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mmxxvi.

만족할 줄 아는 삶의 비결(빌립보서 4:11–13).

by 【고동엽】 2026. 1. 18.

만족할 줄 아는 삶의 비결(빌립보서 4:11–13).

성도 여러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삶의 비결”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들려줍니다. 그는 감옥이라는 좁은 자리에서, 자유를 잃은 몸으로, 오히려 넓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 이 말씀은 세상이 말하는 자기암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배워진 영혼의 기술이며,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길러진 거룩한 습관이며, 십자가의 은혜로 단련된 마음의 근육입니다.

우리는 흔히 만족을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만족은 “원하는 것이 바뀌는 것”에 가깝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욕망의 왕좌에서 내가 내려오고,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정은 그대로여도, 해석이 달라집니다. 형편이 같아도, 심장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흔드는 풍랑이 여전해도, 배 안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다른 항로를 탑니다.

바울이 “배웠다”고 말하는 대목을 놓치지 마십시오. 자족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배워서 익히는 경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생적으로 낙관적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담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족은 기질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길을 아는 사람이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며, 교회를 세운 사도입니다. 그런 그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족을 가르치실 때, 칠판에 이론만 적어 주시지 않고, 삶이라는 교실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풍요도 교재가 되고, 궁핍도 교재가 됩니다. 칭찬도 교재가 되고, 오해도 교재가 됩니다. 열림도 교재가 되고, 닫힘도 교재가 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진짜로 살리기 위해, 때로는 우리에게 “원하던 것”을 잠시 내려놓게 하시고, “원해야 할 분”을 붙들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대개 비천을 견디는 법은 배우려 합니다. 그러나 풍부를 거룩하게 다루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넘어지곤 합니다. 어떤 이는 가난으로 무너지고, 어떤 이는 풍요로 타락합니다. 가난은 부족 때문에 마음을 찢고, 풍요는 자만 때문에 영혼을 잠들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양쪽을 다 말합니다. 자족은 궁핍을 참는 능력만이 아니라, 풍요를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궁핍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부족함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넘침 가운데서도 무릎 꿇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족은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현실을 가볍게 만드는 마술도 아닙니다. 그는 배고픔을 “배고픔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고픔을 배고픔으로 인정합니다. 그는 풍부를 “무가치한 것처럼” 말하지도 않습니다. 풍부도 풍부로 인정합니다. 다만 그는 그 모든 상황 위에 한 분을 모십니다. 상황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가 마음의 주인이 되게 합니다. 자족은 감정이 무뎌진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바뀐 상태입니다.

이 대목에서 복음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족은 윤리적 결심의 수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옵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말할 때, 그는 자기 안의 숨은 힘을 발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새 위치를 말합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새 마음을 받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서 보호받고 인도받는 그 자리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며, 내 삶은 우연이 아니며, 내 형편은 방치가 아니며, 내 길은 버림이 아니다.” 그러니 자족은 단지 마음을 다잡는 심리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손길을 신뢰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종종 빌립보서 4장 13절을 떼어내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성공의 شعار처럼 사용합니다. 그러나 문맥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 이루는 만능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도 믿음으로 감당하는 능력입니다. 배부름도, 배고픔도, 풍부도, 궁핍도,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게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를 세상의 정상으로 세우기 위한 성공의 도구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를 버티게 하는 은혜의 지팡이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소중히 말하는 섭리의 교리는 바로 여기서 빛납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우연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만 계획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루도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형편은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간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안에 허락된 자리입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을 미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눈물을 눈물이라 부르고, 탄식을 탄식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그 눈물과 탄식의 끝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합니다. 자족은 바로 그 예배의 한 얼굴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의 뿌리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만은 때로 환경에서 오지만, 많은 경우 비교에서 옵니다. 남의 형편이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내 삶의 은혜는 흐릿해집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빛보다, 남에게 비친 빛이 더 눈부시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교는 감사의 숨을 막고, 마음의 호흡을 얕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끊임없이 “조금만 더”를 외칩니다. 조금만 더 가지면 행복할 것 같고, 조금만 더 인정받으면 평안할 것 같고, 조금만 더 건강하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마실수록 목이 더 마릅니다. 하나님 없는 더함은 언제나 결핍을 키웁니다.

자족은 부족함이 사라져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족은 “충분하신 분”을 만남으로 생깁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평강이 되시며, 우리의 기업이 되십니다. 그분이 내 영혼의 몫이 되시면, 세상의 몫이 줄어도 나는 빈손이 아닙니다. 세상의 잔고가 줄어도, 하늘의 유업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덜 알아줘도,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문이 닫혀도, 하나님은 길을 여십니다. 내 계획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뜻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족은 이 믿음이 마음속에서 현실처럼 작동하기 시작할 때 피어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자족의 학교에 두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사실상 종살이입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전에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 더 큰 성취가 없으면 가치가 없다는 판단, 더 나은 조건이 아니면 감사할 수 없다는 태도는 마음을 쇠사슬로 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을 배우면, 우리는 외부 조건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상황이 우리를 명령하지 못합니다. 평판이 우리를 휘두르지 못합니다. 소유가 우리를 조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족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거룩은 단지 죄를 안 짓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삶의 질서입니다. 불만이 많은 마음은 하나님을 불신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다면, 왜 내게 이것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은 때로 정당한 탄식이지만, 그 탄식이 하나님을 재판하는 자리로 변질되면 위험합니다. 자족은 하나님을 재판대에 세우지 않고, 오히려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이 옳으십니다. 저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선하심을 신뢰합니다.” 이 고백이 성화를 이루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족을 통해 우리를 이웃을 섬기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불만은 마음의 시야를 좁게 합니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내 고통만 커지고, 남의 아픔이 보이지 않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족은 마음을 넓힙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졌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눔은 남는 것의 일부를 떼어주는 행위만이 아닙니다. 나눔은 하나님이 채우신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선물을 기뻐하면서도, 그것을 “열매”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족은 탐심을 줄이고, 사랑을 키우며, 섬김의 손을 열게 합니다.

여기서 실제적인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작은 교회의 성도 한 분이 계셨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고,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 겨울, 난방비가 오르자 그는 밤마다 전기장판을 켰다가도 껐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아껴도 부족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설교 중에 들려온 한 문장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때, 늘 제때에 주십니다. 늦은 것 같아도 늦지 않고, 부족한 것 같아도 결핍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날 이후 그 성도는 갑자기 돈이 생긴 것도 아니고, 병이 나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매일 아침 작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오늘도 저의 몫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제 삶의 난로이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더 절약하며 더 인색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따뜻해졌습니다. 어느 날은 집 앞에서 추위에 떠는 이웃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저를 살리시더라고요.” 그 말은 그의 통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배운 자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난방비의 숫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은 더 이상 추위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비밀입니다. 형편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족의 길은 결국 예배의 길입니다. 우리가 만족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사실상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공, 인정, 소유, 건강, 관계, 안정 같은 것들이 하나님 자리에 올라앉으면, 그 순간부터 그것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더 바치라고 요구하는 잔인한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더 바치라고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분, 십자가로 내려오신 분, 죽음으로 죄를 끊으신 분, 부활로 새 생명을 여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내게 오셔서 “내가 너의 만족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소리에 덜 흔들리게 됩니다.

자족은 고난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족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법을 가르칩니다. 바울은 눈물 없는 사람이 아니라, 눈물 가운데서도 소망을 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괴로움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숨 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족은 우리의 눈물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대신 눈물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아줍니다. 탄식이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줍니다. 가슴이 무너질 때에도 “주님이 나를 놓지 않으신다”는 신앙이 우리를 다시 세워줍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자족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길을 따라가면, 자족은 몇 가지 영적 습관을 통해 뿌리내립니다. 먼저, 감사의 훈련입니다. 감사는 기분이 좋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선택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세어보는 것, 오늘 받은 은혜를 이름 붙이는 것, 내 삶에 이미 놓인 하나님의 손자국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의 훈련입니다. 자족은 “원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함이 하나님께 정돈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욕망을 억압하는 시간이 아니라, 욕망을 정결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이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주님을 더 원합니다.” 이런 기도가 쌓일 때, 마음의 중심이 바뀝니다. 또한 말씀 묵상의 훈련입니다. 세상의 광고는 우리에게 “너는 부족하다”고 속삭이지만,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이미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말씀은 그 선포를 우리의 심장에 새깁니다. 마지막으로, 나눔과 섬김의 훈련입니다. 물질이나 시간이나 마음을 조금씩 열어 이웃을 섬길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게서 빠져나가시는 분이 아니라, 내 안에서 흘러넘치게 하시는 분이시다.” 자족은 움켜쥠이 아니라, 맡김과 흘려보냄 속에서 더 깊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 안으십시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 이 말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족이라는 이름의 안락함으로만 초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배우게 됩니다. 형편이 흔들릴 때에도 중심이 서는 평강, 계산이 맞지 않을 때에도 감사가 피는 평강, 내일이 불안해도 오늘을 맡길 수 있는 평강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조건이 아니라, 더 깊은 그리스도입니다. 더 넓은 소유가 아니라, 더 넓은 믿음입니다. 더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더 선명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충분한 분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붙드시니, 우리는 어떤 형편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분이 능력 주시니,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만족이시니, 우리는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는 자유를 배웁니다.


 

설교요약

빌립보서 4:11–13에서 바울은 자족이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배워지는 경건”임을 증언합니다. 자족은 궁핍을 참는 기술을 넘어 풍요를 거룩하게 다루는 능력이며, 문맥상 4:13의 “모든 것”은 성공 만능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도 그리스도 안에서 감당하는 능력입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자족은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의 열매이자,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오는 자유이며 성화의 길입니다. 비교와 탐심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감사, 기도, 말씀, 나눔의 습관을 통해 자족을 배워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습니다.

묵상 포인트

  • 내 마음이 만족을 요구하는 “조건”은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나는 궁핍보다 풍요에서 더 쉽게 하나님을 잊지는 않습니까.
  • 비교가 내 감사를 빼앗는 순간은 언제이며, 그때 복음은 무엇을 다시 들려주어야 합니까.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이 내 삶에서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 오늘 내가 선택할 작은 감사 한 가지, 작은 섬김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강해

본문의 흐름은 바울의 개인 감정표현을 넘어, 복음이 삶의 형편을 재해석하게 하는 영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바울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단순한 필요 충족 차원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자족을 배움”입니다. 이는 자족이 즉흥적 감정이 아니라 훈련의 산물임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대구적 표현, “비천… 풍부… 배부름… 배고픔… 풍부… 궁핍”은 삶의 스펙트럼 전체를 포괄합니다. 즉 특정 상황에서만 가능한 신앙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4:13은 이 자족의 근원이 자기통제력이 아니라 “능력 주시는 자” 곧 그리스도께 있음을 못 박습니다. 문맥상 “모든 것”은 소망찬 성공을 약속하는 문구가 아니라, 상반된 형편들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고 감사하며 순종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주석

  •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족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학습’의 결과입니다. 신앙은 지식만이 아니라 습관이 되도록 배워야 합니다.
  • “어떠한 형편에든지”: 신앙의 적용 범위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특정 계절의 은혜가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은혜입니다.
  • “비천/풍부”: 하나님은 결핍 속에서도, 풍요 속에서도 시험과 훈련을 허락하십니다. 비천은 원망으로, 풍부는 교만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입니다.
  • “일체의 비결”: 바울은 자족을 하나의 ‘비밀’(삶의 중심 원리)로 제시합니다. 중심이 바뀌면 주변이 정돈됩니다.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력은 환경 통제의 권력이 아니라, 환경을 ‘믿음으로 통과’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붙드심입니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αὐτάρκης / αὐτάρκεια(자족, 충분함): ‘스스로 충분하다’는 헬라 철학(스토아)에서도 쓰였으나, 바울은 이를 자기충족이 아니라 그리스도 충족으로 전환합니다. 자족의 근거가 ‘자기 안’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 ἔμαθον(배웠다): 단회적 깨달음이라기보다, 경험과 훈련 속에서 습득되는 학습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 μυέομαι(비결을 배우다/익히다, 4:12의 “배웠다”에 해당하는 동사 계열): ‘비밀에 들어가다, 입문하다’의 뉘앙스를 지닙니다. 자족은 겉핥기 교양이 아니라, 복음의 깊이에 “입문”하는 은혜입니다.
  • ἰσχύω(할 수 있다): 성취의 과시가 아니라, 감당함과 견딤의 능력을 포함합니다.
  • ἐν τῷ ἐνδυναμοῦντί με(나를 능하게 하시는 이 안에서): 능력의 원천이 지속적으로 ‘주어짐’임을 드러냅니다. 신자는 자립이 아니라, 은혜 의존으로 강해집니다.

금언

  • 만족은 소유의 넓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깊이에서 자랍니다.
  • 궁핍은 믿음을 드러내고, 풍요는 믿음을 시험합니다.
  • 비교는 은혜를 흐리게 하고, 감사는 은혜를 밝힙니다.
  • 자족은 상황을 바꾸는 마술이 아니라, 중심을 바꾸는 복음입니다.
  •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형편도 믿음으로 감당한다”는 고백입니다.

신학적 정리

  • 섭리: 하나님은 구원뿐 아니라 성도의 삶의 형편까지 주권적으로 다스리십니다. 자족은 섭리를 신뢰하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 자족의 근원은 자기계발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분과 은혜입니다.
  • 성화: 자족은 죄(탐심, 원망, 비교)를 죽이고 감사와 순종을 살리는 성화의 과정에서 자랍니다.
  • 십자가 중심성: 자족은 번영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서 배우는 영혼의 자유입니다.

주제별 정리

  • 자족과 감사: 감사는 자족의 언어이며, 자족은 감사의 토양입니다.
  • 자족과 탐심: 탐심은 끝없는 결핍을 만들고, 자족은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 자족과 자유: 자족은 외부 조건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복음적 자유입니다.
  • 자족과 섬김: 자족은 움켜쥠을 풀고, 나눔을 가능하게 합니다.

목회적 정리

  • 자족을 “감정 관리”로 축소하지 말고 “복음의 적용”으로 가르치십시오.
  • 궁핍 성도에게는 정죄가 아니라 섭리 안의 위로를, 풍요 성도에게는 감사와 겸손의 경계를 함께 세우십시오.
  • 4:13을 단독 구호로 사용하기보다 4:11–12의 문맥 안에서 해석하도록 인도하십시오.
  • 교회 공동체가 서로의 짐을 나눌 때, 개인의 자족은 더 건강하게 자랍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 하루, 비교를 멈추고 감사 세 가지를 적어 하나님께 올려드리겠습니다.
  • 지출과 욕망을 점검하여, “필요”와 “과시”를 분별하겠습니다.
  • 풍요의 자리에서는 교만을 경계하고, 부족의 자리에서는 원망을 경계하겠습니다.
  • 염려가 밀려올 때마다 “주님이 내 몫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로 방향을 돌리겠습니다.
  • 작은 섬김 한 가지를 실천하여, 자족이 사랑으로 흘러가게 하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