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30.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by 【고동엽】 2022. 9. 8.
목록가기
 
 

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233쪽에 있는 글입니다.

 

 

30.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도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9장 6~33절

 

 

 

 

 옛날에는 대부분 자녀를 많이 낳아 키웠습니다. 7,8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키우느라고 한평생 고생을 하신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가끔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애써 키웠는데도 늘 불평만 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별로 사랑해 주지 못했는데도 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자식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한 지붕 아래서 자랐지만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자식이 있고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 있듯이,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있고 은혜를 모르는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늘 감사하며 감격하는 삶을 살지만, 은혜를 모르는 자는 불평과 불만 속에서 일그러진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 두 부류의 신자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문 9장 6절 이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따라 은혜를 아는 사람, 혹은 모르는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선 우리가 읽은 본문의 요지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당신 마음대로 사랑하기도 하시고 미워하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신 자는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셨지만 미워하신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기준과 근거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무 근거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싶으셔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9장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의 요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납득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기분이 썩 좋지를 않습니다. 뭔가 따지고 싶은 생각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독특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은혜를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데 매우 적절한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본문 말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깨달아야 정직한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명적 선택과 구원적 선택
 
 우리가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자기 동족이 예수 믿지 않는 것 때문에 큰 고통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족의 구원 문제를 놓고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대체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이 문제를 놓고 깊이 고심한 결과 답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6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6절)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예수를 대적하고 믿지 않아도 택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이었고 또한 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계속해서 예수를 배척하고 있는 현실을 놓고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싶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는 구약을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그 결과 얻은 해답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같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첩으로부터 첫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노년에 본처의 몸에서 이삭을 얻었습니다. 둘 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 난 정상적인 후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은 버리고 이삭은 택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시는 자가 있는가 하면, 택하시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깨달은 놀라운 진리였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3절).
 
 이번에는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렇게 갈라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미워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미워해서는 안 될 사람을 고의로 미워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야곱을 사랑하신 반면 에서는 사랑하시지 않았고, 야곱은 불쌍히 여기셨지만 에서는 불쌍히 보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는 은혜를 주셨지만 에서에게는 은혜를 안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워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도 우리는 바울이 깨달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자료를 토대로 해서 살펴보면,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버림받은 자가 구원받은 자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이후의 역사, 즉 지난 2천 년 동안 이스라엘이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아도 그들 대부분은 구원받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거역하고 율법에 매달리다 결국에는 망한 사람이 구원받은 자보다 몇 배로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민족 단위로 선택하신 것은 개개인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시려고 따로 불러 세우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명적 선택과 구원적 선택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기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혈통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오시는 그 중차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민족 단위로 택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택이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모든 사람의 영혼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울 왕을 보아도 잘 알지 않습니까?
 사울 왕은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명을 위해서는 선택을 받았지만 그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도 자기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은혜가 따라야 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27절).
 
 여기서 "남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선택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숫자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남은 자만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남은 자들이 택함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 그 나머지가 버림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서와 야곱 두 쌍둥이를 놓고 지금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11절).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근거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유일한 근거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택하시는 근거였습니다. 좀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그저 좋으셔서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뱃속에 있을 때 선과 악을 행했나요? 그런 것과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이 무조건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버리셨습니다. 그들이 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선택에 있어서 유일한 이유입니다. 이것밖에 납득할 만한 다른 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시뇨?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저 좋으셔서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셨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인간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다루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하나님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14절).
 
 하나님께서 좋으신 대로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셨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는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을 가지고 불의니 불공평이니 하는 평가를 내릴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좋다고 생각하시면 모두가 선이요 의로운 것이 됩니다. 15, 16절에서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달음박질한다'는 말은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15, 16절 말씀은 하나님께 잘보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좋으셔서 선택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내 것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무슨 말이 많아?" 하고 반문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창조자가 어떻게 다루어도 탓할 수 없는 피조물임을 안다면 하나님의 처사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의 것이니까 그분 마음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또 하나 예를 더 들고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17, 18절).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지 않으려고 끝까지 버티었습니다. 그는 열 가지 재앙이 임해 나라가 쑥대밭이 될 때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다가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도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바로의 강퍅한 마음 때문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4장 21절에 따르면 그가 강퍅해진 배후에는 그 마음을 강퍅케 하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를 강퍅케 하셨습니까? 하나님만이 진짜 신이시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것을 바로를 통해 온 세상에 보여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선하게 만드실 수도 있고 악하게 만드실 수도 있는 마음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강퍅케 한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짖궂은 사람처럼 선한 사람의 마음을 일부러 비비꼬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악하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강퍅케 했다'는 말은 '내버려두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가 악합니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은 본래가 악합니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원래의 마음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것은 자연히 강퍅하게 되어버립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려는 못된 근성이 있습니다. 마치 강변에서 떠다 놓은 진흙을 그대로 두면 굳어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바로에게 은혜를 주셨다면 그의 마음은 부드러워졌을 것입니다. 고집 부리지 않고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래 마음대로 내버려두셨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화를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항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탓인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셨으면 구원받았을 텐데 그대로 내버려두셔서 이 꼴이 되었다면 왜 나를 벌하시는가? 사랑 못 받은 것도 서러운데 믿지 않았다고 심판하신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닌가? 왜 힘없는 인간을 탓하시는 것일까?"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는 그렇게 항의할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20, 21절).
 
 이 내용을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너 입 좀 조심해. 너는 지금 너 자신이 누군지를 잘 몰라서 그래. 진흙을 빚어서 질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를 생각해 봐. 그는 왕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식기를 만들기도 하고 구박을 받는 요강 단지를 만들기도 해. 그런데 요강이 된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대접하느냐고 대들 수 있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해. 너의 위치가 뭔지 아냐?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진흙이요, 질그릇이야. 창조주에게는 자유와 주권이 있어. 그것을 놓고 네가 이러니 저러니 하고 따질 수 있니? 그가 좋아서 하시는 일을 네가 불공평하다고 말한다면 그 불공평은 무엇에 근거하는 것이니? 네 존재를 모르니까 떠드는 거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네가 그렇게 건방지게 나올 수는 없어. 하나님 앞에서는 무조건 입을 다물어야 해."
 피조물은 창조자의 공의와 자유와 권리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처분에 따를 뿐입니다. 창조자는 자기가 만든 것에 대해 절대 자유, 절대 주권을 행사합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내리기로 작정하실 수도 있고, 긍휼을 내리기로 작정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22, 23절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 되고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기로 작정하신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고 불쌍히 여겨 택하신 사람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이것이 어디 우리 뜻대로 될 일입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시는 절대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방인인 우리로서는 입이 만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어집니다. 따지고 보면 원래 우리는 이스라엘에 비해 사랑받지 못했고 버림받은 것처럼 보인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선민인 이스라엘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할 처지였지 않습니까? 마치 그들은 긍휼의 그릇이 되고 우리는 진노의 그릇이 된 것처럼 얼마나 처량했습니까? 그런데 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이변입니까?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절).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옛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보고는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요?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그들은 버림받았지만 우리는 예수 믿고 그의 자녀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를 거부하고 율법을 붙들고 고집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 길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멸망으로 향하는 죽음의 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32절).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부딪혀서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놀라운 복음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의 말은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을 자, 안 받을 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을 자를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좋아하는 사람을 무조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번은 국가조찬기도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가 설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우리 교회의 어느 청년이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구절을 서두에 쓴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가급적이면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충언이었습니다. 저를 아끼고 염려해서 그렇게 한 줄로 압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의의 투사가 까마귀로 보일 수도 있고, 까마귀가 정의로운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어지러운 시기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대통령이 이제 갓 취임한 분이라면 저는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꿈이 많고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마음을 잘 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대통령은 곧 퇴임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도 많고, 어떤 면에서는 인생의 허무를 느끼거나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면 들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거기서 설교를 한다고 해서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향해서 세례 요한처럼 큰소리로 경고한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이 열릴 수 있을까요? 인간의 설득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그곳에 참석한 이유는 행여나 대통령과 정치인들 가운데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사 택하신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 가서 말씀을 전해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예수 믿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그런 사람일지 누가 압니까?
 설교를 마치고 식사 시간이 되자 그분과 단둘이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저는 그의 영혼 문제를 대화의 주제로 올려 놓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기도회에 특송을 맡아서 찬양하신 분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로님들입니다. 장로들로 구성된 성가대인데 그렇게 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대통령께 "우리나라 대통령도 퇴임한 다음에 저런 성가대에 서서 찬양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랬더니 그분은 기대 밖으로 반갑게 웃으며 공감을 표시했습니다.그 다음에 제가 예수 믿는 문제에 대해 말을 꺼냈는데, 생각밖으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서 가족들은 이미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자기는 단지 얼마 동안 유예 기간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님이 불공 드리는 데 너무 심취해 있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없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무언가 은혜를 주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설교하러 오기를 잘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세상에 백로도 많은데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라도 내가 좋으면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선택 교리의 은혜입니다. 젊은이들 눈에는 현 정권의 정치 지도자들이 다 까마귀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우리는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선택교리에 관한 두 가지 위험
 
 사실 이 선택교리는 불가사의한 진리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선택교리라든지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교리라든지, 제한 속죄의 교리는 전부 다 우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칼뱅은 이 교리가 지니는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성격 때문에 두 가지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위험
 
 첫째로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선택교리를 탐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하게 알고 계시는 지혜의 세계로 발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따져 보고 이해가 되면 믿겠다는 호기심을 갖고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미로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중에는 스스로 망하는 자가 됩니다. 오늘날 지식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신학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장 건전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만큼만 배우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호기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더 알려고 담을 뛰어넘어서는 안 됩니다.
 이 태도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우리도 침묵해야 합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까지 알고 싶어서 기웃거리는 것은 이단들이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모르고 잘 모르는 것이 대부분인 진리일수록 칼뱅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교리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유식한 무식인 것이다."
 유식한 무식이라는 말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무식한 것 같지만 사실은 유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뜻이 얼마나 심오한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무식 그 자체를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속이 텅 빈 호기심을 채우려고 당치도 않는 질문을 들고 나오지 않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토기가 어찌 자기를 만든 장인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에 상반되는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굴복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깨닫게 하심으로 굴복하게 하신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선택교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저울질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조건 복종하고 그 은혜를 찬양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해와 관념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의 하시는 일도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추구할 수 없는 지고한 지혜에 해당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질그릇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호기심에 끌려 하나님과 상대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십시오.
 
 침묵하는 위험
 
 선택교리에 대한 두 번째 위험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 모르는 거야. 도무지 논리가 통하지 않아. 그러니까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아" 하고 마치 선장이 암초를 피하듯이 피해 가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논할 때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것이면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그대로 배워야 하고 또 말해야 합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피하면 짐승과 같은 무지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비밀로 두신 것은 탐색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이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하야 합니다. 과도한 호기심은 피해야 하지만 은혜에 너무 무지하다는 말은 듣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무엇인지, 선택교리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검토해 볼 시간입니다.
 당신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고 이성의 저울에 올려 놓고 이리저리 재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불공평해. 구원 못 받은 자의 손해 배상은 하나님이 해야 해"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저는 절대주권과 선택교리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기가 막혀요. 입이 만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대체 저에게 뭐 잘난 것이 있다고 하나님이 이렇게 저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셨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대답
 
 원래 인간은 자기 마음에 차지 않아도 '왜'라는 질문을 잘하고, 반대로 분수에 너무 지나쳐도 '왜'라는 질문을 잘합니다. 창세 전에 무조건 하나님이 좋으셔서 구원을 주기로 선택하셨다는 진리는 우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분에 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러니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주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합니다.
 저는 특히 네 가지 사실에 대해 자주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먼저, 하나님이 저 같은 것을 선택하셔서 그분의 자녀 되게 하신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도무지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실 근거가 없고 저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만한 어떤 구실도 없는데 이렇게 구원해 주신 것이 너무 기가 막힙니다. 또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삼아 주신 것을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보다 깨끗한 사람도 많고 저보다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도 많고, 더 은혜받은 사람도 많은데 왜 저같이 형편없는 사람을 택하셔서 목사로 세우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저보다도 더 노력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면에서 능력이 탁월한 목회자들이 제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들보다도 제가 훨씬 더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으니 이것 또한 알 수가 없어요. 또 저는 병상에서 일어나고부터 자주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저보다도 더 경건한 목회자들도 병 들어서 꺾이는데 왜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까? 뭐 잘난 것이 있나요? 깨끗한 것이 있나요? 남보다 죄를 덜 지었나요? 왜 이렇게 하십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할 때마다 하나님의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내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 거야." 저는 이 대답 앞에서 입이 만 개라도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각자 질문해 보십시오. "하나님, 저 같은 것이 무언데 하나님이 아셨다는 것입니까? 왜 저 같은 형편없는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질문할 때마다 하나님은 "내가 좋아서 그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대답 앞에 감격해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줄 아는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려고, 무조건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시려고 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어서 그것을 조건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지 모르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루인들 안심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무조건 좋아서 우리를 택하셨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조건 좋아하심은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변해도 하나님은 안 변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우리가 노래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셨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제게 성령 주셔서 제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직도 따집니까? 아직도 무엇인가 자꾸 저울질합니까?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말씀하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 앞에 당신의 마음을 쏟아 놓기 바랍니다. 에서보다 선한 것이 없었지만 사랑받았던 야곱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날마다 감격하는 가슴을 안고 그분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합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