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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들 (시편 14:1-3)

by 【고동엽】 2022. 9. 17.

어리석은 사람들   (시편 14:1-3)

빛과소금의교회/최삼경목사

몇 년 전 가을 대심방 때 어느 집사님 가정을 심방하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친정 아버님이 큰 수술을 받으셨답니다. 보통 닷새가 지나면 가스가 나오는데 열흘이 지나도 가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겠습니까? 수술 후에 가스가 나오지 않으면 죽으니까 두렵기도 했을 겁니다. 열 하루째 되는 날 언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시고 가셨습니다. 바로 그 뒤에 가스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친정 아버님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지금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하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우리 하나님은 가스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참 묘하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아주 큰 사건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오늘은 시편 14편 1절을 중심으로 우리가 무심코 넘기기 쉬운 것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해보고 싶습니다. 자연 속에 담긴 하나님의 솜씨, 우리 몸 속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을 유신론자라 하고 부정하는 사람을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할까요? 무신론이 유신론보다 과학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이른바 '근대정신'의 영향입니다. 근대정신의 특징은 감각적으로 실증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에 의해서 관찰되고 파악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심지어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되묻습니다. 이것이 근대정신의 영향을 받은 현대인의 질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일까?'

인간의 시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는 것 같으나 다 보지는 못합니다. 너무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너무 가까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하늘에 많은 별들이 있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일부에 불과합니다. 천체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우주에는 지구 같은 은하계 1,000억 개가 있답니다. 우리 눈으로 다 볼 수 없습니다. 가장 성능이 좋다는 천체 허블망원경을 사용한다면 좀 더 많이 볼 수는 있겠지만 최첨단 망원경으로도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은 적당한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큰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우주를 보지 못합니다. 지구도 내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지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방 안에 있는 한 내 집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 우리는 아주 작은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물체의 최소 단위를 입자 또는 파동이라고 합니다. 입자나 파동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크게 확대해도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 눈으로 아주 작은 것까지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손에 묻은 수 만 마리의 박테리아 때문에 도저히 음식을 먹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시력을 적당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우주처럼 아주 큰 것도 볼 수 없고 입자나 파동처럼 아주 작은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도 존재하고 입자와 파동도 존재합니다. 내가 내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주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내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또 이런 질문도 던질만 합니다.
'내 귀에 들리지 않으면 소리는 없는 것일까?'

우리의 시력이 한계가 있듯이 청각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높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주 낮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소리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단위가 Hz(헤르츠)입니다. 인간은 16Hz∼20,000Hz 사이에 있는 소리만 듣습니다. 그래서 개도 듣는 소리를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돕니다. 지구의 지름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지구 표면은 회전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그래서 지구가 회전하면서 소리를 냅니다. 이 소리가 얼마나 높은지 아십니까? 20,000Hz가 훨씬 넘습니다. 그래서 우리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만약 지구가 회전하는 소리를 들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끄러워서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고막이 터져서 귀머거리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개가 듣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파트 벽 두께를 1m 정도 해도 옆집 거실에서 주고받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서 프라이버시는 사라질 겁니다. 피곤해서 침대에 누웠는데 천장에 붙어서 기어다니는 파리 발자국 소리까지 들린다면 우리 모두 불면증 환자가 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청력의 한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높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감사한 일이요 너무 낮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러니 생각할수록 모든 것이 감사하고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보이는 것만 인정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들리는 것만 인정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잘 아시는 얘깁니다만 옛 소련의 우주 비행사가 우주 비행을 마치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 가서 보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더라"
하나님의 존재가 이 우주 안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주가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작년 가을부터 금년 초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여러 화가들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밀레, 마네, 모네, 고호, 고갱 같은 화가들의 진품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제 일생에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여러 작품들이 발길을 옮기지 못하게 했지만 특별히 고흐의 작품 앞에서 한참 서 있어야 했습니다.

화가와 그림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듯이 화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이 있다는 것은 화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천지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림은 화가가 그린 것이 분명하지만 그림 속에서 화가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화가는 그림의 일부가 아니라 그림과 구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에서 화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화가가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바로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주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미련한 생각입니까?
고흐의 그림 속에서 고흐를 발견할 수는 없지만 고흐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었습니다. 불덩어리같이 이글거리는 태양과 황금빛 찬란한 보리밭이 그려진 고흐의 작품 속에서 그림을 잘 모르기는 했지만 고흐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다혈질적인 성격만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림 감상을 제대로 하자면 무엇보다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화가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은 미술을 알아야 합니다. 이 우주도 그렇습니다. 우주를 찬찬히 감상해 보면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화가의 사상과 성향을 발견하듯 우주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수록, 자연을 많이 알수록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신라 천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경주를 단체로 다녀왔습니다. 우리 모두 떠날 때 기대가 아주 컸습니다. 그림으로만 보던 불국사를 비롯해서 천마총과 첨성대 같은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고 실망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도대체 이런 것 가지고 우리 조상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국보라고 했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참 지났습니다. 결혼하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가족들과 함께 다시 경주를 찾았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이른바 문화유적지 답사를 한 것입니다. 물론 불국사와 천마총과 첨성대도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실망만 하고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휴가를 떠나기 전에 경주에 대해서 몇 권의 책을 사서 읽고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정리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에 따라 주장이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제가 읽었던 책에는 첨성대를 대략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첨성대는 361개의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음력으로 따진 1년의 날 수입니다. 원주형 돌받침이 27개단과 맨 위층 우물 정(井)자가 있는 단을 합하면 28단입니다. 이는 당시 기본별자리 28개를 상징합니다. 게다가 맨 위층의 우물 정(井)자는 신라 자오선의 표준인 동시에,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 중간 허리에 네모난 창이 있어서 창 아래에 12단이 있고, 창 위에 12단이 있습니다. 이는 1년 12달을 상징하고 24절기를 상징합니다. 아울러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춘분과 추분 때는 태양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들어오지만 하지와 동지 때는 그 반대입니다.

이렇게 보면 첨성대는 신라인들의 과학적 지식을 모두 쏟아놓은 상징물입니다. 그렇게 조그만 첨성대가 이렇게 많은 뜻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첨성대를 보았을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을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때 보았던 첨성대와 휴가 때 보았던 첨성대는 분명 똑 같은 첨성대였습니다.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지만, 결코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정말 실감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우주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붉게 물든 단풍잎을 보면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요즘처럼 아침 저녁으로 꽤 쌀쌀한 기온 차이에서 4계절을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합니다.

"세상에 신이 어디 었어!" "예수를 믿느니 차라리 내 죽먹을 믿지!" 하고 큰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속편하고 과학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속편하자면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평강의 왕이요 평화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과학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위대한 과학자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토머스 에디슨이 있습니다. '토머스'를 우리말로 옮기면 '도마'가 됩니다. 아이작 뉴튼, '아이작'을 우리말로 옮기면 '이삭'이 됩니다. 에디슨의 부모가 신앙인이었기에 아들 이름을 예수님의 제자 도마라고 지어주었습니다. 뉴톤의 부모가 이삭 같이 자라기를 바라면서 붙여준 이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건 도무지 원숭이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혹시 한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의 팔 길이는 하필이면 왜 이 정도일까? 더 길 수도 있고 더 짧을 수도 있을 텐데 ..... 저는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 몸에서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은 몸 안에 들어있습니다. 심장, 허파, 간, 뇌 등은 소중하기 때문에 몸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소중함에도 외부로 노출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식기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의 팔 길이를 가장 알맞게 만드셨습니다. 지금이야 옷을 입고 있지만 옛날에는 옷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위급할 때에 가장 가가운 곳에서 손으로 재빨리 보호하도록 그만하게 만드셨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대변을 보고 뒤를 닦아야 하잖습니까? 만약 팔이 짧다면 ..... 정말 곤란하겠지요? 하나님이 가장 알맞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앞으로 화장실 사용하실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생각해 봅시다. 팔을 만들어 주실려면 아예 좀 더 길게 만들어주셨으면 더 편리할 텐데.... 하시는 분 안 계십니까? 그러면 장롱 위에 물건을 올려놓을 때에 의자도 필요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정답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더 길게 만들지 않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했더니 자세한 설명까지 해 주셨습니다. 팔이 지금보다 길면 사람들이 목욕할 때도 혼자서 자기 등까지 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아들의 등을 밀어주지 않고 아들이 아버지의 등을 밀어 드리는 흐뭇한 모습을 더 이상 보실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앞으로 혼자서 자기 등까지 미는 일은 절대 없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절묘하게 만드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달걀을 보면 아주 재미있게 생겼습니다. 탁구공처럼 완전히 둥글지도 않고 럭비공처럼 완전히 길쭉하지도 않습니다. 한쪽은 조금 굵으면서 둥글고 다른 한 쪽은 조금 작으면서 둥근 모양입니다. 여러분, 달걀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거기에 아주 큰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달걀이 탁구공같이 생겼거나 럭비공같이 생겼다면 닭에게는 심각한 일이 생깁니다. 암탉이 달걀을 낳았다고 합시다. 평평한 곳이라면 괜찮지만 경사진 곳이라면 달걀이 데굴데굴 굴러가서 '탁!' 하고 깨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병아리를 깔 수 없고 급기야 닭은 얼마 못 가서 멸종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달걀이 주사위 처럼 각지게 생기면 될 것 아니냐구요? 그렇게 되면 암탉이 알을 낳을 때 너무 고통스러워서 알을 낳기를 거부할 것이고 그것도 큰일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안해내신 것이 지금의 달걀 모양입니다. 한쪽은 조금 크고 다른 한 쪽은 조금 작기 때문에 웬만한 경사지에서는 굴러가도 끝까지 굴러가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한번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달걀을 만질 때마다 하나님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태양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가깝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뜨거워서 살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지금보다 조금 더 멀어진다면 추워서 얼어죽게 됩니다.
지구 지표면의 2/3가 바다요 1/3이 육지입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 보신 분은 없습니까? 가뜩이나 인구는 점점 많아지고 땅은 좁은데 무엇 때문에 바다가 저렇게 넓을 필요가 있을까? 바다를 자꾸 메꾸어서 육지를 더 넓히면 될 것 아니냐? 그러나 이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환절기에는 일교차가 큽니다. 감기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낮과 밤의 온도차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물입니다. 자연계에서 물은 온도 변화에 가장 늦게 반응하는 물질입니다. 낮 동안 햇볕이 내리 쪼여도 지표면의 온도가 바다 물 때문에 갑자기 올라가지 않습니다. 밤 동안 햇볕이 없어도 바닷물이 서서히 식기 때문에 지표면은 갑자가 추워지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 욕심대로 바다가 1/3을 차지하고 육지가 2/3를 차지한다면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너무 추워서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은 너무 큰 일교차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바다가 2/3를 차지하고 육지가 1/3을 차지하는 것이 얼마나 오묘한 하나님의 솜씨입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앞으로 좁은 땅이라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넓은 바다를 보실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여러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고 합니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들이면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것도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앞뒤가 맞는 말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믿음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솜씨요 모두가 하나님의 흔적들입니다. 믿음의 보청기를 끼고 보니 들리지 않는 것 속에서 분명히 들린단 말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어리석습니까? 배우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능 점수 예상보다 몇 십 점 못 받은 수험생이 아닙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귀에 안 들린다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쫓아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하나님을 분명히 보는 사람이 됩시다. 믿음의 보청기를 끼고 들리지 않는 것 속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행복한 성도가 됩시다.


김홍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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