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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편 121:1-8)

by 【고동엽】 2022. 9. 10.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편 121:1-8)

"싸운드·오브·뮤직"이라는 매우 고전적인 한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심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극 중에서 가장 긴장감을 자극시켰던 장면은, 배런·폰·트랲(Baron von Trapp)이라고 이름하는 한 오스트리아 해군장교가 세계 제2차 대전 초 히틀러 제국으로부터 군입대 소집통지서를 받자 자신의 조국을 탈출하여 스위스로 도망치는 장면이었습니다. 특히, 폰·트랲이 그의 새 아내인 마리아(Maria)와 자녀들과 함께 아내가 결혼전에 몸 담고 있었던 수녀원으로 몸을 숨겼을 때였습니다. 독일 헌병들이 그 곳으로 몰려와서 그들의 은신처를 샅샅이 수색할 때, 즉,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매우 절망적인 그 순간에 마리아가 애절하게 읊은 기도문의 한 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첫 절 말씀이었습니다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

라는 기도였습니다.

아마도 이 마리아의 머리 속에는 수녀원 뒤를 막고 서 있는 산들이나, 아니면, 독일,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국경선들이 맞물리는 알프스 산맥의 그 높고 낮은 푸른 언덕들 위에서 가족들과 손에 손을 잡고 흥에 취하여 요들 송을 부르며 자유의 품에 안겨 한껏 춤을 추는 자신의 평화스러운 모습이 자리잡고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눈을 들어 산들을 쳐다보면서,

내가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

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에 찬 부르짖음에 뒤이어, 폰·트랲씨는 기적처럼 수녀원 뒷문으로 빠져 나와 그의 가족을 이끌고 국경선을 넘어서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어느 푸른 언덕 위에 도달합니다. 마침내, 마리아는 그가 그토록 마음 속에 그렸었던 그 언덕들, 그 푸른 산등성이를 타고 치마를 나풀대며 내리 달리고 아이들도 춤을 추며 자유의 노래를 목청껏 소리내어 부를 때, 저 알프스 산맥의 온 산야는 아름다운 "싸운드·오브·뮤직"의 선율로 삽시간에 가득 매워지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마치 산들을 쳐다보며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는 한 젊은 여인의 애절한 기도가 마침내 산들을 감동시키고 그리고 그 산들이 감히 팔을 벌려 고운 노래의 여인, 마리아와 그의 가족을 품에 안아주어 나치 독일의 마수로부터 건져내어 주게 되었노라고 하는 매우 이색적인 종교 드라마 쯤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싸운드·오브·뮤직은 매우 감동적이기는 하여도 또 이 작품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한 논픽션이라고는 하여도,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폰·트랩의 새 아내,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마리아의 그 <산(山)을 향한 기도>와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저 산(山)들의 구원 응답>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인간 삶의 구조에 대한 이러한 문학적 응용은 과연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물음이 이 설교가 제기하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우리의 성서본문인 시편 121편 시인은 싸운드·오브·뮤직이 대답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대답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매우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시편 121편 시인은 이렇게 묻고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1절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절 :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

이 말을 하는 시편 시인의 참 뜻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물었으나, 그러나, 나의 도움은 산으로부터는 오지 "아니하고" Not from the hills! 오직, 천지를 지으신 야훼로부터 왔도다. But from Yahweh who made heaven and earth! 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또 다시 이보다 좀 더 쉽게 푼다면 그것은 또한 이러한 말이 될 것입니다.

내가 산(山)을 향하여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물었으나, 산들은 대답하기를, "산은 산일 뿐이다"라고 하고, 물들은 대답하기를, "물은 물일 뿐이다"라고 하였을 뿐, 나의 도움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분, 산과 물을 지으신 창조주 야훼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을 알았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산(山)이 우리의 도움을 주는 자, 물이 우리의 도움을 주는 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점에 있어서는 매우 단호하고 확고하였습니다. 즉 성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 그 산으로부터 그 무슨 구원이라는 것이 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고 난 후 곧, 이어서 <나의 구원은 오직 산을 지으시고 물을 만드신, 천지를 지으신 분, 야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라고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성서 이해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  성서는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와 같다.

이 말의 뜻은 이러합니다. 즉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만이 성서요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기 예수가 없는 "구유"는 단지 그냥 "구유"일 따름이며 그러므로 이 아기 예수가 "없는" 구유를 감히 성서라,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한다면 그것은 구유를 아기 예수로 생각하고 섬기는 "우상숭배"가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가 담겨 있지 않은 "구유"는 전혀 구원의 능력이 없는 단순한 하나의 나무토막이며 지푸라기일 뿐입니다. 성서도 이와 같습니다. "성서"도 또한 올바른 해석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향하여 증언되지 아니한다면, 성서의 그 문자는, 그리고 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그 문학은 그저 단순한 문자 자체, 또는 단순한 인간문학 자체 이상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즉 <살아있는 구원의 말씀이 되도록 해석되어야 합니다!> 문자 그 자체 또는 문학 그 자체가 구원의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성서를 한낱 마술서 또는 주술서로만 보는 모독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아름다운 금장색으로 치장하여 시렁 위에 잘 모셔 놓는다고 그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니요 또 성서의 내용을 무조건 많이 암기하고 있다고 해서도 또 그 내용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오늘의 세계 교회들이 앞다투어 성경공부반을 많이 만들어 프로그램화 하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도 성서를 바르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과 직접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러한 세계 교회들의 풍조를 감히 <교회의 위기>라고 부릅니다.

나는 감히 말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선포되었던 저 구라파와 미국 사회의 교회들이 이제는 그 힘을 잃어서 점점 쇄잔하고 또 교회 건물들은 점차 단지 기독교문화의 옛 유적지로 전락하여 화석화되고 있는 그 근본이유란 오늘의 서구교회가 성서와 만나되, 올바른 해석학적 노력을 통하여 만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는 일"은 하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하나의 불행스러운 현상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생명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기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산(山)을 쳐다보고 그 산(山)으로부터 그 무슨 나의 도움과 나의 구원을 기대하여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 산(山)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도움과 나의 구원을 기대하여야 합니다. 산은 산일 뿐, 산을 하나님이라고 신앙하여서는 안됩니다. 물은 물일 뿐, 물을 하나님이라고 신앙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늘은 하늘일 뿐, 하늘을 하나님이라고 신앙하여서는 안됩니다. 땅은 땅일 뿐, 비록 그 땅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여도 "땅"을 하나님이라고 신앙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산도 지으시고 물도 만드시고 그리고 하늘도 땅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 자신을 지으신 그 하나님 야훼로부터만 구원이 온다는 것을 믿고 그 분만을 신앙하여야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문자, 성서라는 책, 성서의 문학 그 자체가 곧 마술적 능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성서의 문자들에 대한 바른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 자신을 만나야 합니다. 성서를 통해서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으로 해석된 그 해석된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시인은 단호히 말합니다. <나의 도움은, 나의 구원은> 산으로부터 오지 않고 천지를 지으신 야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고 증언합니다.

결정적 포인트는 <천지를 지으신 야훼 하나님>입니다. 시인이 믿고 있는 하나님, 우리 기독교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관념적인 신(神), 문자속에 갇혀 있는 신(神), 인간종교가 만들어 놓은 신(神)은 결단코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산(山)은 물론이고 이 온 세계, 이 온 우주, 그리고 우리네 이 모든 인간을 모두 직접 조형하시고 조성하시고 잉태하시고 출산하시고 키우시고 양육하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이른바,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를 손수 빚어 만드셔서 세상에 내어 보내주신 그 어버이되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진정한 의미의 우리를 도우시는 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즉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우리를 지으신 이가 되시며, 또 우리 모두의 어버이가 되시는 그 분 하나님 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이시라는 것은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태도를 통하여 볼 때,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즉 창조주 하나님은, 본질상, 그의 창조물을 "지키시는 분"이시라고 우리의 본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어버이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그 낳은 자식을 끝까지 "지켜 보호하고 양육"하는 그 보호 본능에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본질상 그의 피조물을 지키고 보호하며 양육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 3절에서 8절 끝까지 모두 여섯 절에 불과한 이 시 속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열쇠가 되는 말은 "지키신다"는 말이라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는 결단코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야훼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야훼께서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도 너를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야훼께서 너를 지키셔서 모든 재앙을 면하게 하시며 네 영혼도 지키시리로다.
야훼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주무시기는 커녕 결코 한 순간도 졸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늘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 걸음을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낮의 해도 밤의 달도 해치지 못하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어머니 하나님은 모든 환난으로부터 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창조주 야훼께서는 우리의 모든 출입을 영원토록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산으로부터 오지 않고 창조주 야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성서는 산으로부터 구원이 온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이 온다는 것, 아니,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만인의 어머니이신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산을 보고 너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을 보고 너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보고 너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치권력을 보고 너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칼과 창과 활, 그리고 탁월한 마병과 군사력을 의지하여 그를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로,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수 있는 분이실 뿐이라고 말합니다.

1968년 2월 지금부터 30년전 혹한의 겨울이던 어느 날, 나이 만 28세의 젊은 청년 김이곤은 싸운드·오브·뮤직의 저 마리아처럼 남쪽 창을 열어 놓고 남녘 하늘을 가로막고 서 있는 저 산들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 "내가 산(山)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굳게 어금니를 물고 있는 나의 양 볼에는 각혈한 선지 빛깔의 핏덩어리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양 눈에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목구멍은 연방 솟구쳐 나오는 핏덩이들로 쉴 사이가 없었습니다. 이 사경을 헤매는 고통은 밤 늦도록 계속 되었고 나는 지쳐서 어머니 품에 온 상체를 모두 내 맡겨 놓은 채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울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울음 소리는 기도 소리였습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내 귀에 흐느끼는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니의 그 작은 품은 겨울인데도 어찌 그렇게도 따뜻하게 느껴질 수는 없었습니다. 며칠 밤을 그렇게 피를 쏟아내며 온 이부자리를 피로 물들이기까지 하였지만, 그러나, 어머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신 채, 아들의 생명을 끝까지 그냥 그렇게만, 그렇게만, 그렇게만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나의 도움이 산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되시는 그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시인의 그 신앙의 깊이를 비로소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따스한 보살핌과 지키심이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게 느껴올 때에만 비로소 우리에게 참 도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구약성서가 이끌어 들인 최상, 최대의 은유는, 그러므로, <어머니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잉태하시고 출산하신 천지 만물의 한 분 어머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즉,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친 어머니, 우리의 친 어버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지음받은 우리들이 감히 그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죄로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감히!!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할찌라도 자식인 우리가 뉘우치고 회개하기마 하면, 우리가 감히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인의 이러한 은유법은 정말 놀라운 구약신학을 도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야-훼"라고 불렀습니다. 이 "야-훼"라는 이름은 "그가 존재하게 한다" 즉 "그가 창조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야훼"라는 말은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권위있는 언어학자들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말씀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또는 "나는 나다" 또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번역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고 오히려 "나는 있게 하는 자다" "나는 존재할 것은 존재하게 하는 자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말하자면,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첫번째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은유는 야훼 하나님을 출 6:3에서는 "엘·사따이"라고 하였다는 점입니다. "엘·사따이"라는 말의 뜻은 일반적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번역하여 왔습니다만 그 언어의 원의미는 "젖가슴의 신"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관한 은유적 뜻 풀이를 구약성서는 젖가슴의 기능을 통하여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약의 신앙세계는 "젖가슴"의 기능을 전능의 기능으로 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야훼의 전능하심의 본질이 모성본질이라고 이해하는 구약신학적 인식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성적 창조주 하나님 야훼를 구약성서는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은유적 언어로 그 대표적 기본속성을 설명하고 또 표현하였다는 점입니다. "긍휼"이라는 히브리언어는 "라훔"이라는 언어이고 이 "라훔"의 어원은 "레헴"인데, 이 "레헴"은 자궁, 즉 산모의 자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기본 속성은 "자궁"이고 그 어머니의 "자궁"은 본질상 긍휼이라고 그들은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피조된 존재인 우리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을 구약성서는 야훼 하나님의 "긍휼" 본질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자궁과 젖가슴의 그 희생적 사랑을 구약성서는 "긍휼" / "불쌍히 여김"에서부터 찾았던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되 모성본능적으로 사랑하시는 그 분이, 그 전능자가 우리를 잉태하고 우리를 출산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 야훼이시라는 그런 말입니다. 즉 자식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자신을 못 박으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 어머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네 자식을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천지를 지으신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우편에서 우리의 그늘이 되어 주시는 분으로서 결코 졸지도 아니하고 결코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리의 도움은, 즉 절대 신뢰할 수 있는 우리의 도움은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의 모성애,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그 모성애, 즉 그의 긍휼로부터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진정으로 원하시는 분은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산으로부터 나의 도움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산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고 있더라도 그 산이 우리의 도움의 근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을 우리에게서부터 가리는 그 어떤 언덕이나 산은 우리의 주변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지식이나 심지어는 종교마저도, 교회마저도 우리의 눈을 가려서 참 하나님이신 야훼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감히 자신을 뒤 돌아다 본다면, 즉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삶을 우리의 신앙양심에 의하여 자기 비판해 본다면, 만일 그러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쌓인 자랑스러운 우리의 연륜이 연륜이 오히려 나의 참 도움이신 야훼 하나님을 가리는 바로 그 산이나 그 언덕이 아닌지를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산으로부터가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야훼로부터 옵니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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