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양의 그의 음성을 듣나니. (요 10 : 1~6)

by 【고동엽】 2022. 9. 15.

양의 그의 음성을 듣나니.  (요 10 : 1~6)


저는 히브리 대학의 객원교수로 초청을 받아 예루살렘의 감란 산에서 산 적이 있어서 그곳 지리를 잘 압니다. 본문에 나오는 배경을 보면 예루살렘 근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루살렘 에 가면 벳새다가 멀리 보입니다. 거기에 올라가서 보면 양문이란 문이 보이고, 그 안에는 실로암 연못이 있습니다. 바로 그 주변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제목처럼 목자 되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을 흔히 [선한 목자 장]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목자라, 오실 메시야를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목자라는 개념은 양이란 개념과 서로 짝이 되는 그런 개념입니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구절은 주일학교 아이들도 잘 아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뜻은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있는 한 자족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이사야 40:11절의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란 구절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하니는 일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또 같은 시대에 살았던 예레미야 31:10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지키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에스겔 34장에서는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면서 목자가 없으므로 양들이 흩어지며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한탄했습니다. 스가랴 1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두 개의 막대기로 그들을 먹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막대기란 하나는 은총의 막대기요 다른 하나는 연락(연합)의 막대기라고 했습니다.

시편 23편에서는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구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팡이란 [능력의 지팡이]를 말하고, 막대란 [사랑의 채찍]으로서의 막대기를 말합니다. 시편 100:3절에도 보면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신약에 보면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면서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자는 어진 왕을 뜻할 때에도 사용되었고, 능력 있는 지도자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 은유입니다. 이 개념을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말할 때에 목자로 주장했습니다.

지난달에 말씀드린 요한복음 9장의 배경이 되는 거지소경을 눈뜨게 한 사건에서 아주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을 때에 이들은 시기하고 질투한 것은 자기들만이 참 목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목자들은 양 떼들을 방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풀과 물을 찾아 몰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양들을 인도합니다. 이때에 문지기가 있다가 문을 열고, 양들을 들어가게 합니다. 문지기는 반드시 열쇠를 가지고 있다가 문을 열어줍니다.

이 열쇠는 다윗에게 주셨던 바로 그런 열쇠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런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목자는 입구에 앉아서 양떼들을 돌보면서 함께 자는 것입니다. 날이 새면 양들을 하나하나씩 확인하여 몰고 갑니다.이런 배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물론 목자는 주님 자신을 말하고, 양의 우리는 교회를 의미하고, 문지기는 성령을 의미하고, 양 떼들은 교인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배경 속에서 (1)참 목자는 누구인가? (2)목자가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3)양 떼들이 어떻게 배불리 먹고,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가?의 세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2.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교훈은?

(1) 우리의 참 목자는 누구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목사를 영어로 pastor라고 하는데 이것은 라틴어에서 온 말로서 본래는 목자라는 뜻입니다. 목자란 말은 방목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5가지 종류의 목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1절에 보면 절도 타입의 목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같은 구절에 강도 타입의 목자가 있습니다.
셋째는 12절에 보면 삯군 타입의 목자가 있습니다.
넷째는 5절에 보면 타인 타입의 목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섯째는 11절에 나오는 선한 목자 타입의 목자가 있습니다.
절도와 강도 타입의 목자들의 특징은 첫째로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는 양을 삼키는 자들이란 점이고, 셋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목양한다는 것입니다. 절도와 강도의 차이는 절도는 속여서 목양을 하고, 강도는 힘과 협박으로 목양을 한다는 차이점뿐 거의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삯군 타입의 목자의 특징은 첫째로 위험이 다가올 때에 피한다는 것, 둘째는 자신이 받는 임금만큼만 봉사하고 절대로 희생적인 면이 없다는 점입니다. 넷째 타입의 목자는 타인 타입입니다.
양 떼의 형편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고, 다만 이용함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선한 목자가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믿습니까?

(2)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줍니다.

(가)첫째는 양 떼들을 인도해주십니다.

4절에 “앞서 가면”. 뒤에 가면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가면서 인도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처럼 앞서 가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3절의 말씀처럼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신 주님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 떼들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가서 보면 양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모릅니다. 특히 양들은 식곤증이 아주 심합니다. 그래서 한 곳에 누워있으면 되새김질을 하면서 그냥 맹하니 졸고 있습니다.

해가 지면서 누웠던 곳에 그늘이 없지만 움직일 줄 모릅니다. 그래서 양들을 키우는 목자들은 반드시 영소를 함께 기릅니다. 양이 움직여야 할 때 안 움직이면 주인은 염소를 풀어놓습니다.
그러면 염소는 돌아다니면서 양들을 일으켜 세우고, 몰고 갑니다. 그래서 운동을 시킵니다. 소화가 잘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아마 양들은 왜 귀찮게 그래 좀 내버려 두지 하고 불평을 할 것이지만 목자의 관심은 좀 더 큰 데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어떤 때에는 이해되지 않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저도 왜 하나님께서 저를 미국으로 몰아세웠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도 초청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께 오, 주여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의 찬송과 기도가 나옵니다.

(나)둘째는 언제 어디서나 양 떼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밤이 되면 맹수들이 가끔 나타납니다. 특별히 이리 떼들이 제일 무섭습니다. 늑대들도 나옵니다. 다윗은 목자생활 속에서 자기의 양 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연습했던 것이 마침내 골리앗을 물리치는데 사용될 줄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군대에 있을 때에 양들을 몇 마리 키웠습니다. 연대 내에 몸이 약한 병사들이나 약한 병사들을 위해서 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양들은 다른 동물과 다릅니다. 자신을 보호할 줄 모릅니다.
어떤 동물은 뿔이 있고, 어떤 동물은 이빨이 사납습니다. 이런 것이 없는 동물은 보호색이 있거나 스컹크처럼 냄새를 통해서 다른 동물들을 멀리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만은 유독 자신을 보호할 지혜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래서 희생 제물로 드릴 때에도 조금도 반항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 운명이거니 하고, 죽습니다. 따라서 양들은 목자가 보호하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이리가운데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라”고 했습니다(마10:16). 이것이 바로 양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다)셋째는 잃은 양들을 찾아 해맵니다.

양들은 목자가 한눈을 팔면 금방 어디로 가버리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잃은 양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잃은 양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금년이 다 가기 전에 우리는 새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나씩 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한 사람씩 찾는 운동을 해야 하고, 다음에는 교회에 나오기는 했으나 어디로인가 증발되어서 언제 이리 떼들에게 물려갈지 모를 영혼들을 찾는 잃은 양 찾기도 겸하여 하여야 합니다.

(라)넷째는 양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합니다.

15절에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시간을 희생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때에는 양 떼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양들 곁에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어 죽으신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을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3)주님의 양들인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가)우리는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양은 힘도 없지만 어리석기 때문에 맹수와 대항할 무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양들의 특징은 목자를 찾지 않습니다. 그냥 아-앙 하며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나)목자만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목자는 경험이 많고, 양들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고 다니기 때문에 어떤 때 어떤 경우에도 목자만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목자가 함께 있는 한 안전합니다. 목자가 지정한 경내에만 있으면 안전하고 자유롭습니다. 언제나 풍성합니다. 그러나 목자를 떠나면 언제 웅덩이에 빠질지 모릅니다.

(다)[우리]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양우리가 나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양 우리는 산간벽지에 있는 것으로서 양을 몰아들이기 위해서 돌로 에워 쌓아 만든 우리입니다. 여기에는 문이 없습니다. 다만 목자가 문 앞에 앉아서 가로막고 있을뿐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양의 문이라고 했을 때에 바로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양 우리는 보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동네나 마을에서 볼 수 있습니다.거기에는 문이 달려 있습니다. 양들은 밤중에 문지기의 보호를 받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가 양 우리에 가서 양들을 하나씩 불러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양들을 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면 양 우리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유대교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유대교에서 불러내어 밖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원한 안식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양 우리는 교회입니다. 그 안에만 있으면 안전합니다. 자유롭습니다. 풍성합니다. 그러나 건물로서의 교회당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새 신자들은 반드시 교구에 들어가서 성도들과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언제 이리 떼들에게 물려 가는지도 모르게 살아집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꼭 교구활동과 부서의 활동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맺는 말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위로도 되고, 푸른 초장, 잔잔한 시내물가로 갈 수 있습니다. 절도나 강도의 소리를 듣고 유혹을 받으면 안 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어떤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갈 때가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다 특징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다 만족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에서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원하는 특징이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소위 교회란 이름은 있으나 이단에 속한 곳으로 갈 때에는 그 영혼의 장래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제 바라기는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복을 받고, 안전합니다. 풍성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신성종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