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된 자들아 남편에게 순복하라 (벧전 3:1~7절)
우리가 결혼을 해서 남편과 아내가 되고 이제 몇 십 년을 살다 보면 서로에게 무디어지고 또한 여러 가지 문제들로 부부싸움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툰다는 것은 아직도 서로를 잘 모르고 있거나 또 하나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었거나 대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개개인 사정과 형편은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약한 부분들을 잘 챙겨주지 못해서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부부가 어떤 부분들이 약한가, 이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이러한 부분들만 채워주어도 아마 상당히 부부싸움이 줄어들 것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첫째로 남성들을 채워주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가장 먼저는 배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아주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그래서 키스는 순간이지만 요리는 영원하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무식한 말 같지만 이것은 진리입니다. 남자들은 배만 채워주면 별로 짜증내지 않고 웬만한 것은 다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칭찬입니다. 아무리 고약한 나쁜 버릇이 있다 해도 칭찬을 해주면 거의 다 고칠 수가 있습니다. 아내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칭찬으로 고치지 못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칭찬해주는 사람에게 목숨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것이 남자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이러한 부분들을 잘 모르고 그저 불평만 하고 구박하면 그 남편의 내 남편이 아니라 진짜 남의편이 되버리고 맙니다. 그때는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알아야할 아내의 가장 약한 부분은 여성들이 평생 동안 두 가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호르몬과 싸우고 두 번째는 우울증과 싸운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의 일생을 보면 처녀 때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때와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어서 폐경 때와 모든 호르몬 활동이 다릅니다. 그래서 폐경이 지나고 나면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서도 알 없는 병들이 생겨납니다.
가슴이 쥐어짜듯이 아프다든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견딜 수 가 없다든지 하여간 검사를 해도 병명을 알 수 없는 이상 징후가 많이 나타나면 산부인과에 가서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언제 그랬나하듯이 깨끗해지는 경우가 많답니다. 이렇게 호르몬 때문에 싸우고 두 번째는 여러 가지 변화에 대한 우울증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생리 때부터 시작해서 결혼할 때에도 그렇고 아이를 낳을 때도 그렇고 아무튼 몸에 변화내지 생활의 변화까지 그때마다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이 여성들입니다. 아마 여성들의 구조가 아주 섬세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러한 우울증이 하나의 증상으로 끝나면 좋겠는데 심하면 자살해버리는 것이 아주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 들을 남편이 잘 알아서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도 있는데 대개 남자들이 속이 없어서 하면 우울증하면 참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무심하게 넘겨버리는 것이 더 큰 문제인것이지요. 비단 부부 사이에 이러한 문제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성격적인 것 또는 성적인 것, 서로의 가치관 등등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우선은 이러한 원초적인 것들만 잘 알고 이해를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별 어려움 없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고 또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갈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을 둔 아내가 어떻게 행해야 하고, 안 믿는 아내를 둔 남편이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1~4절을 보면“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첫째는 아내 된 자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왜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말이냐? 도를 순종치 아니하는 남편일지라도 다시 말해서 믿음이 없는 남편 일지라도 그 아내가 남편을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믿음을 가져서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내의 이러한 행위를 남편이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믿는다는데 남편알기를 무슨 껍질로 알고 행동이 불성실하고 집안일이나 모든 것들이 단정하지 못하면 그 남편은 교회 나가는 것도 방해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순종하는 아내의 행위를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라고 말씀하고 있고 계속해서 3절과 4절에서는 아내의 단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은 행위와 그 단장으로 하는 것인데 그 단장은 외모의 아름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좋은 옷을 입고 얼굴에 예쁘게 화장을 해서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아름다움으로, 자기 마음속에 아름다운 마음으로 하라.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고 외모와 외적인 모습에는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오로지 신앙에만 열심을 가지면 된다는 말이냐? 그런 말이 아니라 아내로 남편을 순복하라는 것은 그의 구원을 위한 봉사를 감당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서 봉사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에서 먼저 아내를 구원하신 것은, 이제 그 아내의 순종과 복종하는 봉사를 통해서 남편을 구원하기 위한 제사장적 직무를 주셨는데 그러한 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어서 하라는 말씀이고 또한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순종했을지라도 믿지 않는 남편은 그러한 아내를 칭찬하고 격려해서 우리 아내는 참으로 좋은 아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아내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심할 경우에는 매질도 하고 그렇게 고난을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아내는 남편에게 어떻게 하느냐 그런 말입니다. 그럴 때 남편에게 말로서 당신이 예수를 안 믿으면 당신이 어떻게 되겠냐? 당신이 신앙을 가지지 않으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말로서 열심히 남편을 설득하고 또 권면해봐야 그것이 무슨 전도가 되겠냐 그 말입니다.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맞서고 남편의 행동에 대해서 반박하고 하는 그런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러할지라도 더 남편에게 순복하라 그런 말입니다. 왜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정결한 신부로 신령한 젖을 먹는 하늘의 시민으로 사는 하늘 백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당하신 고난과 멸시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나타날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고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진력하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말로서 남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그러나 때와 시기를 바서 행할 것이고 그 근본은 항상 주를 순복하듯이, 주님이 하신 것을 본받는 자세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에게만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모든 관계에서 마땅히 이와 같은 자세로 항상 복음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힘씀으로 우리들이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3:1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항상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을 예비하고 때를 따라서 우리가 항상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내들이 단장하는 것도 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도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말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었으니 자녀로서 행할 행실에 대한 문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단장해야 하느냐?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를 단장하는데 진력하지 말고 속사람, 곧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누리는 하늘의 평강과 안정과 온유로서 속사람을 단장해서 이 속사람이 나타나도록 그렇게 하라.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 보면 외모를 치장하는데 당연히 우리들이 이렇게 우리들의 왕 앞에 나와서 예배를 할 때에는 예의를 갖추고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 결혼식이나 잔치 집을 가도 당연히 예복을 입고 가야 하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이 예배의 자리에 외모를 단장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외모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을 단정히 해서 신령한 예수그리스도께 속한 속사람, 새로운 피조물로 속사람을 단장해서 믿는 사람의 선한 증거가 나타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숨은 사람을 단장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값진 것입니다. 불신 남편에게 속한 아내로 살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속사람을 단장함으로 남편을 순복하고 그 정결한 행위를 나타내면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이어서, 이를 통해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그 날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이를 통해서 그 구원의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사라의 예를 들어서 5~6절에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사라를 예로 드는 것은 순복의 문제의 핵심, 정수를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는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최고로 믿음이 좋은 여성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주인과 같이, 주와 같이 순복하고 복종함으로 이스라엘을 생산해낸 믿음의 어머니가 사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어머니인 사라가 행한 순복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불신자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핵심적인 문제는 순복입니다. 사라는 이 순복하는 일에 신실히 동행하고 자기를 단장한 사람입니다.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두려운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위로를 얻고 평강을 누리며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을 가지고 선을 행함으로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7절은 남편 된 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불신 아내를 둔 남편에게 하는 권면의 핵심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해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이 지식은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며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로 알라는 지식입니다.
가정의 머리로 남편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남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남편의 사랑과 수고를 통해서 이제 아내도 같은 신앙을 가지고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아내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만일에 자기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을 받을 자로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긍휼함으로 아내를 대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를 믿고 보니까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아내랑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냐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 가정에 무슨 소망이 있고 마음이 참으로 괴롭고 답답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보지만 그렇게 힘들고 어렵다고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정의 머리로 세우신 그 직무를 알고 먼저 부르신 그 은혜를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렇게 아내를 귀히 여기고 사랑해서 아내가 함께 생명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사랑의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이것이 생명이고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서 기쁨을 맛보고 만족함을 맛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잠시잠간의 기쁨이지 영원한 기쁨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질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행하던 그러한 행실들이 기억나고 또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과 함께 섞여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근본도 아니고 또한 우리에게 속한 기업도 아니고 그러한 세상의 썩어질 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이전의 모든 소욕과 가치를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아니하는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쌓아둔 산 소망이고, 이 소망은 우리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는 것이어서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이렇게 하늘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졌기에 불신 남편을 둔 아내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정결한 행위와 속사람을 단장함으로 남편에게 순복해야 되고, 불신 아내를 둔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희생과 용서를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함께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이을 자로 알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이러한 상황도 아니고, 또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당연히 결혼을 앞둔 청년들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서 함께 부부가 됨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령한 연합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질서에서, 이 세상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지 아니하는 우리의 가족 곧 부모와 형제자매와 친지들이 우리들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잠잠하고 어떡하든지 평안함을 도모하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해서 그렇게 행할 것 같으면 그것은 주님의 뒤를 따르는 바른 삶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들에게 참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의 악을 징계하고 그들로 그 입을 열지 못하도록 힘으로 제압하고 그들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와 지식을 가짐으로 그들로 존경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 생명의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베푸신 예수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우리가 순복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주님께서 우리들을 하늘의 영광으로 입히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드리시고 우리 죄를 속량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가족과 형제들과 이웃들이 예수 믿는다고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할지라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주님주신 그 사랑으로 더욱 더 사랑해서 그들을 섬기고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행실로 예수 믿는 증거를 보여서 이 땅에 모든 족속들이 그리스도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을 얻도록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의지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 순종과 사랑의 길을 걸으시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김성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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