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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267쪽에 있는 글입니다.
14. 당신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장 1~11절
로마서 안에는 그 중요성으로 보아 가히 성경의 노른자위라고 불러도 좋을 부분이 몇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말씀인 5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이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맛은 꿀송이처럼 달콤합니다. 우선 처음 두 절을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저의 말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 2).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운 말씀인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즉시 날마다 맛보며 즐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다시 한 번 1, 2절의 말씀을 주의해 보십시오. 세 가지의 기막힌 은혜가 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세 가지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는 은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세상을 사는 우리가 땅 위에서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3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이 세 가지 은혜를 누리게 된 근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5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이신칭의의 결과', '이신칭의의 열매' 혹은 '이신칭의의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서 배운 바와 같이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상극(相剋)의 관계였습니다.
이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이 10절에서 나옵니다. "곧 우리가 완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창조자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창조자 앞에서 피조물은 형편없는 약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가 원수지간이 되었으니 약자인 피조물의 처지에서 어찌 그 마음이 평안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래도 평안하다고 떠벌린다면 그것은 정말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자마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우리를 의인으로 보십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적대 관계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그 적대 관계를 청산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뿐입니까?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받는 아들의 위치에까지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날마다 진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도망가야 할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항상 얼굴을 대하고 다정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 넓고 따뜻한 품에 안겨서 우리의 모든 시름을 달랠 수 있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입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 은혜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는 칭의의 결과로 따라오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에 기쁨이 솟아납니다. 여건이 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바뀐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말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대우받는다는 사실이 워낙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한 순간에 우리 마음에는 대변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공포가 평안으로 바뀌는 변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데 이런 평안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칭의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하는 은혜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칭의를 뿌리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한 총리 회담에서도 쌍방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조정을 거친 결과 합의 문서가 작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양쪽 총리들이 조인을 한 합의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합의서는 어디까지나 정치인들끼리 주고받는 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 합의서를 보지 못했지만 매스컴을 통해서 소식을 듣고 신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합의서의 내용을 듣는 순간부터 무엇인가 우리의 의식 세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고개를 숙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40여 년이 넘도록 서슬이 퍼렇게 서로 으르렁대던 적대감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155마일 일선 고지에 보내 놓고 밤낮으로 그의 신변을 염려하던 부모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이렇게 감정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합의서를 신뢰한다는 실제적인 증거입니다. 조인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이렇게 평안해지는 감정의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합의서 자체를 믿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예화에 빗대어서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합의서가 조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를 다시는 원수로 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예수님은 자기의 피로 그 합의서에 도장을 찍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대신한 예수님 사이에 일종의 화목 증서가 교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증서를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믿으면 반드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밀물처럼 밀려드는 영혼의 평안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입니다.
1절에서 우리말 번역에는 "화평을 누리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누리자'로 번역할 수도 있고, '누리고 있다'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까? 두 가지를 다 받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굳이 택하라면 저는 '화평을 누리고 있다'를 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마음에 자연적으로 평화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리고 있다고 하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화평을 누리자'라고 하면 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우리가 화평을 거절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은 원한다고 찾아오는 은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의롭다 함을 받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요 또 당연한 권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이 은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 평안을 아는가?" "나는 이 평안을 누리고 사는가?" 한번 물어 보세요. 이 평안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아무리 몸이 괴롭고 고달파도 가슴속에서 은은히 전달되어 오는 평안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어도 촉촉히 가슴을 적실 수 있는 평안입니다. 당신에게 이 평안이 있나요? 우리 주변에는 주일학교 학생으로부터 어른까지, 예수 갓 믿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이 평안을 누리며 사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신문에 <경아의 오른팔>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고3, 꿈 많은 여고 시절에 단백질이 빠져 나가는 신증후군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고, 또 게재된 사진을 보고 얼마나 충격과 도전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경아는 중환자실에서 마치 꺼져 가는 등불처럼 힘든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의 오른팔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그 팔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린 자녀가 이런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담임목사는 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참 가슴이 아픕니다. 경아가 아무 탈없이 완치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경아는 한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상에서 예수님을 다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수술 후 그가 찍은 사진에서 오른팔을 잘리운 채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맑게 웃고 있는 그의 평안한 얼굴이었습니다. 사진 설명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에 팔 자르러 들어갈 때도 담담했어요" 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평안입니다. 정말로 신비한 평안입니다.
잔인하리만큼 갈기갈기 찢긴 이 어린 소녀의 마음을 그토록 평안하게 붙들고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두고두고 연구해도 그 끝을 찾지 못할 만큼 심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해치는 두 가지
반면에 아직도 이 평안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예수를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평안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사실을 주저하지 않고 고백하지만 막상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안이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꺼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평안을 느끼지만 쉽게 그 평안이 깨어져버린다고 실토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성경 읽고 애를 써보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불안, 공포 등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형제들은 은혜 밖에서 맴돌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비정상적인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평안이 없다면 정상이 아닙니다. 하루 빨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무엇이 내 맘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그 이유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따지면 죄책감과 완벽주의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죄책감
죄책감이란 과거에 범한 죄로 인해서 양심적으로 당하는 고통과 불안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죄는 한 번 회개하는 것으로 죄책감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죄는 몇십 년이 흘러도 계속 쇠못으로 찌르듯 양심의 고통을 안겨 줍니다. 회개도 수십 번 했습니다.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야. 설혹 용서를 받는다고 해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해." 이것은 일종의 자학에 가까운 자기 정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죄책감은 몸의 통증과 흡사한 데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불치의 암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것을 봅니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면 간호사는 진통제를 투여합니다. 여러 번 진통제를 투여했는데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으면 결국 모르핀 같은 강한 성분의 약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또 통증이 찾아옵니다. 제가 아는 한 암 환자는 2년 동안 이 무서운 통증과 싸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은 잔인하기가 질병으로 인한 통증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은혜를 묵상하거나 찬양할 때에는 잠시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참 지나다 보면 또 슬그머니 찾아옵니다. 잠재의식 속에는 일신상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떠나지 않습니다.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다가 조그마한 사고라도 덜컥 나면 자기의 죗값이라고 스스로 정죄해버립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영혼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고문입니다. 이와 같은 잔인한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한 채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혹시나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은 아닌지요?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완벽주의
다음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해치는 두 번째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완벽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완벽주의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의식이 자기 안에서 자주 노출되는, 옛 자아의 추태를 못 보아 주는 버릇을 말합니다. 원하는 만큼 거룩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데서 오는 갈등은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답게 온유하고 후덕한 인간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서 별로 구별이 안 되는 생각, 말, 행동을 하는 자신을 볼 때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또 습관적으로 자주 범하는 사소한 죄를 끊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자기 혐오증에 빠져듭니다. 이것은 자기와의 씨름입니다.
바울도 이런 갈등을 겪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을 보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와 같이 자신의 영적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괴롭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은혜를 간직하기 어렵습니다. 쉬지 않고 갈등하는 마음에 어찌 평안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죄책감이나 완벽주의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영적 예민함으로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물론 그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큰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나쁜 짓을 하고도 용서받았다고 떠들면서 고통하는 빛이 안 보이는 사람보다 훨씬 바람직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각이 없는 사람보다 건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도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누릴 가장 큰 행복을 앗아가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책감과 완벽주의에 대한 반응은 나쁘다기보다는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가 깨끗해서 의롭다고 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의인으로 취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크고 작은 죄를 가리지 않고 다 용서하고 잊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의 죄에 매여 고통합니까? 왜 현재의 자기 모습을 혐오하며 고통합니까?
골로새서 2장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이라는 말이 참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은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가령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했을 때 "이제 당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겠소" 한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모든'은 조건적이며 제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그의 잘못을 용서해 준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처 몰랐던 잘못이 있거나 또 다시 잘못을 범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요?" 하고 안색을 싹 바꾸며 따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은 이렇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고 할 때 그 '모든'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모든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 지금 짓고 있을 수도 있는 죄, 미래에 지을지도 모르는 죄까지 포함해서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항상 현재입니다.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는 과거,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면 그 용서는 영원토록 현재의 용서로 유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그렇게 악한 짓을 할 줄 몰랐어.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그것만은 예외야" 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큰 죄나 작은 죄, 과거의 죄나 현재의 죄, 그 어떤 것도 문제삼지 않으시고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죄를 끌어안고 씨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죄책감과 완벽주의 때문에 평안을 빼앗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법에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죄를 가지고 이중으로 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똑같은 죄를 가지고 이중적으로 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공범이 아닌 이상 똑같은 죄를 가지고 두 사람을 벌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법도 이와 같은 원칙이 적용되거든 하물며 모든 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똑같은 죄 때문에 우리를 다시 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죗값을 물으실 때는 우리에게 다시 묻지 않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홀로 감당하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다 받으셨는데 따로 우리를 다시금 징벌하신다는 것은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죄책감을 가지고 고통한다면 그것은 바보스러운 짓입니다.
저는 경험을 통해서 이 저주스러운 죄책감과 완벽주의에 매여서 씨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말씀을 잘못 배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 믿은 다음에 짓는 죄는 훨씬 크고 악한 죄다. 용서를 받는 것과 벌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알고 짓는 죄는 사할 곳이 없다."
당시 교회가 성결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정도를 벗어났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 잘못된 가르침은 나를 얼마나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러니 제가 50여 년이 넘도록 살면서 지은 죄는 전부 다 예수 믿고 나서 지은 죄가 됩니다. 예수를 모르고 지은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저의 죄는 더 크고 악한 죄가 된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지만 저는 평생 벌을 받아야 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저는 죄인 줄 모르고 지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 지었으니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죄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제가 어찌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진리를 잘못 배운다는 것이 한 개인을 이렇게 무참히 짓밟아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워야 합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는 분들은 어디엔가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만일 저와 같이 잘못 배워서 그렇다면 이 시간 진리를 바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비결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 비결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주목하십시오. 매우 중요한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간단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우리가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죄만 짓고 큰 죄를 안 지었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전부 모르고 지은 것이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해서 화평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불완전한 데가 보이지 않아서 화평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본문 말씀은 매우 심오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희생된 분입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살아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예수님은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 우리의 연약함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죗값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안겨 주신 분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절).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10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킨 분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은 전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가져다 준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우리는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에 더 비중을 많이 두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야 할 자리에 자기를 놓고 더 예민하게 살피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를 돌아볼 때에도 예수님 생각은 안 하고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독좌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직접 담판하려고 하는 무모한 행동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공로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돌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 혼자 들어가기를 잘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우리는 완전히 더러운데 하나님의 절대 신성과 우리의 절대 죄성이 마주치면 아떻게 될까요? 공포, 갈등, 두려움밖에 남을 것이 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찾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과거의 죄를 생각할 때도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지 말고 예수 안에 있는 내 자신,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정죄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모든 죗값을 치르신 사실을 믿고 그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이 자기를 용서하는 길이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길입니다.
죄책감이 일어날 때는 즉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괴로울 때도 즉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쉬지 말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절대로 눈을 돌려 자신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가 곁에서 북을 치고 장구를 쳐도 예수 그리스도한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기쁨
부에노스아이레스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목회와 저술 활동을 할 동안 편두통으로 심하게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편두통이 발작을 하면 정신착란증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졸도까지 했습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편두통 때문에 기절을 해서 병원으로 옮겨진 일도 세 번이나 있습니다. 그래서 남미나, 유럽, 미국 등지에서 유명하다는 정신과 의사, 신경과 의사를 찾아다니고 좋은 약이라는 것은 다 먹어보고 심지어 신유의 은사를 받은 분들을 찾아가서 기도를 받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골로새서 2장 13절 말씀을 읽다가 마음에 번쩍 은혜의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는 말씀 중에서 '모든'이라는 말에 갑자기 그의 마음이 가서 얼어붙어버렸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이 말씀의 의미는 제가 아직 짓지도 않은 죄까지 다 용서해 주셨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이대로의 저 자신을 받아 주신다는 말입니까?"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대답이 들렸습니다. "너는 설교자가 아니냐? 이때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이 어리석은 자야."
그때까지 그는 예수 믿으면 모든 죄 용서받는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것이 마음에 와닿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자요, 신학 교수였지만 그때까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르티즈 목사는 때때로 자신의 언행 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 괴로워 했다고 합니다. '왜 나는 이럴까?' 하고 자책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성격을 보아도 형편이 없고 과거의 죄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현재의 허물을 생각할 때 자신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날마다 자기 자신과 씨름하고 혈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말씀 앞에서 그의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니? 너는 지금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인 너를 네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내 아들 예수의 피가 나에게는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것인데 그것이 너에게는 불만족스럽다는 것이지. 내가 만족스러워하는 예수의 피가 너에게 불만족스럽다니 너는 대체 누구냐? 너는 나보다 더 거룩하냐?"
드디어 그는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 행위와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고 갈등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완벽주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이 진리에 눈을 뜨자 그의 마음에 놀라운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신비스러운 행복감에 흠뻑 젖었습니다.
그래서 참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껴안아 주었다." 드디어 자기와의 싸움이 끝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3주 후에 그의 편두통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났는데도 다시 편두통으로 고생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예수만 바라봅시다. 애를 한둘 키워 보신 분들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낯가림을 막 시작하는 어린 아기가 엄마한테 안겨 있을 때 곁에 가서 "이리 온" 하고 팔을 벌려 보십시오. 아기는 금방 엄마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버릴 것입니다. 다시 반대편에서 가서 "이리 온" 하고 불러 보십시오. 다신 한 번 냉정하게 고개를 휙 돌려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에 대해서 이와 같이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가 내 과거의 죄를 들고 와서 "이리 온" 하면 즉시 예수님을 향해서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또 마귀가 반대편에 와서 나의 완전치 못한 것을 가지고 "이것 좀 봐!" 하면 주저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일지라도 예수 없는 하나님은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없는 구원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없는 거룩이나 예수 없는 천국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없으면 하늘의 황홀한 축복이 우리에게는 전부 두려움과 고통이 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들을 볼 때만 우리의 축복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주님이신지 모릅니다. 어찌 그분한테서 한시인들 눈을 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가 권면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어 험한 나그네 길을 밝고, 힘차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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