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만이라도 좋은 편을 택하라 (눅 10:38~42 (이사야 55:1~5 참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한 여인의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마르다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일행을 대접할 음식을 부엌에서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만 했습니다.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언니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그런 동생이 얄미웠을 것이며 또 화가 났을 것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그런 동생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더 야속하게 생각되었을찌도 모릅니다. 보다 못한 그녀가 결국 예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하)
예나 지금이나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손님을 대접함에 있어서 음식을 잘 차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것 자체가 손님 초대의 주된 목적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볼 때 마르다는 모든 상황을 자기 중심으로 끌고 가려고 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내가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나를 도와야 마땅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자기의 일을 조금이라도 방해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모두 싸잡아서 비난했습니다. "나는 혼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어째서 마리아와 놀고만 계십니까?" 자기 동생뿐 아니라 그 날의 주빈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까지 그녀는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타이르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그리고 이어지는 누가복음 11장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일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음식 대접하는 일이 소중한가 아니면 말씀 듣는 것이 더 소중한가 하는 식으로 논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매우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니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진짜 소중한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대접을 받기 위해서 두루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니는 것입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그 어떤 것보다 "오늘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을찌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면 그런 융숭한 대접도 다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교인들을 심방할 때마다 항상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사와 심방대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교인들 집을 방문하는 것입니까? 교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피기 위해서 심방을 하는 것입니다. 또 대화를 통해서 교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직접 파악하고 교인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심방의 주된 목적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결코 주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접하는 것이 부담이 되기 때문에 목사의 심방을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간 심방하는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11장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오늘 우리가 주기도라고 부르는 바로 그 기도입니다. 이 주기도는 비록 짧은 기도지만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아주 중요한 기도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기도 중심은 하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주기도에서 하늘 아버지가 빠질 것 같으면 그 기도는 다만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해서 유창하게 기도를 한다고 할찌라도 하늘 아버지가 빠지면 그 기도는 씨알이 빠진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고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구하는 것도 한결같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중요한 것들 모두가 하늘 아버지가 우리의 기도의 중심에 계실 때 비로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하늘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기도의 중심이 되어서 "기필코 내가 해내겠습니다!"라고 하는 자기의 의지를 선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여기서 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행위입니다. 또한 기도란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믿고 고백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흐트러져서는 아니 됩니다. 생각을 집중하지 못하면 결코 기도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마치 마르다가 자기 생각에 집착해서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정작 중요한 것은 놓쳤던 것처럼 우리의 생각이 흐트러지면 우리는 기도의 중심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초대의 말씀입니다. 복된 생명의 나라로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풍요로움에 넋을 잃고 있는 백성들, 그리고 그와 같은 풍요로운 제국의 모습을 모델로 삼고 미래의 강국을 꿈꾸고 있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라마다 자기들이 이루고자 하는 나라의 모델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선진 복지 국가들을 모델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그 대표적인 경우가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의약 분업과 국민 연금 제도의 실시가 아닙니까? 잘 되어야 할 것인데.....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바벨론 제국의 찬란한 모습에 푹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고 성취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선진국병에 걸려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진국병이란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자존심을 팽개친 상태에서 아무리 선진 문물의 혜택을 누린다고 해도 결국 타는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바벨론 제국은 죄악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나라를 꿈꿔서는 아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꿔야 할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요 자유와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말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5절 말씀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 중심에 있는 나라입니다. 주기도의 내용과 잘 통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바로 이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3절, 4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사귐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기쁨,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사귀는 기쁨, 그리고 이웃과 함께 참 사랑을 나누는 기쁨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코이노니아 즉 사귐의 구체적인 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친히 몸을 내어 주심으로써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 화목하게 하는 사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성육신 사건은 사귐을 위한 나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사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귐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만일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온통 세상의 친구들을 사귀는 일에만 다 써버린다면 그것은 마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두루 다니는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대접받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을 짓는 것도 좋습니다! 멋진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더불어 사귀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자비한 음성을 듣고 지금 곧 결단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온전히 그 주님의 뜻을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 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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