출소장이 지나가다가 부서진 승용차를 보았습니다. 차적 조회를 해보니까 그 지역 국회의원의 승용차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그 농부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아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파출소장에게 사고가 난 경위와 자기가 그 차에 있던 국회의원을 고이 묻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깜짝 놀란 파출소장은 그렇다면 그 국회의원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하는 말이, “뭐 살아있다고 소리치긴 했지만 워낙 그 사람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말은 인격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했을 때, 사실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믿는다기 보다는 그 사람의 전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오늘 아침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 다음 주에는 월드컵경기장에서 예배드립니다”라고 광고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다음 주에 월드컵경기장에 가실 분 계십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다음 주에는 교육관에서 예배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아마 여러분 중에 거의 모두가 교육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리와 인격이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복음을 증거한 초대교회의 성도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유대인들이 대거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고, 사람들은 이를 칭찬하였으며 구원받는 사람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야만인이라고 비난했지만, 자신들의 생명을 집어삼키는 사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믿음을 보며 그들이 전한 예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증언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과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말의 진실성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이 이토록 진하게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실과 사랑이 십자가의 희생과 연결되었을 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로, 보석보다 더 찬란한 빛을 우리 영혼에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그러나 이렇게 진심으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27절에도 보면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신 예수님의 마음은 민망하셨답니다. 여기에서 ‘민망하다’는 말은 ‘마음이 매우 흔들리며 어지럽고 괴롭다’는 뜻입니다. 이제까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오셨지만, 이제 막상... 정말 그 고통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계신 지금은 마음이 너무 힘들고 괴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래서 사람은 아는 대로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일 염려 그만하고 오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알지만, 내일의 염려가 떠나지 않고, 입에서 도저히 감사가 안 나오고 탄식이 나오는 게 사람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알지만 오늘의 고통 속에서 기뻐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알지만 도저히 목구멍으로 기도가 안 나오는 상황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때로는 믿는 대로 행하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연약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합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보십시오. 막상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너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지, 제발 이 십자가 좀 안 지게 해주세요. 십자가가 너무 무섭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하는 기도와 똑같은 기도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찾아가시며 십자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셨던 주님도, 그 십자가가 너무도 무섭고 두렵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해갔으면 하실 정도로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느끼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이 시련을 이겨내십니까? 27b.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썩는 밀알이 되실 것을 결단하신 것이 “그러나”라는 이 한 마디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만을 구하며 십자가를 지심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고자 하신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째,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심으로 시련을 이겨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기 때문에,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다는 사명을 다시 붙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겟세마네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는 기도와 똑같은 것입니다. 둘째, 나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으로 시련을 이겨내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영광” 이것이 우리가 사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결단에 하나님은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도 빠짐없이 응답해 주심으로 이미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만인의 구주로 삼으심을 통해 다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빌2).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힘들어 하셨다면, 오늘 우리들이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가슴 아파하고 넘어지고 좌절하고 낙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포기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다시 사명을 붙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어려움을 당하실 때마다 끊임없이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셋째,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자기만족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빛을 믿으라
이러한 예수님의 결단은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었습니다. 30-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세상 임금이란 사단을 말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승리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겨우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에 불과했습니다(창 3:15).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셨습니다. 이제 사단은 쫓겨날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후 사단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점진적으로 쫓겨날 것이고 마지막에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들린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영원히 다스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에서 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에 기초한 잘못된 메시야관이 눈앞의 메시야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 말씀을 주시며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절박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생명의 빛으로 나오기를 초청하셨습니다. 35-36절.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빛을 믿어야 어두움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까닭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저희를 떠나서 숨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의 근거로 많은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불신앙을 보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믿고 안 믿고는 표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완악해서 배척한 것입니다. 마치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표적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바로왕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의 불신에 대해 ‘눈이 멀고 마음이 완악해 져서, 끝내 죄악의 길을 떠나지 않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사 6:10).
둘째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유는 관원 중에도 믿는 자가 많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출회를 당할까봐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42). 그런데 요한은 여기에서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43절.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게 예수님과 그들의 차이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지만,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여 십자가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
이제 44절부터 50절까지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공생애의 사역을 마치시면서 무리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워하시며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주셨던 말씀이 마치 핵심정리를 하듯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 보내신 이, 보내심을 받은 자, 빛, 어두움, 심판, 구원, 영생”에 대한 말씀이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부터는 마지막날 밤에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다락방 강화, 유언의 말씀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제 대중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메시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44-45.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둘째,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를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셋째,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47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넷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저버리고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48-50.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불신의 모든 인간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6:63절에서는 “내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결  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였습니다. 친히 썩는 밀알이 되심으로 많은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시는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이미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섬겨야합니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조그마한 희생도 싫어합니다. 조그마한 십자가를 져보지 않은 사람이 큰 십자가를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시간과 의지를 드려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난달부터 기초양육 성경공부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말씀을 모르면 내 맘대로 신앙생활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의 사람들이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앞으로는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만이 교회의 중직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둘째, 기도의 십자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볼 때 교회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요 기도의 역사였습니다. 앞으로 우리 영암교회도 분명히 말씀의 역사와 기도의 역사를 통해 세워져야 합니다. 말씀의 십자가,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썩는 밀알의 삶을 결단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김성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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