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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잘못된 열심

by 【고동엽】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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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255쪽에 있는 글입니다.

 

 

31. 잘못된 열심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1~13절

 

 

 

 

 어느 믿음 좋은 자매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가정은 몹시 흔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약 5년 전부터 남편이 탈선을 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남편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의 무분별한 태도는 가정을 파탄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습니다. 이제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 파인 골을 도저히 메울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부인은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혼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아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 남편은 가장으로서 책임을 저버린 지가 오래였습니다.
 제가 그 부인에게 정말 이혼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이혼을 보류하겠어요." 그는 남편의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이혼을 보류하고 기다려 보겠다는 말을 여러 번이나 되뇌어 말했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지 아니하는 사람, 사랑보다도 미움이 앞서는 그 사람을 구원해야겠다는 부인의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 마음은 대체 누가 주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어리석어 보이는 생각입니까?
 제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종종 일본 목사님들을 모시고 제자훈련 지도자세미나를 합니다. 사실 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자주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그들에 대한 좋지 못한 민족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언론 보도를 통해서 종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접할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과거의 치욕사를 대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짐승 같은 추악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러나 깊이 따지고 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일본 목사님들도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우리나라 목사님들과 똑같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믿음을 지키려다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신음하며 죽어 간 분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모시고 세미나에서 섬긴다는 것이 신앙 안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때로는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원수나 다름이 없는 자들의 영혼을 걱정해 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원수의 구원을 바라고 기도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원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을 놓고 근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 10장 1절을 읽어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온전히 이루어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동족의 구원을 놓고 애타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1절).
 
 그는 원수의 영혼이 멸망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쫓겨 다니며 핍박을 당하는 신세이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바울의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거룩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는 9장에서 자기가 동족의 구원을 놓고 밤낮없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중요한 교리를 밝힌 일이 있습니다.
 
 잘못된 열심
 
 10장에 들어와서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근본 이유를 또 하나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 믿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열심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2절).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 명분은 좋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열심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마음이 미지근한 분들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행동이 몹시 느린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마음이 뜨거워지지 아니한 분들을 위해서 제가 꼭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열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불 꺼진 엔진이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듯이 열심 없는 신앙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열심이라고 해서 다 건전한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떠벌인 열심은 가히 극성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열심에는 독소가 숨어 있었습니다. 자기도 망치고 다른 사람도 망치는 독소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2, 3절에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열심이 나쁜 이유는 지식을 좇지 아니하는 열심이요, 자기 의를 드러내는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비슷한 내용입니다만 이해를 선명히 하기 위해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순서를 바꾸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열심
 
 첫째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둔 열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5절).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의롭게 되고 영원히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에 율법대로 살아 보려고 했던 수많은 성도들은 자기 힘으로 의를 행하려는 부단없는 씨름을 하면서 매우 중요한 진리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으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결국 선행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절대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히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겸손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시편을 한번 보십시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많이 나옵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 율법에 순종하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 의가 없으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소원이 그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일을 하느라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도와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기 한계성을 하나님 앞에 자인하며 그분의 은총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경건한 선배들의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느라고 쓸데없이 극성을 부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8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다음부터 이상하게도 더 병적으로 율법에 열심을 내는 민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열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점점 잘못된 길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노력만 하면 반드시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추기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는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장로의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율법 해설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이런저런 사람의 생각과 해석을 보탠 책입니다. 그 책은 날이 갈수록 페이지 수가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을 덧붙이다 보니 나중에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경전이 되어버렸습니다. <토라>라고 하는 책은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은 조금이고, 사람들의 의견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상한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 속에 담아 놓으신 믿음과 정의와 자비의 정신은 송두리째 내버리고 중요하지도 않은 형식적인 법조문만 잔뜩 실어 놓았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모순투성이의 악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법이지 하나님의 법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이 장로의 유전을 지키는 유대 사람들 중에는 안식일에 전기 스위치도 올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전기 스위치를 올려야 할 경우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불러서 그에게 돈을 주고 대신 그 일을 하게 합니다. 그 정도로 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겠다는 나름대로의 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러한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잘못된 열심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악법을 지켜야 의로워질 줄 알고 거기에 매달렸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바울이 바로 그와 같은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전혀 딴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 그는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지나치게 열심을 내었습니다. 유대 사람 모두가 다 그 꼴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처럼 이 유전을 지키지 않는 자를 사정없이 비판하고 이간질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살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사람까지 죽일 수 있는 열심,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잘못된 열심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좇지 않는 열심
 
 두 번째로 지식을 좇지 않는 열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의 열심이 잘못된 것은 지식을 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열심은 무식한 열심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좀더 자세하게 '지식을 좇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3절을 보면 보충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모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의입니까?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 모두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어 놓으신 의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었나요? 그분은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기에만 이 말이 나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누누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대신 지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우리가 지키지 못해서 꼭 받아야 될 율법의 형벌을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분이요 율법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하는 무거운 짐을 벗게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서 두려워 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그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인정하고 받아 주시는 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지켜서 얻는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는 굉장한 탐구와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주신 의이므로 어려운 것도 아니요,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하늘에서 끌어내린 것도 아니요 불러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손발을 비벼서 얻은 의가 아닙니다. 그 의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가 친히 오셔서 선물하신 은총의 의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참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6절).
 
 이 본문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는 분이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30장 12절부터 14절까지를 읽고 비교하면 그렇게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신명기의 내용을 전부 다 인용하지 않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라는 말 한마디만 따로 떼어 인용했기 때문에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신 30:12, 13).
 
 왜 그렇습니까? 14절이 답입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우리 가까이 와 있고 이미 전파되어서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려고 하늘에 올라가서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보려고 죽은 자들 세계를 돌아다녀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은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손발로 빌어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열심을 가지고 극성 피운다고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열심을 피우고 극성을 떠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절).
 
 하나님의 의는 멀리 있거나 찾기 어려운 곳에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늘을 헤매고 땅 속을 뒤질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가까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예수를 주(主)로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반드시 구비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몇 가지 조건에 대해서는 9, 10절 말씀이 가르쳐 줍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이 자기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자기가 절대적으로 생명 바쳐 충성하고 순종해야 할 주님이라고는 고백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어려서 그렇습니다. 어린 믿음은 '살려 준다'는 말에는 매달리지만 '순종하라'는 말에는 머뭇거립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시인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막연히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셨길래 나의 주가 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구원하는 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마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절).
 
 그 믿음은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겉으로 사람이 듣기에 좋도록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부리를 두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믿음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안 됩니다. 공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간혹 보면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고백하라고 하면 입을 열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우리 형제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주님을 철석같이 믿는다고 해도 안 믿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님의 사람이요, 예수님에게 소속되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어린 믿음이든지 잘못된 믿음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의 달라진 신분과 소속을 밝힐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가진 것이라야 참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아니하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아니하고,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주십니다. 이 내용이 11절부터 13절까지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시는 이 의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무지하면서 열심을 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오신 지 몇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무지의 비극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율법 준수에만 극성을 피우는 그들의 무식한 열심, 잘못된 열심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한 공로와 열심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죽였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사탄의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유대인처럼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극성을 부리는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종교나 사상이 잘못된 것일수록 거기에 빠진 자들은 더 무서운 광신자가 되는 것을 봅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열심이 없어서 망하는 자보다 잘못된 열심 때문에 망하는 자가 훨씬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 잘못된 사상은 그 사이비성을 감추기 위해서 추종자들에게 극단적인 열성을 강요합니다. 그들의 열심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유대인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열심은 그 자체가 그들이 진리에서 떠나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모 일간지에 게재된 어느 아버지의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대학에 입학시킨 아버지는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늘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딸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잘못된 길로 갈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는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비 기독교 집단에 빠졌습니다. 학교에 간답시고 나간 아이가 공부는 안 하고 하루 종일 캠퍼스를 누비며 포덕하는 일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포덕'은 전도에 해당하는 그들의 용어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이단에 충성을 하고 야밤중에 귀가하는 딸을 맞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결국 아버지는 그 딸을 사이비 집단에서 끌어내기는 했습니다만 지금도 대학 캠퍼스마다 순진한 학생들을 유혹하는 검은 손길은 여기저기에 숨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불행하게도 이단에 빠져 들어간 교인들은 한결같이 광신자가 되어버립니다. 밤낮없이 출석하던 교회 성도들의 집에 전화를 걸고 자기 돈 써 가면서 매일 만나 대접하고, 거의 하루 종일 들락거리며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습니다.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무지에서 비롯된 극성은 치료할 약이 없습니다. 머리는 차가워야 하고 가슴은 뜨거워야 하는데 머리까지 열을 받았으니 그 머리를 누가 식혀 주겠습니까? 병적인 열광주의자에게는 약이 없습니다. 병적인 열광주의자가 된 사람보다 불 꺼진 가슴을 안고 있는 사람이 훨씬 낫습니다. 열심이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칠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에 빠진 자는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잘 나오는 형제들 가운데는 과거 한때 자기 아내가 너무 깊이 교회에 빠지지 않을까 몹시 불안해했던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가 잘못된 열심을 강요하는 곳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열심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을 경계하다가 옳은 열심마저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뜨거운 가슴을 안고 충성해야 합니다. 이단에 빠진 자들을 보십시오. 잘못된 진리를 가지고도 저렇게 생명을 내놓고 설치는데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값없이 받은 우리가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이 좋은 예수를 알고도 열심을 내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열심과 잘못된 열심을 구별하는 영안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열심은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며 그로 말미암아 고취되는 열심입니다. 진젠드로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는 오직 한 가지 열정이 있다. 그 열정은 주님, 오직 주님 한 분뿐이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는 열심, 그분에게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전부를 드리는 열심은 절대로 나무랄 데 없는 열심입니다. 우리는 이런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행여나 마음속에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은근한 열심이 있습니까? 빨리 꺼버리세요. 여러분의 마음 속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을 부리는 어리석음이 있습니까? 빨리 물동이를 가지고 와서 꺼버리세요. 그것은 백해무익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미치는 열심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기름을 좀더 부으십시오. 더 부어도 괜찮습니다. 지나치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나치게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지나치면 절제하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바울의 심정을 가져라
 
 끝으로, 우리가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잘못된 열심에 빠져서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평생 따라다니며 핍박했습니다. 그런 동족을 놓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 모두는 큰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우리의 동족은 어떠합니까? 우리나라만큼 이단 집단이 극성을 부리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칭 메시아라고 떠드는 사람을 헤아리자면 열 손가락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대한민국, 정말 보통 나라가 아닙니다. 저 북한을 보십시오. 세계에서 저만큼 저주스러운 극성을 피우며 거짓된 주체사상에 속아 발광하고 있는 민족이 또 있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유대인처럼 잘못된 열심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이 잘못된 열심에 빠져 있는 너희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바울처럼 고통하고 있느냐? 아니면 비판하고 욕하고 비웃기만 하느냐?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느냐?" 이 질문에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렵니까?
 예전에 서대반 선교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은혜로운 간증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오늘날 북한에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하시면서 몇 가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공산당원이 예수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에게 사로잡혀 그 뜨거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예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붙잡혀 들어가 죽도록 두들겨 맞고 나왔습니다. 지체가 높은 당원이니까 함부로 다룰 수가 없어서 풀어 주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가 석방되고 나서도 계속 예수를 전하자 이번에는 그의 성대를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말을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몹시 두들겨 맞아서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자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서 선교사님이 북한의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특송 시간에 그가 찬송할 기회를 얻어 찬송가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라는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중에 눈물이 나서 제대로 부를 수가 없었나 봅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자 거기에 참석한 약 150명의 사람들도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우는 것인지, 서러워서 우는 것인지 모르지만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독창을 마친 그 선교사님은 몹시 감동해서 다 함께 찬송을 부르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330장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 이 불쌍한 우리 동포가 북녘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잘못된 사상에 속아서 살지만 예수의 이름만 들으면 금방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을 놓고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너는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있느냐? 비록 잘못된 열심에 빠졌다 할지라도 예수만 전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들이 네 주변에 많이 있는데 네 동족에 대해서 네가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마음 아파하느냐?" 우리는 주님의 이 질문 앞에 "주님, 저는 그들을 위해 날마다 마음 아파하며 기도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아직도 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서 쓸데없는 일에 열심을 부리며 살고 있는 내 동족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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