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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사야 65:1~9)

by 【고동엽】 2022. 9. 14.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사야 65:1~9)

이스라엘 나라가 어쩌다가 망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포로로 잡혀 갔습니까?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없을만큼 군사력이 형편없이 약했습니까?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북쪽 나라 이스라엘에 이어서 남쪽 나라 유다까지 왜 그렇게 철저히 망하게 되었습니까? 그 까닭은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사야 1장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부르짖어 간구하는 기도 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들이 포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귀환 후의 형편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그들이 바라던 것과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재건할 의욕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의 삶의 모습도 썩 좋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상황이 아무리 좋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바르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르게 살지 않았습니다. 너무 쉽게 악의 길로 행했습니다.

   사오정이 숙제가 하기 싫어서 수학 숙제를 안 해 갔습니다. 선생님이 "숙제 안 해 온 놈들 앞으로 나와!"라고 말씀하시자 모두 일곱 명이 나왔습니다. 사오정은 나오는 동안 어디에 서면 안 아플까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몸이 약하시니 첫째 애는 세게 때리시고 점점 더 약하게 때리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맨 뒤에 섰습니다. 그런데 막상 맨 앞의 애는 한 대, 두 번째 애는 두 대, 세 번째 애는 세대를 때리셨습니다. 사오정은 결국 일곱 대나 맞았습니다. 너무 억울했습니다. 오기가 난 사오정이 그 다음 날도 숙제를 안 해 갔습니다. "숙제 안 해 온 놈들 앞으로 나와!" 선생님이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다섯 명이 나왔습니다. 사오정은 나오면서 어제는 뒤에 섰다 손해를 봤으니 오늘은 맨 앞에 서야지 생각하고 잽싸게 맨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맨 앞에 있는 사오정만 때리시더니 "오늘은 내가 기운이 없어서 더 때릴 수 없으니 다른 애들은 다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오정은 또 손해를 봤습니다. 화가 난 사오정은 그 다음 날도 또 숙제를 안 해 갔습니다. 선생님이 "숙제 안 해 온 놈들 앞으로 나와!"라고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세 명이 나왔습니다. 사오정은 뒤에 서도 손해, 앞에 서도 손해니 오늘은 가운데 서야지 생각하고 가운데 섰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내가 기운이 없어서 때릴 수 없으니 앞의 놈과 가운데 놈이 박치기하고 뒤의 놈과 가운데 놈이 박치기 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오정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 아닙니까? 범죄한 결과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거기서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들을 더 이상 따르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또 다시 주위 환경이나 탓하며 너무 쉽게 악의 길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포로로 잡혀 가기 전 모습과 별로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제사가 자기의 뜻을 따라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한 의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리는 예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지극히 형식적인 의식에 불과한 예배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같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단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얻기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칭찬이 아니라 책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아니 무서운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은 바른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 바른 예배입니다. 예배는 결코 무엇을 얻기 위한 도구나 방편이 아닙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 바른 예배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민족마다 나름대로 고유의 민속 신앙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무속 신앙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신앙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런 것들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알게 모르게 무속 신앙적인 요소들이 침투하여 복음을 심하게 변질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아주 큰 잘못입니다.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올바른 관계를 바탕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을 좇아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가 다만 필요에 따라 드려지기 때문에 개업 축하 예배, 회갑 축하 예배 같이 예배라고 할 수 없는 예배가 거리낌없이 드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복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 자신이 복을 받고, 받은 바 그 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예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요구가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실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뜻을 따라 다만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은 심판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꾸중과 책망은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책망을 받는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우리가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종이 아니고 나의 뜻만을 고집하고 그 뜻을 관철하려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옳은 것입니다. 반면에 나의 뜻은 나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악한 것입니다. 나의 뜻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결국 심판을 받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드려지는 예배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그런 예배는 사람들이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히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으면 당연히 내 지혜, 내 판단, 내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 행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 참된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인의 뜻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종은 어떤 종입니까? 패역한 종이요 불의한 종입니다. 그런 종은 마침내 심판을 받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뜻이나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언제까지 머뭇거리겠습니까? 그 옛날 갈멜 산 위에서 백성들을 향해서 외치던 선지자 엘리야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에 살 것이라.”(사 65:9 하반절) 비록 상황은 나쁘고 또한 어려울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믿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은혜를 지금 여기서부터 풍성하게 맛보는 참으로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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