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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담 안에서 죽었고 예수 안에서 살았다

by 【고동엽】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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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323쪽에 있는 글입니다.

 

 

17. 아담 안에서 죽었고 예수 안에서 살았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5장 12~21절

 

 

 

 

 흔히 이 세상을 가리켜 고해와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대부분 기껏해야 70~80년이란 짧은 한 생을 삽니다. 그것도 허다한 문제를 안고 고통 속에서 허덕이다가 끝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논하는 지혜자들이 많은 연구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해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는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왜 사람은 죄인인가?', '죽음은 어디서 왔는가?',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나 철학의 지혜를 가지고도 풀지 못합니다. 정치와 군사의 힘으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과학이나 경제가 제아무리 발전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한 분만이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들려 주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을 통해 시원한 해답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일별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먼저 아담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지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믿는 자와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를 바로 배우십시오. 진리 위에 바로 서십시오. 그러면 그 진리가 우리를 모든 불안에서 자유케 합니다. 우리를 모든 의심에서 자유케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본문을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가져온 아담의 불순종
 
 먼저 아담과 우리와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12절).
 
 여기에서 나오는 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성경을 그런대로 알고 계시는 분들은 금방 아담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 때문에 죽음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에 그를 에덴 동산 가운데 부르시고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처럼 준엄한 명령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까? 피조물의 위치가 창조자에게 비해 무엇이 다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신분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사람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만 자유할 수 있으며 그것만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임을 알게 하는 데 그 명령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은 하나님의 그 준엄한 명령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 자기 아내와 함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 3:19).
 
 그 시로부터 아담은 죽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인간 타락의 이야기는 조금도 거짓이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12절 중간에 나오는 "이와 같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란 '이런 식으로'라는 뜻이 아닙니까? 따라서 이 한 마디의 말은 대단히 중요한 결론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우리를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왜 아담에게 내린 형벌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내려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납득이 될 만한 여러 갈래의 해석들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아담이 받은 죄의 형벌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고 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또 아담이 범죄함으로 부패한 인간 본성을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아담이 죄짓는 것을 보고 그 행동을 모방해서 그 후손들이 스스로 죄를 짓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아담이 범죄할 때 우리도 함께 죄를 범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가장 합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해석마다 부분적으로 옳은 진리를 담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본문에 가까운 해석을 찾으라고 한다면 아담이 범죄할 때 우리도 함께 죄를 범했다고 하는 마지막 해석을 들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내용을 잠깐 살펴봅시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전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다'는 말씀은 단순 과거동사로 씌어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짓고 있는 죄나, 장차 범할 어떤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꼭 한 번 범죄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 범죄는 아담의 불순종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죄짓는 자리에 우리도 함께 있었고 공범자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19절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여기에서도 '죄인이 되었다'는 동사는 과거형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아담의 범죄가 우리의 범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린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씀에 자꾸 쓸데 없는 설명을 붙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담이 죄 짓는 자리에서 우리도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벌을 우리 모두가 똑같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서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악을 행하였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것은 행동 이전의 문제입니다. 숙명적으로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기보다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조상, 아담이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죄를 지을 때에 우리도 함께 그 자리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몹시 꺼리는 교리입니다. 더욱이 지적 수준이 높은 현대인들은 이 교리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노골적으로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파스칼이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이런 현대인의 심리를 정확히 갈파하고 있습니다. "원죄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는 이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이성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성은 자기의 방법으로 그것을 생각해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원죄의 증거 - 차별 없는 죽음
 
 그러나 우리가 이 교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뚜렷한 증거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성에 맞지 않는 교리라 할지라도 증거가 분명하다면 손을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뚜렷한 증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밤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13, 14절).
 
 이것은 어려워 보이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조금만 주의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명문화된 율법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굳이 법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양심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양심상 가책을 받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유일한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 이전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그 밖에 다른 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13절의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는 말씀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악을 행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7절을 참고하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탐심이 죄라고 규정한 법이 없는 세상에서는 욕심을 품었다고 해서 그것 가지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생겨 탐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다음에야 그것이 죄인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임하기 이전의 사람들은 욕심 내는 것 따위는 죄로 여기지 않을 만큼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몰랐기 때문에 죄의식이 약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 14절의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이라는 말씀을 봅시다. 이것은 모세 이전의 사람들이나 그 후의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모세 이전의 사람들이나 우리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아담의 죄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범한 죄는 자기를 불러 놓고 직접 하지 말라고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데서 다른 죄와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만난 일도 없고 그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일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담의 죄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논리로 따지면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장이 틀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든 없든 죽음이 우리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끌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아담이 죄짓는 자리에 자기가 언제 있었느냐고 항변하던 자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런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버티던 자들이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누구나 죽는 것을 보면, 우리가 아담과 함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니까요. 왜 사람들이 죽음의 벌을 받습니까? 죄를 안 지었다면 그 벌도 임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죽느냐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공범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영아가 가끔 죽는 일이 있습니다. 1, 2개월도 안 된 핏덩어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거짓말을 했나요? 남을 미워했나요? 눈을 한번 흘겨 보기나 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를 안 범했는데 왜 죽습니까? 오늘 이 본문에서 비추어 보세요. 해답이 나옵니다. 죄인이니까 죽는 것입니다.
 언제 죄를 범했습니까? 임신한 뱃속에서 범했나요? 아닙니다. 아담이 죄 지을 때 그 아기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누가 이 증거를 부인할 수 있나요? 죄를 안 지었다면 어린아이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죽느냐는 말입니다. 행위만으로 죄를 논한다면 안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사망'은 육적 죽음과 영적 죽음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은 영적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우리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죄인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범죄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출생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말이 옳습니다. "죽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우리 것이라 부를 것이 없다."
 우리에게 참 분명한 소유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평등하게 나누어 가지는 재산입니다.
 제가 확인한 적은 없지만 프랑스에 가면 황제가 사용했던 아주 작은 침대가 박물관의 유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황제가 왜 일부러 조그마한 침대를 사용했는지 아십니까? 누우면 죽을까 겁이 나서 기를 쓰고 눕지 않으려고 일부러 작은 침대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참 불쌍한 사람이지요. 세상의 어떤 영화나 권력으로도 죽음을 당해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대표성
 
 그러면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담과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와 같이' 하면서 동일한 죄인 취급을 하느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처음 창조하실 때 그를 자연적인 머리로, 인류의 대표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을 축복하실 때 그 축복은 아담만이 아니라 그 후손 전체에게 내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 28).
 
 이것은 아담 혼자서만 독차지하는 축복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그의 후손 전부가 받은 복입니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그가 차지한 위치 때문에 그가 행한 범죄도 그 후손이 함께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죄를 범하자 후손인 우리 역시 그의 공범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되자 우리 역시 사형수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담의 대표성에 대해 우리는 왈가왈부하면 안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을 피조물인 우리가 떠들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대표성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노아 가족은 방주에서 나와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결실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포도를 가득 수확하여 술을 담갔습니다. 포도주가 알맞게 익었을 어느 날 노아는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한 잔 두 잔 거듭하면서 그는 술 기운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는 꼴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술에 취한 사람은 여러 형태로 주정을 부립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사람, 부인을 두들겨 패는 사람, 자꾸 우는 사람, 아무 말없이 잠을 자는 사람 등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벌거벗는 형에 속했나 봅니다. 그는 만취해서 벌거벗고 드러누워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함이라는 아들이 집에 돌아와 벌거벗고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아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얼른 덮을 것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 몸을 가려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함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었는지 형제들에게 가서 "아이고 우스워. 아버지가 벌거벗고 누워 있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른 두 아들은 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는지 서로 의논을 하더니 큰 옷을 걸치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아버지의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노아가 술이 깨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세 아들이 한 일에 대해서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비의 벌거벗은 부끄러운 꼴을 이리저리 떠들고 다닌 아들 함이 괘씸했습니다. 그는 대노해서 함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를 저주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5).
 
 가나안은 함의 별명입니다. 노아의 저주가 함에게만 임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함에게 내린 저주가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큰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그는 함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일을 행하신 자로다"(시 106:21, 22).
 
 애굽에서 사는 사람들이 함의 자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함의 후손은 아프리카 족속입니다. 오늘날 역사적으로 볼 때 아프리카 사람들만큼 종의 종이 된 팔자가 또 있습니까? 노아의 저주가 함의 후손에게 그대로 응한 것이라는 사실을 빼고 무엇으로 이 역사적인 비극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과 대만 유학생이 말씨름을 벌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대만 학생이 "함이 누구냐 하면 바로 너희 아프리카 사람들이야"라고 하니까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이 화가 나서 "어떻게 우리가 함의 자손이야?" 하며 대들었습니다. 시편 106편을 제시하면 간단히 끝날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대만 학생이 좀 무식했는지 증거를 대지 못하고 계속 논쟁만 벌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함이 저주받았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성이 미치는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장안에 일본군 위안부 사건이 여론의 화살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가슴이 아프고 너무 부끄럽고 너무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런 치욕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침략자를 탓하기 전에 먼저 못난 우리 조상을 탓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명치유신 치하에서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1, 2차 산업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그때 우리 조상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나라를 부강시킬 노력은 하지 않고 껍데기뿐인 양반 놀음을 하느라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 조상은 일본처럼 근대화되어 가는 국제 정세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정신 빠진 조상을 두었기 때문에 꽃봉오리 같은 소녀들이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열두세 살 먹은 여자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직도 엄마 품안을 파고들어와 어리광을 부릴 나이가 아닙니까?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조상을 잘못 만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조상이 가진 대표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은 아담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죄의 전가' 라고 합니다. 조상의 죄가 우리에게 넘어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부인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아담과 우리 사이에 형성된 이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15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16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17절).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18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19절).
 
 이와 같이 아담은 우리의 대표요 우리는 그의 후손인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와 순종
 
 그러면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14절 끝을 보면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오실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아담이 인류의 대표인 것처럼 예수님도 새로운 백성의 대표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머리인 것처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머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은 여기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말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다'는 말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2의 아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절).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절).
 
 아담의 불순종이 그의 후손 모두의 순종으로 인정받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불순종하여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지만 제2의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순종하셨다'는 말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갈라디아 4장 4절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
 
 예수님은 한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이셨지만 우리 대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율법에 매이는 자가 되신 것입니다.
 또 주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여기에서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아버지께 순종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뜻대로 불순종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순종은 능동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불순종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 우리 대신 순종하셨습니다. 이 '대신 순종의 은혜'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우리는 순종한 것이 하나도 없이 순종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게 된 것입니다. 15절이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15절).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6절).
 
 "한 사람의 순종치 하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절).
 
 우리는 예수님의 '대신 순종' 때문에 의롭다 하는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21절).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죽음의 종이 아니라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아담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둘을 놓고 어느 한쪽이라도 의심을 하면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둘을 놓고 어느 한쪽이라도 의심을 하면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아담의 대표성을 의심하여 부정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가 되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우리의 관계를 의심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도 의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후손인 우리에게 정죄와 죽음이라는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듯이 그리스도의 순종은 믿음의 자녀 된 우리에게 칭의와 영생이라는 확실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사실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공식과 같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습니까?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죽었습니까? 예수 안에서 살았습니다. 한쪽이 확실하면 다른 한쪽도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 삽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설혹 내일 죄를 지을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의인의 신분으로 잘못을 범하는 것이지 죄인의 신분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거역이지 율법에 대한 거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에 죽음이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안으로 옮김을 받은 이상, 생명의 지배를 받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당신은 진실로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육신의 죽음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육신이 죽는 것을 '잔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육신의 생명이 떠나는 것은 영생으로 가기 위한 황금 마차를 타는 것입니다.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덧입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서 이 영원한 생명을 빼앗지는 못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우리 대신 자진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우리에게 임한 모든 저주와 형벌을 면제해 주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를 아담 안에 두지 아니하시고 생명 되신 예수님 안으로 옮겨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요. 얼마나 고마우신 주님이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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