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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189쪽에 있는 글입니다.
10. 새로 열린 구원의 길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장 19~26절
지금까지 우리는 여러 시간을 통해 예수가 없는 인생이 어느 정도로 절망적인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죄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절망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죄를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데서 그 절망은 더 커지고, 결국에는 우리 힘으로 구원받을 만한 가능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데서 그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절망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꼴 좋다. 이제 혼 좀 나봐라" 하는 식으로 내버려 두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보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풍성하신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알려준 것처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겠느냐"(겔 18;23)고 반문하시며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편에서는 고민이 생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고민을 하신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 두자니 너무 불쌍하고 구원하자니 길이 없고 그러니까 고민을 하신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특별히 마음을 쓰셨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의 의의(意義)
우선 먼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을까 하는 문제였다고 봅니다. 지금까지는 율법을 행하면 살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을 행하면 구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얻은 결론은 사람이 율법을 도무지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선을 행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19, 2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19, 20절).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주어진 율법이 거꾸로 우리를 큰 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 앞에 변명조차 못하도록 입을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소망을 빼앗아버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두 말 못하고 끌려가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율법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더 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고 나서부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을 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가 배운 진리가 있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더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애를 쓸수록 더 못 지키더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말씀이 참으로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폐기하거나 무시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며 그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법입니다. 그가 얼마나 거룩하신가, 그가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가령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율법을 예로 들어 봅시다. 거짓말이 왜 죄가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분이므로 거짓말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 서 대적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공격하는 것이므로 나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거룩하며 폐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랑할 만한 명소 중에 가나안농군학교가 있습니다. 한 번 다녀온 분은 다시 가보기를 원하고, 또 자녀를 사람답게 키우려면 한 번쯤 보내야 하는 코스로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그 농군학교를 창설하신 분은 김용기 장로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죄가 게으름이라고 생각했던 분입니다. 게으름을 죄 중의 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일평생 흙과 씨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자기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강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얼마나 게으름을 싫어했는지 자기 집 주변에 있는 돌도 누워 있는 놈은 전부 세워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 어느 것도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다 김 장로처럼 게으름을 중한 죄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자녀가 게으름을 부려도 묵인해 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김 장로 앞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게으름을 죄악으로 여기는 사람 앞에서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은 그를 대항하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거역하는 행동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율법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거룩을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은 그대로 살려 놓고 절망의 늪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다른 길이 없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해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새로운 구원의 길
그 다음으로 또 하나님이 고민스러워하신 것이 있다면 자신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죄로 타락해서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면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는 죄를 미워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진노하고 그 죗값대로 심판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 보이려면 마땅히 죄는 죄대로 벌하고 의는 의대로 보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인으로 받으면 자신의 의로움에 손상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으로 받으시려면 자기의 거룩하심이 훼손되지 않는 조건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죄인을 의인이라고 해도 자기는 여전히 의롭고 거룩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공정하게 증명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5, 26절).
하나님은 우리 죄를 고의로 못 본 체하고 넘겨도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구원의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도 증명하고 죄인인 우리도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고 고심하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의 입장에서 구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우리를 쉽게 구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자식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을 때 그 잘못을 무조건 덮어 주고 용납한다는 것이 거룩하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도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물며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을 무조건 용서하고 의인으로 받으신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은 두 가지 난제에 저촉받지 않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구원받을 수 있고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 거룩에 전혀 손상이 가지 아니하는 길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입니다. 이 구원의 길이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이 말씀 중에서 '이제는'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전환점의 역할을 합니다. 이전에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 길만이 열려 있었는데 이제는 새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날에는 의를 행하여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때만 구원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이 다른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한 의',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어놓으신 의의 길입니다.
이것은 '율법 외에' 나타난 길입니다. '율법 외에', 이 말은 율법을 폐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과 관계 없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찾거나 생각해낸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참으로 복된 길입니다. 드디어 이 길이 나타났습니다. 구약의 시대가 종결되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옛 언약은 폐하고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행하면 구원받는 율법시대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복음의 시대로 넘어온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이 길을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모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이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고 기다렸지만 안개 속을 더듬는 것처럼 모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고 기다렸습니다.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로마서 4장을 보십시오. 구약시대의 인물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상적인 표본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유명한 로마서의 주제 역시 구약의 하박국 2장 4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길은 막연히 혹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이 오랫동안 증거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21절).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제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새로운 구원의 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22절에서 이 길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차별 없이 하나님에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얼마나 지켰느냐 하는 문제와는 관계없이 믿음 하나로 하나님에게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복음입니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신 파격적인 처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은 꼭 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외우면 외울수록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은혜의 생수가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23절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1장 17절부터 3장 18절까지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광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이것은 동사가 과거형입니다. 즉 아담의 범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죄를 지을 때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원죄로 인하여 그 후에 뒤따르게 된 모든 죄까지 포함합니다. "이르지 못하더니"가 현재형이기 때문에 아담이 범죄한 죗값이 지금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조상이 범죄한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은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국제적으로 알려진 유명인사와 환담을 나누게 되면 매우 자랑스러워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창조자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으니 그 영광을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를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찬송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제사장의 영광을 안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권을 부분적으로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러나 아담과 함께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하자마자 이 영광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깡그리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형편없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빼앗긴 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경배하지도 아니하는 악한 동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할 수 있는 통치권자로서의 위신도 깎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락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맹수들의 위협과 천재지변의 공포와, 죽음과 질병 등이 주는 온갖 종류의 고통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모두는 우리의 죄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실한 영광 이상의 것을 회복해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가 막힌 방법을 쓰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5절).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제물로 삼으시고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자기와 화목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피"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함과 공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받으실 근거를 마련하시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에 지은 모든 죄를 못 본 체하셔도 의로우신 자기의 입장이 조금도 다치지 않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은혜를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담겨 있는 세 가지 은혜
구속의 은혜
첫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절).
여기에 나오는 "구속"이라는 말은 노예 시장에서 통용되는 말입니다.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권리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죗값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할 때마다 '주님은 나 때문에 죽었다', '저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저기에 달려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달렸다'고 믿는 이유가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누구에게 지불하신 것일까요? 오리겐이라는 교부는 사탄에게 지불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이 아쉬워서 사탄에게 값을 지불합니까? 절대 지불할 책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지불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고통받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죄인이 된 후 손해를 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갚는 것이 도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의 본성인 거룩을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받으신 그 모든 손해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화목제의 은혜
둘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에는 우리의 화목 제물이 되신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화목 제물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하는 제사를 말합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진노를 거두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의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5~7).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했던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 가족은 홍수가 끝난 다음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시고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다음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창 8:20,21).
짐승 제물을 드리는 제사였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노가 풀렸던 것입니다. 제사가 이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죄 없는 몸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짐승 제물도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제물로 드린 제사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무리 뜨거운 풀무불처럼 타올랐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시고 그 노를 거두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 없는 자기 아들의 죽음이 너무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고 우리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는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독특한 성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음이 순교자의 죽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기꺼이 생명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죽음을 가급적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죽음이 우리가 범한 죗값을 온통 짊어지는 저주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와 같은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이 얼마나 두려워하면서 받아들인 죽음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친 죽음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후반부의 말씀이 이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
세 번째로 예수님의 죽음에는 우리의 의가 되신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6절).
이것은 예수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율법을 범해서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자신으로는 율법을 지킬 의무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충족시키신 다음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자기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돌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입혀 주시는 의의 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를 우리의 의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의 때문에 의인이 아닌 우리가 의인으로 취급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법정에서 볼 수 있는 판사의 판결과 흡사합니다. 판사가 "무죄를 선고합니다" 하면 피고에게 비록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할지라도 혐의가 없는 자로 인정되어 풀려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용서받는 길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가 가능하도록 만든 하나님의 지혜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구원 얻는 길도 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게 하는 길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를 알면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죽어서 가야 할 곳은 뻔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 가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지옥에 간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소름이 끼칩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에게 잃어버린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영생을 소유하게 하셨으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앞을 보아도 은혜요, 뒤를 보아도 은혜요, 좌로 보아도 은혜요, 우로 보아도 은혜입니다.
24절 중간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155번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바울이 100번 이상 사용했습니다. 단일 성경 중에서 은혜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은 로마서인데 무려 24번이나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는 '기쁨' 혹은 '기쁨을 일으키는 것', '기쁨을 주는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해 놓은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가 클수록 기쁨도 더욱 커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의 감격은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어린 꼬마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가르치면서 흔히 사용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선한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려고 했지만 백성들이 자꾸 죄를 범하자 엄한 국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법이 금하는 죄를 범하면 그의 두 눈을 뽑을 것이라고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왕자가 그만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임금이 만든 법대로 하면 왕자의 두 눈이 뽑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 문제가 생깁니다.
두 눈을 잃은 왕이 어떻게 정사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임금이 공포한 법을 무효화시키면 왕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됩니다. 법은 법대로 살리고 아들도 살릴 길이 없나 하고 왕이 고심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아들의 눈 하나와 자기의 눈 하나를 뽑으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법은 법대로 지키고 아들이 맹인 되는 불행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자식을 위한 사랑이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이 동화를 들으면서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에 액면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왕처럼 한쪽 눈을 뽑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가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이 귀한 은혜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감사하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며칠 전에 아프리카에서 수고하시는 어느 선교사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속에 이런 내용의 글이 담겨 있었습니다.
"목사님, 복음을 위해 쓰임받는다는 기쁨을 안고 아프리카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땅 밀림 지역에서 몇 주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약을 써보지도 못한 채 움막에서 혼자 신음하는데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아픔을 견디려고 애를 쓰다가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뜨거운 눈물이 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왜 이 젊은이가 적도의 나라에 가서 그 고생을 감수합니까? 당신에게도 이런 복음의 감격이 있습니까?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성경에 버금가는 고전입니다. 그런데 그 책의 주인공의 본명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한편 그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영어로 표기하면 Gracelessness, 한국어로 말하면 '은혜 없음'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원래 이름은 은혜없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다음에 이름이 달라졌습니다. '은혜 있음'으로 , 예수 모르면 은혜 없이 사는 자요, 예수 믿으면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존 번연이 십자가의 은혜를 소재로 해서 지은 감동적인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은 당신의 겸손으로 은혜가 무엇인지 확증하셨습니다. 은혜가 당신을 비천하게 하고 모욕당하게 하였습니다. 은혜가 당신으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죄의 짐을, 눈물의 짐을, 하나님의 저주의 짐을 지게 하였습니다. 은혜는 당신의 옆구리에서 흐른 당신의 피와 함께 흘러나왔습니다. 은혜는 당신의 부드러운 입술의 모든 말씀과 함께 다가왔습니다. 은혜는 채찍으로 맞은 당신의 그곳에서, 가시로 찔린 당신의 그곳에서, 그리고 못으로 박힌 당신의 그곳에서, 가시로 찔린 당신의 그곳에서, 그리고 못으로 박힌 당신의 그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은혜가 있습니다. 천사들을 경탄게 한 은혜, 죄인들을 복되게 한 은혜, 마귀들을 놀라게 한 은혜."
얼마나 기막힌 주님의 은혜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살리려고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격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기쁨을 맛본 사람이 어떻게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 주님께 영광 돌립시다. 우리 주님을 위해 헌신합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과제요, 목적인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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