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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의 낙심과 회복(2) (왕상 19:5-18)

by 【고동엽】 2022. 9. 10.

하나님의 사람의 낙심과 회복(2)  (왕상 19:5-18)  

I. 실패한 자리 -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저승에 간 몇 영혼들이 염라대왕과 함께 이 땅에서 자신의 시체가 장례되어지고 가족들이 통곡하는 장면을 함께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염라대왕이 저승에 간 그 영혼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땅에서 자네들의 장례식이 지금 집례되고 있는데 어떤 말 듣기를 원하느냐?” 한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자상한 아버지였다. 이 땅에서 우리가 존경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분은 우리 아버지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울고 있던 아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자상한 아버지였고, 이 땅에서 존경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분이었다.”

두 번째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비전에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싶소.” 한참이나 울고 있던 자녀들이 얘기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명과 비전에 신실하고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말을 듣고 싶소?” "네. 제가 듣고 싶은 말은 딱 한 마디입니다. 어! 우리 아버지가 움직인다. 살아나셨다!”

넘어진 사람의 소원이 있다고 한다면 일어나는 것일 것이고, 낙심한 사람들의 소원이 있다고 하면 회복하는 것일 것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낙심과 회복」이라는 제목으로 그 첫 번째 말씀을 들었습니다.

첫째, 인생의 고독과 낙심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둘째, 엘리야의 낙심의 원인은 외부적 환경에서 온 것이라기 보다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본 것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하면 여학생들 가운데 질겁하고 팔짝팔짝 뛰고 안달하는 사람 몇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왜 쥐를 그렇게 무서워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부모님들 가운데 죄에 물려 죽으신 분들이 계십니까?

부엌에 바퀴 한 마리가 나타나면 온 가족들이 야단법석을 떱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바퀴벌레에 물려 돌아가신 분이 계십니까? 징그럽다고 말합니다. 왜 징그럽습니까? 우리의 시각이 그럴 뿐입니다. 우리의 관점일 뿐입니다. 멋있게 볼 수 있는 남편을 아내를 왜 그토록 못마땅하게 생각하십니까? 한없이 존경할 수 있는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왜 여러분들의 불평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소중한 자녀들이 왜 가정에서 그렇게 불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셋째, 엘리야는 한번의 실패를 영원한 실패로, 부분적인 실패를 전체적인 실패로, 작은 실패를 큰 실패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실패를 하늘의 실패로 생각했습니다. 실패했다고요? 이제부터 오히려 승리가 펼쳐집니다.

지난주 마지막에 들려 드렸던 예화를 기억하십니까?

동네 꼬마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지요. 그 야구 시합을 구경하던 어느 신사가 1루 베이스에 있던 아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지금 점수가 어떻게 되니?” 아이는 대답합니다. "14대 0으로 우리가 지고 있어요.” 신사가 말합니다. "그런데 너는 전혀 절망스런 표정이 아니구나?” 이 아이의 대답을 기억하십니까? "절망이라뇨? 우리가 왜 절망해야 하죠? 우린 아직 한번의 공격도 안했는데요?”

자 여러분, 지금까지 엘리야는 14대 0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엘리야는 승리했습니다. 낙심과 절망이라는 괴물과 싸워 당당하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영광스런 회복을 오늘 우리도 보게 될 것입니다.

숯과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이 탄소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똑같은 원소가 하나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시커먼 숯덩어리가 됩니다. 여러분은 문제라는 탄소를 만났을 때 낙심이라는 숯덩어리를 만들 수도 있고 회복과 영광스런 승리라는 다이아몬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캬라스키야를 K.O. 시켰던 홍수환 선수를 기억하시지요? 4번이나 다운을 당했지만 다섯 번째 일어나서 기어코 상대를 KO로 때려 눕혔던 4전 5기의 신화를 낳은 사나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의 삶이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실패했다고 몇 번 넘어졌다고 그대로 주저앉으면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다면 그럴 수 없지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어느날 서재에 앉아 깊은 낙담에 빠져 우울해 하고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를 깨끗하게 하려고 왜곡된 복음을 바르게 전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깊은 낙심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부인이 상복을 입고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루터가 이상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누가 죽었소?” "하나님이 죽으셨어요.” 루터는 기가막혔습니다. "아니 당신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요? 하나님이 어떻게 죽으실 수 있단 말이요?” "저는 당신이 하도 낙심해 있고 우울해 하길래 하나님이 죽으신 줄 알았어요.” 그제서야 루터는 자신의 믿음없는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지금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루터는 다시 용기를 내어서 종교개혁운동에 더 큰 열정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낙심하며 넘어질 때가 있고 절망의 깊은 수렁에 빠져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요. 그때 하나님은 이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 다시 일어나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교훈을 오늘 본문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엘리야가 어떻게 이 낙심의 수렁에서 헤쳐 나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 이처럼 처절하게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알아 보고자 합니다.

II. 하나님이 하신다.

엘리야는 어떻게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우선 인간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수탉 한 마리가 동물농장에 살았습니다. 아침만 되면 이 수탉은 태양을 뜨게 했습니다. 즉 아침마다 해를 솟게 했습니다. 적어도 이 수탉은 자기가 해를 뜨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이 수탉은 일찍 일어나서 사명을 가지고 축사 지붕 꼭대기에 날아 올라가서 꼬기오 꼬끼~ 하면서 몇 번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곧 태양이 솟아오르는게 아닙니까? 아침마다 축사 지붕 아래의 땅에 있는 동물들은 수탉에게 고맙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동물들은 수탉에게 "태양을 다시 뜨게 해 주어서 고맙다”라고 말하거나, "수탉아, 너는 정말 멋진 일을 해! 너는 태양을 뜨게 했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수탉은 가끔 ‘만일 내가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그러면 누가 태양을 다시 떠오르게 한단 말인가? 만일 아무도 태양을 다시 뜨게 하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만일 태양이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온 세상이 캄캄해지고 추워질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된 후에는 풀도 다 죽고 나무도 다 죽게 될 것이 아닌가? 그것뿐이겠는가! 곧 농장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죽고 말겠지?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매일 아침 축사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울어야 돼!'

수탉은 이렇게 혼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탉이 늦잠을 들었습니다. 수탉은 그 전날밤에 파티에 갔다가 너무 늦게까지 머물렀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수탉이 태양을 뜨게 하도록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수탉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수탉이 늦잠을 잤는데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솟아올랐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다른 동물들은 수탉에게 화를 냈습니다. 「속았잖아. 우리는 수탉이 해를 뜨게 하는 줄 알았잖아.」

흔히 우리는 어리석은 수탉처럼 내가 마치 우주를 운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하고 내가 잘못되면 천지 개벽이라도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업도 다 내가 하고, 다 내가 먹여 살리고 자식들도 내가 다 만들고...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것을 미쳐 깨닫지 못했을 때 작은 일에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내 손이 미치지 못하면 이제 세상 끝났다. 죽어버리자. 이렇게 됩니다. 조금만 잘되면 교만해 집니다. 내가 아니면 모든 것이 안되고 내가 잘못되면 만사가 끝장 날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계십니다. 고통도 영원하지 않으며 승리도 영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손 안에 달려 있습니다.

시편 30:4-5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아무리 절망스런 느낌이 덮쳐와도 그 느낌에 굴복하지 마시고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십시오. 절망적이라구요? 그것은 내 생각일 뿐입니다. 내 느낌일 뿐입니다. 내 시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엘리야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끝을 보면 엘리야가 다시 일어나 힘차게 하나님이 명하신 길로 달려가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엘리야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엘리야처럼 멋진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드십시오. 승리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어떻게 이 멋진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III.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다.

낙심한 엘리야를 돕기위해 하나님이 취하신 첫 번째 처방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곤하고 지친 그에게 음식과 휴식을 안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져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병 물이 있더니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왕상 19:5-6)

엘리야는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서 엘리야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허기진 엘리야에게 음식과 시원한 물을 주었습니다. 먼저 설교부터 하실 것 같은데 아니면 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나무라실 것 같은 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육신적으로 회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실패하고 절망에 빠져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있는 상태로 마음에 응어리가 맺힌체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엘리야를 잠에서 깨우며 어루만졌습니다. 이것이 "부드럽게 주물러 풀어주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엘리야의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 응어리가 맺힌 마음,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때가 없어 어찌할 줄 모르는 그 답답한 마음, 자기 학대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그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 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시간 몸이 굳어져 있습니까? 마음에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경직되어 있습니까? 자비로우신 우리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어루만져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도 손을 내밀어 주님을 만지는 시간이 되십시오.

손 내밀어 주를 만져라 주 지나신다
너의 애타는 외침을 주 들으시리
주님 너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리
손 내밀어 주를 만져라 주 지나신다.

어떤 책을 읽다보니까 의사들이 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자살을 기도하다가 응급실에 실려오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에게 음식을 주는 일입니다. 대체로 고기를 먹이지요. 그들은 몸에 축적된 단백질의 양이 낮은 상태입니다. 그들은 대게 2-3일을 제대로 먹지 않고 지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단백질의 양이 낮기 때문에 에너지 레벨이 낮고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이 높아집니다.”

남자들이 직장생활이 힘들어 질 때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직장 간판도 보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가정 살림에 너무 지칠 때 설거지조차 하기 싫은 것입니다. 빨래를 보기만 해도 싫습니다. 남편의 내의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납니다. 남편이 공연히 미워지기도 합니다. 왜 남편이 미워져야 합니까? 미운건 빨랜데.. 그 정도로 살림에 지쳤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너무 깨끗하게 해 놓고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 예배당을 짓는데 짓는 과정속에서 너무나도 기뻤고 잠을 안자도 행복했고 밥을 먹지 않아도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당을 다 짓고 나니까 IMF가 터졌습니다. 순간 탈진이 찾아왔습니다. 벽돌장도 쳐다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오는 대신에 교인들 방문하기도 했고 집에서 책을 읽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배당 건물자체가 보기 싫었습니다. 여러분 그토록 영광스러운 우리 가족들을, 영광스러운 주님의 성전조차도 우리가 탈진에 빠지고 나면 잃게 되는 것입니다.

골치 아픈 일이 있습니까? 낙심되는 일이 있습니까? 고통스런 일이 있습니까? 만사가 귀찮고 피곤하십니까? 그러면 만사 제쳐놓고 한잠 푹 주무십시오. 잠은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잠은 인생을 치료하는 보약입니다. 그리고 육신적인 영양공급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책망을 하지 않으시고 잠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학대하거나 과로시키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건강관리에 실패하여 영적으로 손해를 보고 그것이 신앙적인 실패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회사의 직원처럼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어머니가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식탁을 준비하듯이 피곤에 지친 엘리야를 쉬도록 하고 음식을 먹이고 잠을 재워 주셨습니다.

IV. 네가 왜 여기 (낙심하여) 있니?

그런 후에 하나님은 두 번째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잊혀진 엘리야의 사명을 새롭게 일깨워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지친 몸을 회복시키신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8절입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하나님의 산 호렙은 시내산을 의미합니다. 시내산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입니다. 엘리야 시대로부터 600년전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시고, 그와 만나 직접 대화하시고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과 함께 언약을 맺으셨던 바로 그 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던 그 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사명을 안겨 주셨던 바로 그 장소, 그곳이 하나님의 산 호렙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산 호렙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곳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엘리야가 어디로 들어갔습니까? 그냥 보통 굴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에 유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번역이 잘 된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굴을 가리키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냥 굴이 아니라 "그 굴"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정관사를 붙이는 것은 이 굴이 전에 한번 나왔던 어떤 굴을 다시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느 굴을 말합니까? 출애굽기 33장 21-23절에 나오는 굴같이 생긴 한 구멍, 그 굴을 말합니다. 거기에 보면 반석의 갈라진 틈이 나옵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모세와 대면하실 때 모세에게 그 굴속에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중에 임재하시고 지나갈 때에 내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내 영광의 등은 보리라고 하시면서 특별히 모세와 만나주셨던 그 장소입니다.

거룩한 그 장소, 바로 모세와 직접 만나주시고 그리고 모세에게 직접 사명을 주셨던 그래서 모세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쳐 주셨던 그 장소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오늘 본문 9절과 13절에서 하나님은 같은 질문을 엘리야에게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How are you?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가 아닙니다. Where are you? 너 왜 여기 있니? 너 왜 낙심하고 있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바로 이것이 본문의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아니, 우리들에게 질문하는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네가 왜 지금 그 자리에 있느냐? 그 낙심하는 자리에 있느냐? 왜 좌절하며 앉아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절망의 자리, 낙심의 자리, 좌절의 자리, 그 자리는 엘리야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낙망의 자리, 그 곳은 여러분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좌절과 실패의 자리, 그 곳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어야 될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악마는 자기가 실컷 써먹은 낡은 도구 몇 가지를 경매에 붙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진열된 물건 가운데는 증오, 질투, 거짓말 그리고 교만을 포함한 몇 가지 도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 아주 높은 고가의 물건 하나가 전시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사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절망입니다.” "그까짓 낡은 무기가 왜 그토록 비싸게 값이 매겨져 있습니까?” "이 절망은 가장 오래도록, 가장 많은 사람을 쓰러뜨린 효과적인 무기이기 때문이죠.”

혹시 우리 가운데에도 이 절망의 무기에 공략 당하신 분이 아니 계십니까? 절망의 무기에 한방 맞고 비틀거리는 엘리야를 하나님이 붙드십니다.

10절을 말씀을 보십시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그 순간 세찬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술만큼 강한 바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 강한 바람 속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온갖 죄악들을 한번에 날려 버릴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기대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엘리야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은 그 바람 속에 아니 계셨습니다.

이번에는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그 옛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던 고라 일당이 땅에 지진이 나 갈라지는 바람에 그 속에 다 묻혀 버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 악의 무리들이 단숨에 땅에 삼켜지게 하시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생각과는 달리 그 지진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큰 불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불로 나타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을 사른 것처럼 어서 불이 내려 저 악한 무리들, 이 악한 세상을 빨리 심판했으면 하는 것이 엘리야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간 후 엘리야는 들릴 듯 말 듯한 세미한 소리(히브리어 원문에는 아주 작은 바람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무나 작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습니다. 침묵의 소리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엘리야 자신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중에 계셔서 엘리야를 만지셨습니다. 우리는 원수들을 불과 바람으로 심판하고 지진으로 묻어버리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세미한 음성으로 나를 만지시고 나를 바꾸시고 나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엘리야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불로 세상을 뒤집고 바람으로 엎어버리시고 지진으로 묻어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세미한 말씀으로 그 자녀들을 바꾸어 가시는 구나' 하나님이 은밀하게 행하시기에, 하나님이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하시기에, 위선자들은 하나님은 아니 계시다고 속아넘어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조용히 은밀하게 역사를 움직여 가시는 그 손길을 느끼며 삽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요란하시지 않습니다. 은밀하십니다.

아침에 태양을 솟게 하면서 괭과리 치고 태양이 떠오르게 하시든가요?
아침에 이슬이 내리는데 나팔 불고 소리지르며 이슬이 내리든가요?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조용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단을 사를 때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미한 바람속에 계실 때는 오직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경배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은 바람보다, 불보다, 지진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바람소리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너무 두려워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미한 소리 듣지 못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위기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낙심할 때도 이와 똑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낙심을 하는가? 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절망에 빠지게 되는가?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릴 때 그렇습니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잃어버릴 때였습니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사람은 승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미한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나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내 소리가 커집니다. 세상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심지어 마귀 소리가 들립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들려오는 조용하고도 세미한 음성이 있습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지금 승리의 정상을 향해 달려야 할 당신이 왜 실망과 낙심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Where are you? 너 왜 여기 있니? 네 자리는 여기 실패의 자리가 아니야! 너는 결코 패배로 끝나야 할 존재가 아니야. 지금 그 자리는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니라. 복된 자리로 가려무나.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V. 바로 당신 곁에 당신을 돕기 위한 손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귀한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동역자들을 주신 것이지요. 18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까요? 그것은 엘리야가 낙심한 이유중의 하나가 외롭게 싸웠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이 물으실 때에 엘리야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하나님,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엘리야는 열심이 지나치다 못해 특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말을 계속 들어 보십시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단을 헐어 버렸고 이제는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엘리야는 이 말을 10절과 14절에 걸쳐 두 번씩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말합니다.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까? 하나님의 선지자가 엘리야 혼자만 남았습니까? 이것은 사실이 아니였습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요! 엘리야도 자기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바댜라는 사람이 두 개의 굴속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50명씩 숨겨 놓고서 물과 음식을 갖다주고 있었다는 것을 엘리야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는 혼자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엘리야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니 엘리야는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가 아니였습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상태가 자기 혼자라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이 병속만 들여다 보면 온 우주가 병만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실패에 집중하다 보면 모든 것이 실패로 보입니다. 엉뚱한 일에 집중하다 보면 만사가 뒤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둑을 무던히도 좋아하는 장로님과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이 설교준비를 하는데 장로님이 "목사님 바둑 한판 두시지요?” 한판이 두판이 되고 두판이 열판이 되어서 토요일 밤을 지새웠습니다. 목사님이 정신이 멍해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는데 기도 한번하고 나면 시작하는 기도인지 끝나는 기도인지 왔다 갔다 합니다. 설교를 하는지 마는지 마지막 축도를 하는데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그랬는데 교인들이 새까만 바둑알로 보입니다. 축도를 하는 건지 바둑을 두는 건지 비몽사몽간에 "있을지어다~” 그래 놓고 바둑 두는 걸로 착각했습니다. "아멘”하고 교인들이 "아멘”해야 되는데 "∼있을지어다. 아다리~”

세상 천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나 밖에 없어. 이 세상에 이런 문제를 가진 가정은 우리집 밖에 없어. 어느 가정이 우리처럼 어려울까? 직장문제 때문에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말할 필요도 없다고 말해야 소용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외로움과 고독 속에 파묻어 버립니다. 이것은 자기 연민, 자기 동정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이런 고독에 빠져들어야 하지?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실패의 순간에서도 자기 의를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조그마한 감기 한번을 들어도, 내 가족을 내가 먹여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야. 나 혼자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이런 감기가 찾아온 것이야. 자기 의를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지만 누구나 다 혼자라고 말합니다. 한방에서 잠을 자는 부부이지만 서로 혼자라고 생각합니다. 한 지붕에서 함께 사는 가족들이지만 모두가 다 혼자 고독해 합니다. 아니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미명아래 모였지만 서로가 믿음의 식구들이 되지 못하고, 동역자들이 되지 못하고, 각각 고독한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외롭게 고독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족이 되고 공동체가 된 목장안에서 마져 마음 문을 닫아 걸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혼자입니까?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과연 여러분 혼자입니까? 그런 어려움이 있는 가정이 여러분의 가정입니까? 직장에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여러분 하나입니까? 아니, 여러분 혼자서만 그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섬깁니까? 여러분 밖에 없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과 똑같이 다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문제, 여러분 혼자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자녀들, 다 나름대로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혼자라고 생각하세요.

교회! 외로운 신앙생활이라고요? 왜 혼자서 그렇게 외롭게 신앙생활 하십니까?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다 함께 모인 신앙의 동지들이고 믿음의 동역자들입니다. 믿음의 가족들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가 자기 연민과 자기 동정에 빠져서 나 혼자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느냔 말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빠지기 쉬운, 가장 흔한 시험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마치 나 혼자인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교인들이 이렇게 따라주지 않을까?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줄까? 왜 이렇게 헌신을 하지 않고 왜 이렇게 순종하지 않을까? 왜 이토록 결정적인 헌신을 하는 사람이 없지? 왜 교회에 주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 이토록 부족할까?' 자기 착각에 빠지는 거지요. 자기 의에 빠져들 때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지금 엘리야의 마음입니다. "주여 내가 당신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열심이 특심인 사람이 특히 이런 착각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거늘" 저 혼자 다 한다는 거예요. 저 혼자만 가정을 이끌어 가는 착각을 하고, 저 혼자만 교회일 다 하는 착각을 하고, 이런 착각 속에서 자기 동정과 연민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만연된 이 문제점, 인생의 문제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 말고도 7000명, 7×1000명의 사람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7000명의 선지자들을 남겨 놓았다."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 말고도 이 아합의 함정 속에서도 이 핍박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7000명이나 있다."(7은 완전수요, 1000은 한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혼자인 것처럼 고독에 빠져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믿음의 동역자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다고, 내 남편, 내 아내, 내 아이들, 내 어머니, 아버지가 다 나와함께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을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동역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손길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 7000명 말고도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아닙니까? 엘리사라고 하는 동역자 말입니다.

지금도 옆에 계신 그분들이 모두 천국의 가족입니다. 나 혼자라고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모두가 붙들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참으로 놀라운 동역자가 있다는 사실 아니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한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그 순간에도 언제나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붙들어 주는 능력있는 한 팔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전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버릴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사방, 팔방으로 흩어져 도망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로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구요?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곧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느니라"(요16:32)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을 향해 가면서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외로움에 울지 않았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손을 붙잡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났지만 그분만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엘리야처럼 죽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칠 수 있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신다. 성령의 권능이 나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님의 권세가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 곁에 계시고, 내 손을 붙드시고 나와함께 인생의 걸음을 함께 해 주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할렐루야!

VI. 그 까짓거 때문에 포기하다니!

일제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양정신은 어린나이에 진달래를 꺾다가 눈이 찔리는 바람에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교회학교에 나가 기도했고 마침내 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여자의 몸으로 장님이 되어 나라를 잃은 그 시절에 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일은 다 이겨낼 수 있었는데 해부학만큼은 감당키가 어려웠습니다. 개구리나 쥐를 잡아 해부 연습을 하는데 한번은 배를 갈라놓은 개구리가 펄쩍 도망을 갔습니다. 너무 징그럽고 놀라 주임교수를 찾아가 공부를 포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주임교수가 했던 말 한마디 때문에 양정신은 입술을 깨물고 일어나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마침내 목사가 됩니다. 주임교수는 양정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정신! 가에루네 마께데 가에루까?" "양정신! 개구리 한 마리한테 지고서 돌아가겠는가?" "양정신! 개구리 한 마리한테 지고서 포기하겠는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이 한 권의 책은 짦막한 인생을 살아가는 순간순간에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되었던지요. 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 싶을 때에, 등록금이 없어서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 때에 "영모야, 가에루네 마께데 가에루까?" 그까짓 거한테 지고 인생을 포기하겠는가? "가에루네 마께데 가에루까?" 그 까짓 거한테 지고 내 인생을 져버리겠느냐? 내 꿈을 접어버리겠느냐?

김 집사님 - 그 까짓거 때문에 포기하시겠습니까? 성도님 - 그 까짓 거 때문에 좌절하시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눈을 크게 여십시오. 하나님이 당신 곁에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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