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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출19:1∼6)

by 【고동엽】 2022. 9. 10.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출19:1∼6)


불확실한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절대 필요요건 세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건 심리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Three Needs' 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첫째가 Need of Significance 입니다. 중요성의 필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미의 문제요, 삶의 뜻의 문제요, 존재의식의 문제요, 보람의 문제요, 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보다 확실히 물질적으로는 여유가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옛날만큼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행복지수는 바닥으로 헤맵니다. 모두가 죽고싶다고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람을 잃어버렸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내가 정말 살아야 하나?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또 주위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의미가 있나?' 얘들이 크면서, 조금 크기 시작하면 어거지를 쓰고 울 때가 있지요. 일부러 사고도 내고. 왜요? '이 가정에 내가 얼만한 존재인가?'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요.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그걸 알고 싶은 거예요.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게 아니고 보람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보람이 없으면, 못사는 겁니다.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니고 숨을 쉰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올시다.

그러면, 나의 존재의 의미. 그것을 알고 깨닫고 그것을 확대 확장하고 그것을 높일 수 있을 때, 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의미가 커지고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거예요. 그럴 때 거기에 행복이 있고, 또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있는 것이올시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왜 비참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가 없는 것 같거든요.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난 귀찮은 존재 같아요. 벌써 정신적으로 그는 갔어요.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여러 사람에게 불편만 끼치고 있다. 자, 이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게 산 것입니까? 죽은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면,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조건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란 무엇입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 속에 내게 향한 사랑이 있고 나의 삶의 의미가 있고 내 삶의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유명한 윤리학적 명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나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웃이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엄청난 가치가. 거기에 나의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 하는 뜻이올시다.

또 하나는 Need of Security입니다. 안정성의 필요입니다. 불안을 싫어합니다. 위험을 싫어합니다. 위기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평안을 촉구합니다. 의식주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정신적 안정입니다. 이것을 찾지 못해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오락을 하고, 몸부림을 칩니다. 밤마다 댄스홀에서 발광하는……. 왜들 이러는 겁니까?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어요. 근심과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어요. 이 자유의식을 찾아서 저렇게 발광을 합니다만은 점점 더 무서운 함정으로 빠질 뿐이고 마음의 평안은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 술을 마신들, 술을 깰 때 가서는 더 비참합니다. 더욱더 비참합니다.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을 찾아 마음의 평안을 찾아 안정을 찾아 헤매는 이 모든 노력이 바로 이것과 같은 거예요. 다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그러면, 참 안정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발견할 때까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발견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내 존재를 발견할 때까지는 절대로 Security 라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만이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셋째는 Need of Belong입니다. 소속의 필요입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고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독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고독의 엄습되어 헤어날 길이 없어요. 소속을 잃어버렸어요. 내가 누구에게 속한 것입니까? 그래서 가정이다, 친구다, 공동체다, 그룹이다…… 하는 모든 문제가 바로 여기에 걸리는 겁니다. 소속감을 찾기 위해서. 소속의 확인을 위해서. 그런데 '내가 속한 그곳이 나의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부질없는 짓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되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큰 가정에 한 식구가 되었다고 하는 것, 그것 외에 참된 소속은 없습니다. 애당초 세상에 날 때부터 시작해서 그의 은혜 가운데 살았고, 그의 은혜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사역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 소속을, 본질적 소속을 분명히 하는 순간, 삶의 보람을 찾게 되는 것이올시다.

본문에 보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완전히 노예화 되어버린 그 백성을, 그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십니다. 그래서 큰 이적으로 구원해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 광야에서 훈련을 시킵니다. 교육을 시킵니다. 가나안 족속, 가나안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New Orientation을 시키는 그런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계시하고, 말씀하시고, 교육하시고, 훈련하시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인도하십니다. 그에게 뭘 묻는 것이 아니에요. 주도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인도하고,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설득을 하고 깨달을 때까지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머리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 밖에는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시고, 많은 사건에 부딪히게 하시고 '언젠가 알 것이다' 그런대요. 여러분, 우리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합니까? 때로는 아이들을 설득을 시켜서 '이것이 좋으냐, 싫으냐? 어떡하면 이것이 좋은 것이다, 저것이 좋은 것이다' 가르쳐 주지만은 그게 통합니까?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따라와." 그리고 저만큼 가서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내 나이 되면 알 것이다. 네가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면 내가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거 아닙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창조적으로 훈련하십니다. 이래서 창조적 훈련, 창조적 교육, 창조적 사랑을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신명기 32장 10절로 12절에 보면 모세의 마지막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광야에서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주 절실한 함축성 있는 깊은 말씀을 듣게됩니다. 이제 그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그렇게 이 백성을 인도했느니라." 아주 귀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독수리라는 것은 새 중에 왕입니다. 힘세지요 위엄있지요 자유롭지요 그리고 용맹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해할 자가 없습니다. 그가 날개를 쭉 펴고, 푸덕거리는 것도 아니고, 쭉 펴고 기류를 타고 하루종일 이렇게 하늘을 나는 것을 보면 정말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이 지구상에 48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둥지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아주 벼랑, 높은 바위산 벼랑에다가 둥지를 틉니다. 그리고는 그 둥지의 직경이 무려 2.7m나 됩니다. 둥지를 들어보면 무게가 2톤이랍니다. 그런 엄청난 큰 둥지를 만들어놓고 거기서 새끼를 낳고 기릅니다. 이제 그가 먹이를 향해서 아주 급강하 할 때는 시속 180km로 달린대요. 여러분 보셨습니까? 전 시골서 자라면서 많이 봤어요. 봄에 병아리를 키우게 되면 마당에 닭들을 많이 키우는데 아 이 독수리가 와가지고 좌우간, 우리가 농담으로 그랬습니다. 저놈들이 십일조 가져간다고 그랬어요. 그저 얼마나 많이 잡아가는지, 빙빙 돌다가 그대로 그냥 내려 꽂아가지고, 딱 부르 쥐고 하늘로 올라가면 도리가 없는 겁니다 이거는요. 그저 먹이로 얼마를 줄 수밖에 없어요. 이게 독수리입니다.

자, 그런데 그는 90Km 반경 넓은 곳을 자기 영역으로 하고 그 안에서 왕같이, 왕노릇 하며 사는 거예요. 자, 그런데 문제는 이 독수리, 오늘 본문에는 새끼를 훈련하는 이야기 나옵니다. 나는 법을 가르칩니다. 자유롭게 나는 법. 기류를 타고 하루종일이라도 날 수 있는 그 법을 가르치고, 또 강한 날개를 줍니다. 강한 날개가 거저 생깁니까? 이걸 알아야 합니다. 많은 시련 속에 얻어지는 거예요.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단련을 통하여 강한 날개를 줍니다. 또한 독수리로서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독수리로 독수리답게 사는 법, 사냥하는 법, 높은 곳에 집을 짓는 법, 모든 것을 일일이 전수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고요?

오늘 본문에 뚜렷이 나타납니다. 어지럽히며 새끼가 얼만큼 컸을 때 떨어뜨립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떨어뜨리면 이 새끼가 풀렁풀렁풀렁풀렁 날면서 푸덕거리면서 '아이고∼나 죽는다' 그러죠. 독수리는 멀리서 지켜봅니다. 거리를 재고 시간을 재면서 지켜보다가 땅에 딱 닿기 직전에 급강하 해가지고 탁 받아서 날개 위에 올려놓고 다시 올라갑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떨어뜨립니다. 또 이렇게 합니다. 수 없이 반복해서 강한 날개를 만들어 줍니다. 잘 날 수 있는 독수리로 키워 가는 것이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기는 위기일 뿐입니다. 독수리에게는 그 위기를 통하여 훈련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새끼에게 고통을 가합니다. 가혹할 정도로 고통을 가합니다. 그 새끼를 막 밀어서 땅으로 떨어뜨려요. 그때 그 새끼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어미는 날 왜 이렇게 괴롭히나? 날 죽일 작정인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손을 안 쓰면 손이 약해집니다. 발을 안 쓰면 발이 약해집니다. 눈을 안 쓰면 눈도 약해집니다. 머리를 안 쓰면 멍청해집니다. 결국은 힘이라는 것은 이렇게 강하게, 고통을 가하면서 얻어지는 것이에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요새 우리 가정에 아이들을 너무 과잉보호 해가지고 이게 바로 문제예요. 참 어느 때, 내가 책을 보면서 한참 웃었습니다. 신혼여행 간 아들이 신부한테 얻어맞고 엄마한테 전화 걸면서 "엄마……" 하고 운답니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전부 그대로 보호하고, 대신해주고, 대신해주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 모양이 되었거든요. 강하다는 것은 뭡니까? 홀로 서야되는 거고요 사건에 부딪혀야 되는 거고요 도전적으로 부딪히면서 배우는 거 아닙니까?

제가 늘 생각합니다만은 여러분,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요. 자전거 뒤에서 붙들고 있으면 자전거 배웁니까? 넘어지든 쓰러지든 무릎이 깨지든 간에 손을 놓아야지. 손을 놓고 밀어버려, 그냥. 그래야 자전거를 배우지. "야 너 무릎 깨진다, 목 부러지면 죽는다" 그러면 못배웠지요. 그러면 끝났지……. 안그렇습니까? 세상에 위험이 없는 게 어디있어요? 강하게 힘을 준다는 말은 내버린다는 말이에요. 제발 좀 버려두세요. 제발 좀 간섭하지 마세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요새 아버지 어머니들이 도대체 너무 간섭이 많고, 심지어는 나까지 괴롭혀요 전화 걸어가지고. "목사님,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어떻게……." 내가 간단히 그래요. "전화 끊습니다. 그만두세요" 끝, 이래버리고 말아요. 하도 기가 막혀가지고. 아 왜 그렇게 자꾸 쓸데없는 간섭을 하는 거예요? 얘들이 뭐, 결혼생활이 어떻고. 저들끼리 좀 싸우라고 그러세요.

원래 1년 동안은 전쟁이거든요. 싸워가면서 정이 드는 거지, 맞아가면서 사는 거고. 뭘 그렇게 야단합니까? 안그래요? 맞으면서 정드는 거고 다 그런 거예요. 뭘 그렇게 야단하고 벌벌 떨고… 안 죽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왜 이렇게들 쓸데없는 간섭을 합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데 독수리가 새끼를 가르치는 것처럼 고통을 가합니다. 가혹하게, 그리고 지켜봅니다. 멀리서 지켜봅니다. 시간을 재고, 거리를 재가면서 빙빙 돌면서 지켜보다가, 그런가 하면 절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급강하 해 가지고 날개에 얹어가지고 올라갑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는 시골서 자란 덕에 이걸 많이 보았거든요. 실감이 납니다만은 여러분, 상상을 해보세요. 이것이 사랑이에요. 그는 주도적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 새끼가 무엇을 원하는 가를 원치 않아요. 다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의 길이 아니고, 어미의 길로 his way, his initiative, 이것이 그를 주도하는 것이에요. 그의 길로 가르칩니다. 절대 안일하게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평안하게 하지 않습니다. 능력과 지혜와 사랑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훈련을 통해서 역경과 부딪히면서 견뎌나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소망을 이룬다. 그런고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확실히 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확실히 지혜가 있습니다. 그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며칠 전에도 이스라엘 대사하고 점심을 같이 하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강하고 참 지혜로운데 어디서 왔느냐?" 그러니까 "Expectation and hope" 소망, 소망이다. 그럼 소망은 어디서 왔느냐? 많은 고통에서, 많은 시련에서, 남보다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강해진다는 거에요. 그도 걱정을 하더만요. "우리 중학교 고등학교 아이들이 멍청해요." 그거 좀 가르치는 방법 없냐고. 우리도 고민이라고 제가 그랬어요. 왜요? 겪은 바가 없거든요. 어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제가 옛날에 혼자 나와서 고학을 하고 지낼 때, 배고플 때가 많았어요. 어쩌다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든가 하게 되면 그 밥을 이렇게 퍼주는데 지금도 이렇게 생각이 나요. 여러 그릇 중에 제일 큰 그릇, 조금이라도 밥을 더 넣은 것, 그것이 내게로 왔으면 좋겠는데 그 달라고는 못하고, 기다리다가 그것이 내 차례로 오면 '오늘은 좋은 날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홀로 서고 사건에 부딪혀서 이것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나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지혜요 나로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이 강한 것은 남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그 지혜를 얻은 것이에요.

여러분, 한국, 우리 인구가 얼마입니까? 이 좁은 땅에……. 우리가 강합니다. 각 나라에 가서도 제법 다 잘 살아요. 어디서 왔느냐고요? 간단합니다. 6·25를 겪었거든요. 6·25를 겪었어요. 그 전쟁이 우리로 하여금 이만큼 강인하고, 이만큼 지혜롭고, 오늘 같은 IMF같은 큰 사건도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체질이 된 것이죠. 하나님은 이민족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잘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제사장은 바로 영적 대표자요 지도자요 치유자요 구속하는 자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든 민족을 대표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카프만 부인의 '광야의 샘'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그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누에고치를 들여다보니까 누에고치의 구멍이 직경 한 2mm 정도밖에 안되는 구멍이 빠끔 뚫립니다. 구멍이 뚫린다고요. 그래 보면은 거기서 그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서 나오려고 합니다. 몸부림을 칩니다. 흔들흔들 합니다. 그거 애쓰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천신만고를 하는 거예요. 애쓰고, 그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그래서 카프만 부인이 '내가 긍휼을 베풀어야지'하면서 가위로 잘라서 구멍을 넓혀줬다는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그렇게 편안하게 나온 나비는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더랍니다. 그는 가위로 자르면서 그랬대요. "내가 하나님보다 자비가 더 많다" 그랬대요. 그랬더니 그건 죽었어요. 그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동안에 비로소 그 영양이 온 날개로 뻗치는 거예요. 온 몸에 근육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강한 마찰과 함께 전체 체력이 강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남는 건데 제가 뭘 안다고 구멍을 넓히고 편하게 나오게 했더니 '그만 내가 나비 하나를 죽여버렸다' 하고 뉘우쳤다는 거 아닙니까?

때때로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까? 왜 이러해야 되나? 믿으세요.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내게 향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건마다 이 사건들을 통하여 더 높은 길로, 더 바른 길로 더 강한 세계로 인도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믿고 순종하고 따르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십시다.

출처/곽선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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