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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진노

by 【고동엽】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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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67쪽에 있는 글입니다.

 

 

4.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로마서 1장 18절

 

 

 

 

 본문 18절 말씀부터 로마서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하나님의 진노' 라는, 듣기에 별로 좋지 않은 말씀으로 시작이 되는 것을 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서두의 말씀이 왜 하필이면 하나님의 진노인가 하고 언짢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복음을 받으려면 그 전에 자기의 처지가 어떠한가를 먼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처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의 처음 말씀과 끝 말씀을 이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진노하고 계시고 그 진노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 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하면 항상 사랑의 하나님을 연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씀을 우리는 즐겨 고백하고 찬양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연히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즉 화를 내고 계시는 하나님 하면 본능적으로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을 처음부터 부정해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은 사랑의 하나님과 진노의 하나님은 서로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면 사랑이고, 진노면 진노지 어떻게 사랑하면서 진노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을 진노하는 자로 보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예 진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죄인을 심판하려고 준비한 지옥까지 부정해버립니다.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든 간에 진노, 지옥 같은 말은 사람을 경고하기 위한 엄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혹 지옥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며칠 동안 가두어서 정신차리게 한 다음 풀어 주는 곳이지, 영원히 벌 주는 곳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굉장이 듣기 좋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각에도 그랬으면 좋겠지요?
 '진노' 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손해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할 때 생기는 불쾌하고 강한 적대 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대로라면 진노는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손해를 보는 것 있나요? 모욕을 당하는 일이 있나요? 하나님은 영이시고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화를 내는 분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은 항상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 아닌 다른 일면이 있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할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를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노라는 말이 사용된 것입니다. 비록 그 말이 하나님의 본성을 설명하기에는 형편없이 초라해 보이지만 그렇게 안 하면 우리가 이해를 못하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진노의 본성 Ⅰ - 거룩하심
 하나님의 진노는 첫째로,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시는 그의 거룩한 품성 때문에 나타나는 죄에 대한 반응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죄에 대한 그의 거룩의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의 거룩은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죄는 절대로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또 여호와께 가까이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22).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 앞에 가까이 다가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가까이한다든지 죄인이 눈에 보이면 자연적으로 그 거룩은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 반응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지 아니하시다면 진노라는 말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박국 1장 13절에 보면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십니다. 따라서 그의 진노를 그의 거룩한 본성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아도 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노의 본성 Ⅱ - 사랑하심
 둘째로 하나님의 진노는 자기 자녀를 징계하시는 사랑의 일면입니다. 사랑하면 화냅니다. 사랑하면 징계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제일 많이 받은 백성이 있습니다. 어느 백성입니까? 바벨론 백성인가요? 앗수르 족속인가요? 우상 숭배 많이 한 블레셋 족속인가요? 놀랍게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들은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는 자녀라 죄를 범하면 가차없이 징계하셨습니다. 이 경우에는 징계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였던 것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사랑의 다른 일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칼 브라이트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에밀 부르너는 더 멋있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한테 등을 돌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곧 사랑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거룩한 일면이요, 그의 사랑의 일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것 못지않게 진노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앞에서 아무리 악한 짓을 해도 무감각하고 반응이 없는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죄인을 놓고 심판할 생각도 안 하고 먼 산 쳐다보고 계시는 분을 하나님으로 경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그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품성의 일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두 가지 죄
 
 다시 한 번 18절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8절).
 
 말씀은 우선 왜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불의라는 말은 원문상 다소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죄라는 말로 대치해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죄를 범함으로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오죽 많습니까? 이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고의적으로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가 어디 한두 명입니까? 하나님이 "이래라" 하면 저리 하고, "저래라" 하면 이리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리를 보여 주셨는데 그 진리를 발로 밟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자들이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때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진노하시는지 봅시다. 첫째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이고 두 번째는 불의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신다고 했습니다. 경건치 않음은 19절부터 25절 사에에 열거되어 있는 종교적인 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공연한 대적 행위를 말합니다.이것은 죄 중의 죄입니다. 불의는 26절에서 32절까지 나오는 죄목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람, 즉 이웃을 공격하는 죄입니다. 다른 말로 도덕적인 죄를 말합니다. 자기 중심의 갖가지 더러운 생각에서부터 이웃을 해치는 악한 행위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상 두 가지 죄에 대해 특별히 진노하고 계십니다.
 18절에서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 말은 시제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진노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언제 진노하시느냐" 하고 묻는다면 날마다 진노하신다, 지금 진노하신다, 계속 진노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7장 11절은 이 사실을 아주 잘 그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우리가 18절을 이렇게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며 죄를 거부하는 거룩한 분이신가를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이 버릇이 더 심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볍게 넘기는 것은 결코 옳은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으나 우리 마음속에서 쉴 사이 없이 일어나는 나쁜 생각 하나하나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거룩하신 이상, 그가 사랑이신 이상 그의 진노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의 진노가 멎는 날이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왜 던져 넣습니까? 진노하시는 분이니까 던져 넣는 것입니다.
 
 "...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눅 12:5).
 
 이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버릇없는 손자가 귀여워해 주는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고 늘어지듯이, 하나님을 버릇없이 섬기기가 쉽습니다. 그러다가 큰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악한 자의 형통은?
 
 한편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석연치 않는 의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매일 불의와 경건치 않는 죄를 향해 진노하고 계신다면 이 사회의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다지도 형통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께서 정말 진노하시는 것 같은 증거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안 느끼십니까? 악한 자가 벌을 받기보다 오히려 선하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 진노의 대상이 된 것처럼 너무 모순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정말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저는 가끔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하고 있다면 절대로 무사할 수 없는 자들이 왜 저렇게 건재한가? 수십, 수백만의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한 독재자들이 다른 나라에 돈을 싸 짊어지고 가서 팔십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생을 즐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단 교리를 가르치면서 수많은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이 저렇게 형통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실체에 대해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수년간 우리 주변에는 천재지변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라든지 홍수라든지 기근이라든지 가뭄이라든지, 깜짝 놀랄 만한 재난이 심심찮게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번 혼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나라는 무사하고 정말 보기에도 안된 나라에는 지긋지긋한 일들이 발생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진노의 대상을 잘못 보셨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아래 쪽에 사는 사람들은 약 40%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겪어 온 일은 무엇입니까? 혹독한 가뭄과 무서운 굶주림이었습니다. 1년 사이에 수백만의 어린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불의를 향해 진노하시는가 하는 회의가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악을 범한 사람이나 나라를 사정없이 심판하시는 예가 가끔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돔보다 더 악한 도시가 진노의 심판을 받은 예가 있습니까? 없다는 대답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롯 왕을 기억하십니까? 스스로 하나님인 체 자기를 높이며 거드름을 피우다 하루를 못 넘기고 하나님이 쳐서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요즈음은 어떻습니까? 가끔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하나의 사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읽은 어느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부가 25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아니지만 행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무난한 부부 사이였던 모양입니다. 자녀들 셋이 잘 자라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유복해서 이제는 여생을 좀더 편안히 보내기 위해 집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호숫가에 그림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멋진 집을 찾아다녔습니다. 마침 한 곳을 찾았습니다. 너무 마음에 드는 집이었습니다. 주인하고 거래가 시작되었는데, 주인은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지 아니면 이혼해서 나가버렸는지 홀아비로 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집을 사기로 계약하고 몇 달 동안 부인이 왔다갔다 했습니다. 두 달 가량 지난 어느날 느닷없이 부인이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왜 갑자기 이혼하려고 달려드는지 알 수가 없어 할 말을 잃었습니다. 여자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집을 떠나겠다고 했고, 아이들마저 데리고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샌 남편이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나오니 여자는 벌써 손가방 몇 개를 들고 나가면서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여자는 호숫가에 있는 그 집 주인에게 갔습니다. 그 홀아비와 눈이 맞아서 같이 살기로 한 것입니다. 미국 같은 곳에서는 예사로 생기는 일입니다. 그 여자가 가서 새살림을 꾸리고 호숫가에서 그야말로 꿈 같은 나날을 약 2주간 보낸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습니다.
 누가 진노하신 걸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경우는 즉각적으로 심판하신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보면 잘못을 범했을 때 여유를 주지 않고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희소합니다. 아주 희소하고 우리 눈에는 잘 안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삽비라와 아나니아와 같은 경우는 헌금 잘못하다가 어떻게 되었나요? 교회에 들어와 헌금을 내놓다가 당장 죽었어요.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까? 벤스 헤브너라는 미국의 나이 많은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즘도 교회 안에서 삽비라와 아나니아와 같이 잘못한 사람들을 계속 심판하신다면 교회마다 지하실에 영안실을 만들어 두어야 될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계속 죽어 내려갈 테니까요. 잘못하면 목사도 내려갈지 모르지 않습니까?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이민 교회에서 회계 집사가 주일 헌금을 계산해서 들고 나가다가 고스톱 판에 뛰어들었나 봅니다. 나중에 판돈이 모자라니까 교인들이 헌금한 돈까지 걸고 노름을 하다가 즉석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현대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심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심판은 매우 드뭅니다.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도 너무 담대하고 맹랑하니까, 못된 심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좀더 분명하게, 실감나게 진노하시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많고 세상도 훨씬 밝아질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생각대로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어느 신학자의 주장처럼 진노란 괜히 겁 주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해 둔 공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오해나 불평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세 가지 의미
 
 내버려 두심
 첫째, 하나님의 진노는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24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26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28절).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사람이 욕심나는 대로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게 허용된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즐기고, 원하는 대로 살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하는 일마다 다 잘된다고 합시다. 무슨 짓을 해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에 도덕성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해도 거기에 대한 제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유니 형통이니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요. 내버려 두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인 줄 모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입시를 몇 달 앞둔 고3 아들이 공부가 지겨워서 집을 나가 탈선을 했다고 합시다. 부모는 간절하게 설득을 합니다. 안 되면 호통을 쳐 봅니다. 그러나 어떤 수단을 다 동원해도 아들이 말을 안 들으면 역부족을 느낀 아버지는 "네 마음대로 해!" 하고 막말을 해버립니다.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화가 극도로 치밀어 올랐을 때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진노도 비슷합니다. 당장 이 사람 때리고 저 사람 죽이고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노가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방치는 징계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전도(顚倒)된 인식이 화를 불러들이는 비극의 씨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실패하고 고통을 당할 때 안심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자들이 많은 것을 보면 진노의 표라 할 수 있는 간섭과 제재를 당하는 편이 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 쌓아 놓으심
 둘째로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 쌓아 놓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마다 즉시 심판을 하지 않고 계속 쌓아 놓고 모아 놓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진노를 어느 시점까지 모아 놓는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댐 속의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가득 찬 다음 수문을 열면 굉장히 무서운 힘으로 쏟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하여 그가 정한 진노의 날까지 벌을 유보한 채 쌓아 두면 그 심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공포가 될 것입니다. 군대 말로 하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악을 범하는 자를 향해 그때마다 즉시 눈에 보이게 진노하신다면 그것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표를 내지 않고 쌓아 두시기만 하는 것에 비하면 잘못했을 때마다 맞는 편이 훨씬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 가운데 가장 겁이 났던 말이 "어디 두고 보자"였습니다. '두고 보자'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아빠 엄마가 당장 "왜 그랬느냐?" 하고 회초리로 때리고 끝내 주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데 때리지 않고 두고 보자 하면 잠마저 잘 자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두고 볼지 모르지만 항상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도 이와 같은 무서운 성격이 있음을 기억해 두도록 합시다. 지혜자는 두려워할 것이요, 미련한 자는 잘됐다 하고 방종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만히 덮어 두심
 셋째는 폭로하지 않고 가만히 덮어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밀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2장 16절을 보세요. "곧 네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왜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폭로하지 않고 계속 숨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탄로가 안 나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겁이 나서 빛 앞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드러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비밀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시간 속에 완전히 망각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사람에게 가리워진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만무한데 이 점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이상 그냥 무사히 넘어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심판 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체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끝까지 가만히 두면 그 사람은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이 뻔하니까요. 그러나 나쁜 짓을 했을 때 그것이 드러나서 수치와 고통을 당하게 되고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면 그것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의 채찍입니다. 사람들은 거꾸로 판단합니다. 매 맞는 것은 화요, 무사한 것은 복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에는 그와 반대되는 성격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피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이며 그것이 지니고 있는 세 가지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진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맹렬하게 하늘로부터 모든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대해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상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없이 잘되는 사람들, 예수 없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사람들, 남 몰래 나쁜 짓을 범해도 그것이 바다에 가라앉은 돌처럼 드러나지 아니하여 안도의 숨을 쉬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벌써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진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도 무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의 길만 열어 놓았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쏟을 진노를 예수님에게 쏟았고 예수님은 그 진노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지금과 훗날에 피하기를 원하면 예수 믿고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마음으로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과거에 예수 모르고 살 때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아니한 것 감사합니다. 끝까지 기다리지 아니한 것도 감사하고요, 끝까지 덮어 주지 아니한 것도 감사하고요, 실패를 통해서, 병을 통해서, 가난을 통해서 나를 빨리 회개하게 하시고 십자가 밑으로 피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이와 같은 감사의 기도가 우리 마음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매를 맞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징계일 뿐 하나님의 진노는 아닙니다. 우리가 받을 진노는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멀리 옮겨졌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입이 만 개라도 다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
 
 아직도 가정에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까?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부인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예수를 안 믿는데도 너무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무엇 하나 아쉬운 것이 없어 보입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위험한 자리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의 진노 아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 두고 보자 하고 기다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런 가족을 위해서 비록 하기 힘든 기도이지만 이렇게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내버려 두지 마옵소서. 기다리지 마옵소서.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그냥 덮어 두지 마옵소서." 어떻습니까? 이 기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세상 말로 하면 때려눕혀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식구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밑으로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두려운 기도를 할 수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집에 가면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데도 사업이 너무 잘되어서 집이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합니다. 식구들이 다 건강해서 얼굴에 기름이 흐릅니다. 부인이 목사를 붙들고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얼마나 축복해 주셨는지 모릅니다. 자녀들도 잘 자라고요. 아빠도 건강하고요. 사업도 잘되고요. 너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목사인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일인데 거꾸로 축복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남편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부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가족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 없이 살면서 너무 자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끝까지 그런 식으로 산다면 그들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지금 잘 되는 것이 성공이 아니고 지금 형통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십자가 밑으로 달려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믿은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보는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행복에 대한 인식을 바꾸세요. 형통한 사람,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는 시각을 바꾸세요. 성경이 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하세요. 그들의 실체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없이 살면, 성공할수록 하나님의 진노를 더 쌓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예수 믿는 우리가 그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담대해지고 교만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떨어야 그들이 떨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눈으로 보듯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오늘의 소돔, 고모라가 더 악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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