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없이 살 수 있습니다. (눅12:22-30)
어느 시골 교회에 권사님이 있었는데 이 권사님은 밤낮으로 걱정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해에 풍년이 들어 권사님의 밭에서는 여러 농산물이 많이 수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이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걱정이 없겠지’하여 그 권사님을 길에서 만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밭농사가 잘 되었다니, 이제 한 숨 놓으셨겠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인상을 잔뜩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해 농사는 잘 되었습니다만 ..... 작년에는 농사가 잘 안되어 썩은 것으로 돼지를 먹였는데 올해는 그런 것이 없으니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면 병입니다. 염려 병 그런데 우리 모두는 이 염려 병에 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심장병은 거의 염려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1994년 LA인근에서 아주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는데 부상자들을 옮긴 병원에서 환자들 가운데서 아주 특기할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외상이라곤 전혀 없는 생존자들이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사망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 사망자들은 대부분 관상동맥 질환을 앓거나 고혈압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사망원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 염려와 걱정’ 이었다고 합니다.
염려와 심장질환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증명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지진으로 인해 외상을 입고 죽은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공포와 충격으로 인해 사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염려와 걱정 그리고 두려움’ 같은 마음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염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파괴력이 있습니다.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염려를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찢다, 둘로 나뉘다, 분열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염려가 심해지면 모든 것을 다 찢어 놓습니다. 건강이 찢어집니다. 가정이 찢어집니다. 염려가 이렇게 나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근심과 염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마음이 상하고 뼈가 마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약이나 주사로도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명이 단축이 됩니다. 염려와 근심이 가져다 주는 폐해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염려없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1. 염려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어니 J 젤린스키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 이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고 22%는 사소한 사건들이며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들이다. 겨우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문제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의 96%가 불필요한 것들이랍니다.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란 말씀입니다. 괜한 염려로 밤을 새우고 마음을 찢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이 저자가 하는 말이 고민은 10분만 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렇게 염려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주님은 본문 22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말라’ (25절) 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염려로 충만해서 살아가는 이유가 결국 목숨 때문에 육신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생명은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염려 가운데 대부분이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큰 문제 아닙니까? 우리의 근심 염려도 대부분 돈 문제일 것입니다.
지난 22일 대구에 사는 40대 주부가 자녀의 대학등록금 문제 등을 고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주변 사람에 의하면 이 주부는 딸과 아들이 대학에 다니면서 한 학기 등록금만으로 700만~800만원이 들어갔는데 이 때문에 2천500여만원의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이 빚으로 인한 경제적인 고통이 가중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경제적인 이유로 염려하고 고민하다가 죽어가는지 모릅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4절에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까마귀가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방은 철새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하늘에 날아 다니는 새를 바라보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날아다니는 그 많은 이름모를 새들 조차도 하나님께서 다 먹이시는데 왜 걱정을 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까마귀라고 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까마귀입니까? 레위기에 보면 까마귀는 부정한 새입니다. 제단에 제물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정한 새 까마귀도 내치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재수 없다고 돌을 던지고 쫓아내는 까마귀조차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거두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뭡니까? 먹고 사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디 까마귀뿐입니까? 이렇게 까마귀를 예로 드신 주님께서는 마10장 에서는 참새를 예로 드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눅12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병행 구절인 마 10:29절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참새 두 마리 값은 한 앗사리온이었습니다. 앗사리온은 동전으로써 우리나라로 치면 약 10원이나 100원 미만의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이 참새는 가장 흔하게 잡히는 새였습니다.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100원에 참새 두 마리를 주는데, 200원을 주면 4마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5마리를 준다는 것입니다. 한 마리는 덤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새 다섯 마리가 200원에 팔린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 하나도 잊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잊지 않으시는 참새란 어떤 참새입니까? 덤으로 따라온 참새입니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네가 200원 주고 산 참새 가운데 덤으로 따라온 참새가 어떤 것인지를 아시는데 하물며 그 참새를 들고 있는 너를 왜 모르겠느냐? 하나님께서 왜 너를 아들로 귀하게 여기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래도 우리가 염려해야 합니까?
2. 염려한다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 말씀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이어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의 머리털 까지도 낱낱이 다 알고 있으니 제발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은 참새들보다 정말로 더 귀한 내 자녀들이 아니냐? 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우리 머리카락이 몇 개 정도인지 아십니까? 10만개 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 수명도 있습니다. 남자 머리카락은 4-5년, 여자는 6-7년 정도 라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50-100개 정도는 빠지고 그 정도 숫자가 새로 납니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복잡한데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의 머리카락의 숫자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화무쌍한 너의 머리카락의 개수도 다 알고, 계시는데 너의 지금 형편과 사정을 내가 모르겠느냐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그래도 염려를 내려놓지를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다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덧붙여 또 말씀하십니다. 25-26절입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키’라는 말은 우리의 외형적인 신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또는 생애’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건강을 염려한다고 해서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여집사님이 대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소에 건강관리를 너무나 잘 했습니다. 꼬박 꼬박 종합병원에서 건강 검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기관은 다 받았는데 하필이면 대장은 검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대장검사를 받기도 뭣하고 거기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다른 곳 보다 건강하다고 빼 먹은 대장에 암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곳만 빼놓고 다른 데 열심히 받고는 아무 이상도 없다고 건강하다고 좋아했으니.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염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염려를 내려놓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또 다시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27-28절입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제는 아예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책망조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래도 계속 나는 안 됩니다. 인상 찌푸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이래도 염려할래’ 하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솔로몬이 등장합니다. 이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영화를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에서 시작해서 숱한 고생을 겪은 후에 왕이 되었지만 솔로몬은 왕자로 태어나서, 고생도 안 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최고의 지혜자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만한 인물입니다. 솔로몬은 매 끼니마다 산해진미가 가득했습니다. 왕상 4:22이하에 보면 솔로몬의 ‘일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석이요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 사슴가 살찐 새들이었더라‘ 고 했습니다. 그의 사치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또 왕상 10:21에 보면 그가 마시는 잔과 먹는 그릇은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뿐만 입니까? 그는 다방면에 능통하여 ’잠언 3천을 말하였고 또 지은 노래가 1천 다섯이며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고 했습니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얼마나 유명했던지 당시 모든 민족과 천하 왕들이 그의 지혜를 들어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솔로몬의 “그 모든 영광이 이 꽃 하나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솔로몬이 이런 재능과 부요와 자산을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위해 서 수 많은 정략 결혼을 했습니다. 후궁이 700명이었고, 첩이 300명이었습니다.
1000명의 여인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이 여인들이 모두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골치가 아팠겠습니까? 이 여인들로 인해서 솔로몬의 신앙도 병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더 잘 먹고,더 잘 살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영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는 주님의 말씀은 그 화려한 솔로몬의 삶 역시도 언제나 염려하는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그의 인생 말년에 이런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그는 목동 출신답게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 목자는 누구입니까? 양을 알되 너무도 잘 알고 양을 지키고 보호하는 자입니다.
이 양의 습성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양은 산길을 가다가 맛있는 풀을 발견하면 1미터 절벽 아래로 폴짝 뛰어내립니다. 내려가서는 신나게 풀을 뜯어먹습니다. 그런데 다 먹고나니 절벽입니다. 위로 올라가려고하니 도저히 제 힘으로는 못 올라갑니다. 아래는 무서운 낭떠러지고 해는 어두워지고 야단이 났습니다. 이럴 때 목자가나타납니다. 올가미를 만들어 양의 목에 걸어 끌어 올리려 합니다. 그러면 양이 발버둥을 칩니다.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줄 알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양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목자는 양이 지쳐서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립니다. 잠잠히 인내를 가지고 지켜봅니다. 완전히 기운이 빠져 힘이 없을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목자는 줄을 내려 양을 감아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부족함이 없는 삶 이었니다. 염려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풍성한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다윗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염려하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까마귀를 먹이시고, 덤으로 따라온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책임지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도 들풀보다도 훨씬 더 귀하니라”
여러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있으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있으시면 이렇게 까지 말씀해 주셨겠습니까?
더 이상 염려하지 맙시다. 염려할 시간에 기도합시다. 열 사람의 염려하는 사람보다 한 사람의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30절 ‘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염려 없는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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