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47
롱펠로가 하찮은 종이에 쓴 시는 훗날 6천 달러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재능입니다. 록펠러는 작은 백지 위에 서명함으로써 그것을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자본입니다. 미국 정부가 작은 금덩어리를 취하여 그것에 독수리를 새겨 넣으면 2백 달러의 가치가 창조됩니다. 이것이 돈입니다. 기술자는 5달러 어치의 재료를 가지고 50달러짜리 상품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기술입니다. 미술가는 단돈 5센트짜리 화폭에다 그림을 그려서는 천 달러짜리 작품을 창조해 냅니다. 이것이 예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찌들고 무가치한 인생을 취하셔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축복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다함께 느끼며 놀라는 것은 사람이 변해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변해도 완전히 변했습니다. 생각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그러다 보니 말도 변하고 행동도 다 변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힘 기독교의 힘입니다. 저들은 바로 얼마전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이렇게 완전히 변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며 성령님의 음성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에 충만하여 매일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집에서도 떡을 떼며 교제하는 가운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 결과 '매일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는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잔디 깎는 새로운 기계를 산 분의 이야기 입니다. 그 기계를 가져온 사람은 그 기계를 다루는 법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기계를 운반해온 분이 떠나자마자 빨리 조종하고 싶은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열쇠를 돌려보았습니다. 그러나 기계는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엔진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가스와 기름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열쇠를 다시 앞뒤로 틀어 보았습니다. 이 기계가 새 것이기는 하지만 건전지가 다 소모된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 가까운 건전지 충전소에 가서 다시 충전을 시켜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열쇠를 틀어 보았으나 여전히 기계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지혜를 짜내지 못하고 포기하려는 참에 이웃집 사람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경과를 다 설명했습니다. 이웃집 사람이 이 기계의 조종석에 올라와서 시동단추를 누르고 열쇠를 틀자마자 즉각 엔진은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든 원인은 시동단추를 누르지 않은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평범한 이치입니까? 그러나 이 잔디 깎는 기계와 시동단추의 관계는 바로 신자의 삶과 성령님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기계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시동을 걸어 동력을 받는 일이 필요했던 것처럼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봉사생활에는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이 세상과 육과 마귀를 이기는 삶을 사는 능력으로 채움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십니다.(21세기 예화사전-능력의 원천이신 성령님)
초대교회는 성령의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1, 2절)라고 합니다. 성령강림은 예언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욜 2:28,29)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예수님께서 약속한 일입니다. (행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약속대로 임하였습니다.
(행 2:1-3)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바람은 청각적으로 감지된 성령이요 불의 혀는 시각적으로 나타내신 성령입니다. 이러한 터전 위에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을 찬미 하는 가운데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이 말씀처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50-53)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합니다.
(행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교인들은 늘 성전에 있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도하는 일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주간 아니 당장 내일부터라도 다시 열심을 내어 새벽예배부터 모이는 일에 힘 쏟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뿐만 아니라 온 교우가 다 새벽시간 부터 교회에 나와 모여 자신과 가정과 교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여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운데 부흥하고 하나되는 역사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기 위하여 우선 모여야 합니다. 한 목사님이 예전에 매우 성실하게 교회 참석하고 있지 않은 한 남자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추운 겨울날이어서 그들은 불가에 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몸을 녹였습니다. 이 비정규적인 교회 출석자에게 목사는 `나는 주일날 당신을 교회에서 보지 못합니다. 당신은 편리할 때나, 당신이 올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에만 오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매우 자주 교회를 빠집니다....나는 당신이 매번 교회에 나왔으면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난로 옆에 있는 부젖가락을 집어 미닫이를 열어 제치고는 모든 석탄들을 서로 닿지 않게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불타오르던 석탄들은 모두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그는 `그것이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고립시키자마자 불은 꺼져 버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이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바른 신앙으로 모여야 합니다. 루이 14세 때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주일에 왕이 왕의 가족들, 왕족들을 거느리고 늘 교회에 나오곤 했다 합니다. 프넬론이라고 하는 대주교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 이 왕이 늘 출석을 했는데 좌우간 너무 많은 교인들이 모여서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예배당이 터지게 모이고 모이는 것입니다. 이 대주교의 마음속에 이게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인지 왕을 만나러 오는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어느 날 한 번 시험을 해 보았답니다. 왕과 왕족들이 마차를 타고 교회에 나왔는데 보니까 교인이 하나도 없고 대주교만 있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이렇게 됐느냐? 하고 물었더니 대주교는 '아무래도 이분들이 예배하러 오는 게 아니라 왕을 만나러 오는 것 같애서 한 번 제가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조용히 광고하기를 '다음 주일은 왕이 못 나오십니다' 했더니 오늘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고 영광 돌리며 하나님 중심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만년설로 덮인 히말라야 산 속 깊숙이에 있는 동굴 속에서 하나님 앞에 명상하며 한평생 기도하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맏는 유명한 수도사인데 이 분이 어느 날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기도하다가 눈을 떠본즉 자기 앞에 어느 카톨릭 수도원 원장 하나가 엎드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여기에 왔나?' 했더니 '큰 문제가 있어서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경건을 훈련받는 훌륭한 수도원인데 지금은 왜 그런지 수도원이 텅텅 비었습니다. 찾아오는 젊은이도 없고 찬양소리도 그쳤습니다. 그저 책임자 몇 사람만 모여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수도원을 다시 부흥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히말라야의 수도사는 잠자코 있다가 대답합니다. '죄 때문이오.' '죄 때문이라니요? 아니, 우리가 수도원에 있는데 누구를 미워하겠습니까? 살인을 하겠습니까, 강도질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도데체 수도원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죄가 있지요. 무지라는 죄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히말라야의 수도사는 대답합니다.
'당신들 속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신 하나님이 계시오. 그런데 당신들이 그를 몰라보고 있소.' 이 말을 듣고 수도원으로 돌아온 원장은 수도사들을 모아놓고 그 얘기를 했다. 누구도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생각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사람으로 변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데...' 그들은 저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형제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일까, 저 분일까? 이 분이 하나님일까 저 분이 하나님일까 그러는 동안에 말도 조심하게 되고, 믿음을 다시 추스르게 되고, 사람을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저들은 찬송을 부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분위기는 확 바뀌었습니다. 감사 찬송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이렇게 치유되기 시작할 때에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수도원이 젊은이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그처럼 냉랭하게 다 끝난 줄만 알았던 썰렁한 수도원이 은혜로 충만하고 감사로 충만한 수도원으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초대교회처럼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1907년처럼 다시 부흥하는 역사를 이룹시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는 가운데 부흥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성전예배와 함께 가정에서도 성령안에서 함께 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점심식사를 같이 하며 이야기 좀 하자고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가족들도 그리스도인입니까?' 잠시 망설이다 말하기를 '제 아내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집에 가 아내에게 증거하십시오. 또한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만난 교회에 나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가정에서 역사해주시기를 위해 기도드리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은 충고를 따르지 않고 자기가 원했던 대로 순회전도사역에 참여하기로 결정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조직해 지방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오래가지 않아 불행하게도 그 가정은 파괴되고 말았다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렸던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은 기쁨에 즉시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정에서 그가 먼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니다. 나와 함께 갈 수 없다. 너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네 가족과 다른 이들에게 가서 하나님이 너를 위해 행하신 큰일을 이야기하라. 이것이 바로 네가 해야 할 첫 번째 의무다. '(막 5:19,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었고 미국의 제 3대 대통령을 지낸 바 있는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 가장 행복했었던 순간들이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것은 주로 가정에서 나의 가족들과 함께 지낸 경험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가정을 떠나서는 이 세상에 진정한 행복이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오늘날의 가정, 부르주아의 가정은 어떠한 터전 위에 기초되었는가? 그것은 자본이다. 사유 재산이다. 부르주아 가정은 자본 계급의 소멸과 함께 당연히 소멸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하늘아래 두 사람은 너무나 대조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기본은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성도덕의 타락과 가정의 부패에 있었다.”고 하였다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가 자기의 주례로 가정을 이룬 700쌍의 부부에게 “가정생활 중 행복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었느냐?”고 설문하였더니 “철저한 신앙생활이었다.”는 대답이 절대적이었다 합니다. 일본의 한 학자는 “가정에 필요한 것은 재산이나 명예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단”이라고 하였다합니다. 가정 천국을 이루며 성령의 충만한 은혜 속에 집에서 떡을 떼는 아름다운 교제 속에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미하는 구역 활동을 활성화 시키며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 참 좋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날로 부흥하여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일꾼을 뽑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6:3-4)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교회를 위하여 일할 중직자를 뽑는 기준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그리고 칭찬 듣는 사람...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었고... 칭찬 듣는 사람들을 뽑았으므로.. 결국 칭송 받는 교회가 되었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시는 역사가 임한 줄 믿습니다.
칭송은 열심히 봉사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행 9: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며 칭송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칭송은 선행 가운데 주어집니다.
(눅 7:2-4)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는 칭송이 나타납니다.
칭송은 자기 희생 가운데 주어집니다.
어느 인자한 노인의 적선이야기입니다. 어스름한 달밤에 마당에서 기척이 있어 노인이 대청유리로 내다본즉 한 사내가 마당구석에 쌓아둔 볏섬을 지게에 얹고 일어서려 하는데 힘이 부쳐 일어나지 못합니다. 노인이 슬그머니 뒷문으로 나가 지게 뒤에서 받쳐주었습니다. 이상하여 뒤돌아본 밤 사나이가 깜짝 놀라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그 마을의 가난한 아무개라는 것을 확인한 노인이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벼 몇 섬을 보내려 했는데 미처 보내지 못해 미안하네. 한 섬 더 가져가게. 이것은 자네와 나만 아는 일이네.”했습니다. 은혜를 입은 이 사내가 결국은 그 말을 동네에 알려 노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높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이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고 하시며 선행을 베풀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눅 10:33-35)
기독교 방송국에서 신축을 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오는 주일 신축을 돕는 헌금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에도 함께 동참하며 복음을 전하며 부흥을 위하여 합력하여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흥되는 교회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성도들이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집에서 떡을 떼며 교제하며 칭송 받는 가운데 부흥하였습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집에서 떡을 떼며 교제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칭송 받으며 1907년 부흥을 다시 이루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0) | 2022.09.08 |
---|---|
형통의 사람 형통의 새해 (0) | 2022.09.08 |
뜨거운 영성을 지키라 (0) | 2022.09.08 |
예수님과 함께 2007년을 (0) | 2022.09.08 |
주인을 주인답게 대우한다. (0) | 2022.09.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