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 (마태복음5:1-7)
지난 3월 16일 한 네티즌이 ‘네이버 포토 코너’에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으로 6장의 사진을 올린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서울 역 건너 편 대일학원 앞을 지나다가 한 아가씨가 노숙자 할아버지께, 빵과 음료수를 드리는 걸 보았습니다. 허겁지겁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그 장면을 찍고, 그 아가씨의 얼굴을 담고 싶어서 자리를 바꾸어서 조심스레 담았는데, 때마침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할아버지께 해 드렸습니다. 이 사진을 공개한 사람은, 밝은 웃음을 가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가 따스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적었습니다.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이 여성을 “서울역 목도리녀(女)”라고 부르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천사의 심성을 지닌 예쁜 아가씨!”, “이 각박한 세상에 저런 아리따운 아가씨의 마음처럼 모두 다 훈훈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23일 일간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하나금융그룹이 ‘서울역 목도리녀(女)’의 특별채용을 검토하고 있다. 최근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서울역 노숙자 할아버지의 목에 매주는 모습이 6장의 사진에 담겨 누리꾼들의 찬사를 받은 김지은(24, 홍익대경영학과4년)씨가 그 주인공이다. 김 씨의 아버지 김민태(56)씨도 22년째 독거노인을 돕고 있는 사연이 밝혀져 같이 화재가 되고 있다.
23일 하나금융관계자는 ‘김 씨의 선행이 고객 사랑이라는 회사 이미지에 부합해 다양한 지원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룹 내 공익재단에서 사회적으로 선행에 앞장 서는 사람들을 도울 방안을 찾고 있다.’ ‘전화로 김 씨의 부친을 접촉한 정도이기 때문에 아직 확정된 사안은 없다.’ ‘그러나 서로 조건이 맞을 경우 특별 채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어려운 이웃들의 아픔을 돕는 따뜻한 손길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의 사랑의 실천으로 각박하게만 보이는 세상을 보다 살맛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5:16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을 밝고 행복하게 만드는 복 /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헬라어 ?λεο? 는 보통 ‘자비’나 ‘동정’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순한 자비나 동정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이 따르는 자비나 동정을 가리킵니다. ‘긍휼’은 어려움이나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 세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통해 긍휼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10:30-37의 기록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몹시 매를 맞고, 가진 것을 다 빼앗긴 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차례로 그 곁을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늘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들이었는데, 무슨 까닭이었는지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자비를 베풀지 않고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살려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다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어렵고 힘든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를 살리는 것이 긍휼입니다.
마태복음9:36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 말씀에 이어지는 마태복음9:37-10:15을 보면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이들을 위하여, 두 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 주소서” 하며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열 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어,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15:3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 말씀에 이어지는 마태복음15:33-39을 보면, 사흘을 굶어 허기진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또 한 번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고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올곧게 살아야 한다며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세상을 좀 더 밝게 하기 위하여,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긍휼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그만큼 밝아집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왜 우리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요?
1.우리는 누구나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먼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크고 작은 파도를 만나듯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크고 작은 시련의 파도를 넘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비교적 순탄한 목회를 해온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목회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세워졌고, 또 전능하신 성령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목회는 반드시 잘 될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교만한 마음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사랑하셨기에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목회자는 목회현장에서 뜻하지 않았던 일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로 하여금 14일 동안의 금식기도와 추운 겨울 예배당에서 혼자 철야기도를 드리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 일속에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어려운 형편에서 목회하는 동료목회자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긍휼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긍휼히 여길 때, 다른 사람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다른 사람들에게 강퍅하고,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잘못에 대하여도 지나칠 정도로 성질을 부리고, 칭찬에 아주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부족함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이 다른 사람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날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긍휼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누구도 완전하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 돕는 배필로 살도록 한 것이 결혼입니다. 서로의 부족을 보완하며 살게 하시려고 다른 사람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되지 못하고 된 것처럼 생각하고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빚어지는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용납하신 당신을 당신이 용납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까지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야합니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사실상 나의 연약한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아이들을 꾸짖거나 책망하기보다 격려하였습니다. 나를 용납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이야!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다면 반드시 극복될 수 있다.”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헨리 나우웬’박사는 긍휼은 인내로 이룰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긍휼의 길은 바로 인내의 길이다. 인내는 긍휼의 훈련이다. ‘긍휼’을 뜻하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com-patience‘로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것이 더욱 분명해진다.‘passion’과 ‘patience’라는 단어는 다 라틴어 '파티(pati)’에서 파생된 것으로 ‘고난’을 의미한다. 긍휼의 삶이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내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긍휼의 삶을 사는 길-긍휼의 훈련-에 대해 묻는다면, 인내야말로 바로 그 해답이다. 우리가 함께 인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없다면, 긍휼은 이룰 수 없다.”
2.긍휼을 베푸는 만큼 세상은 치유되고 아름다워집니다.
작은 개가 차에 치여서 도로 밖으로 던져져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의사가 그 개를 발견하고 그 개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을 보고는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개를 자세히 진찰한 결과 단지 약간의 상처와 찰과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사는 상처를 깨끗하게 씻겨주고, 치료한 후 임시 거처를 마련해 주고자 그 개를 차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개가 꿈틀대더니 바닥으로 뛰어내려 재빨리 도망쳐 버렸습니다.
“거 참, 배은망덕한 놈일세.”하고 의사는 중얼거리며, 치료해 준 것에 감사하지 않은 그 개에게 다소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개가 빨리 회복된 것이 기뻤습니다. 의사는 다음날 저녁때가 되자 그 일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밖에서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자 그 개의 옆에 다른 상처 입은 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개는 다른 상처 입은 개를 데리고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내 한 사람이 긍휼을 베푼다고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까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베푼 사랑에 배반이라도 느낄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내가 베푼 그 따스한 사랑만큼 세상은 따뜻해진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1:16-18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께서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람이 그 동안, 교회와 자신에게 베푼 사랑과 긍휼을 기억하고 그에게 주님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원컨대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만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은 정직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갈6:7,9,10)
‘오네시보로’는 믿음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곁에서 성심껏 도왔습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교회를 세우고 섬길 때부터 로마 감옥에 갇혀있던 동안에도 계속해서 도와온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내가 목회를 큰 실수 없이 감당하고 있는 것은 첫째는 주님의 은혜이고, 그 다음은 교회성도여러분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물론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마다 부족한 저를 위하여 정말 간절히 기도하여 주시는 그 기도의 힘이 목회현장인 이 교회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12:8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3.긍휼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에베소서2:4,5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죄인을 향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사랑에서 우리는 긍휼의 진원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히브리서2:17)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긍휼의 마음을 가지려고 하면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마땅히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긍휼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삶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습니다.
빌립보서1:8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한 여성도가 기독교신앙에 대하여 아주 적대적인 의사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그를 잘 대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사는 항상 교회에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의 집이 화재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와 그 가족에게 가서 위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성도들은 집안을 청소하고 벽을 깨끗이 하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의사의 아들이 천식과 기관지염으로 심각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낙담에 빠져있던 의사를 위해 목사님은 온 교회의 성도들이 그와 아이에 대해 많은 염려를 하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고, 성도들 또한 그의 가족을 위해 순번을 정하여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일을 나누어 담당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의사가 드디어 아내와 더불어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들은 나에게 결코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어려움에 처하여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와주었고, 염려해 주었고,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야고보서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오늘 우리 사회를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출처/최이우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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