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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택함받았다고 교만할 수 없는 이유

by 【고동엽】 20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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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317쪽에 있는 글입니다.

 

 

34. 택함받았다고 교만할 수 없는 이유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바라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로마서 11장 1~24절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무슨 주제로 말씀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11절 이하에서도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앞부분에서 주장한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보존하고 계시는 '남은 자'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버림당했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더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그는 세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세 가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완악해진 덕분에 이방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11절).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는 실족해서 완전히 넘어져버렸느냐 하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실족'과 '넘어짐'은 의미가 다릅니다. '실족'은 발을 헛디뎌서 비틀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지만 비틀거리다가 바로 설 수도 있는 것이 '실족'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실족'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해서 아직 예수 믿지 않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넘어짐'은 의미가 다릅니다. '넘어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버림받아 멸망당하는 것, 즉 소망이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넘어질 정도로 이스라엘이 실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완악해서 예수를 믿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멸망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예수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오히려 세상에 유익을 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믿기를 거부한 덕분에 이방 사람인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으로 세상을 이롭게 했다면 그들이 안 믿는다고 해서 어찌 망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안 믿어서 이방인이 예수 믿는 데 덕을 보았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은 사도행전을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전부 28장으로 되어 있는데, 10장부터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 보았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했고, 또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질투해서 방해를 많이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바울이 로마 감옥에 2년 동안 수감당해 있을 때, 그는 비교적 자유롭게 그것에 있는 유대인들을 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은 믿지 않고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울은 사도행전 28장 28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8).
 
 이제부터 마음을 돌려 이방인에게 가서 전하겠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아니한 덕분에 이방 사람인 우리가 호기를 만났다는 것은 틀린 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견해를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대주의 학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알게 모르게 이 세대주의 신학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대주의가 이단은 아닙니다. 세대주의가 말하는 진리 가운데 참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더러 있습니다. 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놓고 세대주의 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이스라엘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여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끝까지 거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던 예수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으로 이 복음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세계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처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말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우려고 했던 것이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이 말씀만 보아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따로 보는 그들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은 승리자입니다. 승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일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절대 실패자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현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이방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된 것은 이스라엘 땅에 세우려고 했던 하나님 나라가 실패로 돌아가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부터 가지고 계셨던 구원 계획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즉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말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뿌리로서의 이스라엘
 
 유대인이 믿지 않아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믿었더라면 이방인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이 안 믿은 덕분에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훨씬 빨리 쉽게 믿을 수 있었다는 말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덕을 보았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먼저 전해졌고 이스라엘 사람인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 이방 사람인 우리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의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 없는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매우 독보적인 존재요, 존경을 받아야 할 위치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거역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빚을 지게 된 셈입니다.
 바울은 세 가지 비유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독보적인 위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떡으로 비유를 합니다. 민수기 15장 19절 이하를 보면 이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일 먼저 익은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일종의 감사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 익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음식 만들 때마다 그 곡식을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첫 번째 떡이 이미 거룩해졌기 때문에 그 다음에 만들어 먹는 모든 떡이 자동적으로 거룩해진 것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 앞에서 이스라엘은, 마치 처음 익은 곡식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드려진 떡과 같습니다. 그들이 이미 거룩해졌으니 그들을 통해 예수 믿은 우리 모두가 거룩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를 거룩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으니 이스라엘 민족의 위치가 얼마나 독보적입니까?
 또 어린 나무 비유가 나옵니다. 어린 묘목을 가져다가 성전 마당 귀퉁이에 심으면서 "이 나무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고 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묘목은 하나님께 바쳐집니다. 따라서 그 나무에서 나오는 모든 가지나 꽃이나 열매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물이 됩니다. 가지가 날 때 그것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리고 열매를 맺을 때 또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묘목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 영접한 예수를 우리에게 전한 셈이 되니까 그들이 어린 묘목과 같은 것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 나무에서 나는 가지나 열매나 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까?
 또 다른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의 비유입니다. 참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을, 돌감람나무는 우리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예수 안 믿으니까 하나님이 가지를 쳐버렸습니다. 그 대신에 돌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을 그 자리에다 접붙였습니다. 돌감람나무 가지의 입장에서는 참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임을 받았으니까 굉장히 잘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원예법대로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거꾸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접붙이려면 돌감람나무 가지에 참감람나무 가지를 붙여야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못된 돌감람나무 가지를 참감람나무에다 접붙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이론이 원예법에 맞느냐 안 맞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비유를 가지고 돌감람나무 같은 형편없는 이방인이 참감람나무 같은 대단한 유대인 덕분에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믿지 않고 고집하다가 꺾여버리자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에게 대단히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뿌리를 기억하라
 
 그러므로 이방인으로서 예수 믿게 된 우리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스스로 교만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이 점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19~21절).
 
 대단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완강하게 배척하지 아니했다면 이방인인 우리가 이렇게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만도 합니다. 그들이 잘못되어서 우리가 잘된 셈이니 어찌 그들을 욕할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어떻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비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 친구 중 어느 목사님은 그의 전임자가 무언가 실수를 해서 사임을 하게 되자 그 덕분에 큰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제가 일부러 슬그머니 말꼬리를 돌려서 기회를 주어도 자기 전임자에 대해 절대로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볼 때 그의 행동거지가 매우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전임자가 잘못해서 자기가 잘되었는데 왜 욕을 합니까? 그가 목회를 계속 잘했더라면 자기가 그 자리에 올 수 있었겠습니까? 못 옵니다. 그러니 욕할 수가 없지요.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에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지금까지 배척하고 있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사람들이 잘못함으로 우리가 얼마나 득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니 그 사람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영적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과거의 영적 자본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신앙에 있어서 홀로 선 사람은 없습니다. 홀로 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서 믿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나의 신앙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만큼 영적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가르치느라고 땀을 흘리며 애썼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글로 된 이 아름다운 성경책을 펴 볼 때마다 존 로스 선교사를 기억하는 분이 우리 중에 몇 분이나 있습니까? 서상윤 씨를 기억하는 분이 몇 분이나 있습니까? 1875년부터 그 두 사람은 만주에서 성경 말씀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피눈물 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7년의 각고 끝에 그들은 누가복음을 번역해서 내놓았습니다. 서상윤 씨는 예수를 제대로 안 믿는 사람이었지만 성경 번역에 전심을 다 했습니다. 번역을 할 뿐만 아니라 나무에다 활자를 새기는 일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만든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나누어 주는, 권서인 역할까지 했습니다. 누가복음을 번역한 다음에 서상윤 씨는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자청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펼 때마다 이 책을 위해 수고한 위대한 선조들과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언더우드 선교사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증조할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마을에서 따돌림받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예수 한 분을 위해서 생을 바쳤던 그 증조부가 안 계셨다면 우리 가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대로 증거되었을까 하고 저는 의심합니다. 우리 중에는 부모가 너무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덕분에 예수 믿게 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남편이 잘못된 길로 빠지자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예수 앞으로 나온 부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 우리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 신문에 대학부에 출석하는 정 모 양이 쓴 감동적인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결혼하기 전까지 교회를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한 이후 그만 신앙생활을 중단했습니다. 그 후 아마 5, 6년의 세월이 흘렀나 봅니다. 정 양이 네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어머니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고 어린 삼남매를 키우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위해서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 정 양의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아버지의 목숨과 바꾼 나의 구원, 나의 새 삶, 이것을 생각해서 나는 더 열심히 살면서 다른 이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는 자기 신앙의 뿌리를 깊이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자기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의 뿌리는 누구입니까? 당신의 신앙의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놓고 얼마만큼 감사합니까? 얼마만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까? 진실한 신앙의 사람은 자기가 빚진 영적인 뿌리를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가지이면서 뿌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잘난 체하면 그 사람은 잘리울 가능성이 많다고 사도 바울은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신앙의 뿌리를 잊어버리고 교만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하셨든, 어떤 다른 사람을 사용하셨든 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절).
 
 좀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와 하나님이 엄하게 다루시는 것을 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엄하게 다루셨습니까? 넘어지는 자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을 엄하게 다루셨습니다. 여기서 '넘어진다'는 말은 '실족한다'는 뜻입니다. 안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엄하게 다루셨지만 그 대신 접붙임을 받은 가지인 우리 이방인들은 인자로 다루셨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을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셨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덕분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뭐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을 위해서 눈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수고해 준 많은 분들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불신자를 사로잡을 매력을 가지고 있는가?
 
 두 번째,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을 보면 결국은 이스라엘도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질투가 많은 콧대 높은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절).
 
 이방 사람들이 먼저 예수를 믿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기하게 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섭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이방인들을 보고 질투해서 회개하고 돌아왔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질투가 대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개는 그들의 질투가 잘못된 방향으로 많이 흘러갔습니다. 자기가 못 먹는 밥, 남도 못 먹게 하자는 식으로 믿는 자를 핍박하고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질투도 있었지만 반면에 이방 사람들이 예수 믿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늘 풍성한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질투가 나서 돌아온 유대인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을 이방 사람들이 가로채듯 먼저 믿는 것을 보고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1988년도에 나온 자료를 보면 지금 팔레스타인에는 440만 명 정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약 30개의 교회가 있으며, 한 교회에 평균 백 명 정도가 모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약 3천 명 정도가 믿는 것입니다. 얼마나 적은 숫자입니까? 이 3천 명 정도의 사람이 이방인들이 믿는 예수가 너무 좋아서,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질투가 나서 예수 믿고 돌아온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수천만 명의 유대인 중에서 지금도 예수 믿고 돌아오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절대로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팔레스타인에는 아직도 악의에 찬 단체들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 수가 무려 12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예수 믿는 형제들이 동족으로부터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아니마민>이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디 오신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얼마나 처량한 사람들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들이 안달이 나서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시점이 가까워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자각이 그들 중에 갑자기 팽배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2천 년 전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이방 사람들을 따라서 "우리도 예수 믿자" 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잠깐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믿는 우리 이방인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형편에 좀더 실감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우리가 질투의 대상이 될 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까? 안 믿는 주변 사람들이 "너 믿는 예수 나도 좀 믿어 보자" 하고 찾아올 만큼 우리들이 그들에게 무엇인가 보여 주는 것이 있습니까? 그들보다 좋아 보이는 것, 행복해 보이는 것, 무언가 앞서가는 것들이 있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 복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도 안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좋아야 하고, 자녀들도 예수 믿는 가정의 자녀들은 더 아름답게 자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성공할 사람은 성공하고, 지도자가 될 사람은 지도자로서 돋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발 밑에 밟히고 남의 꼬리가 되어서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면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질투할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 저를 통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질투가 생겨서라도 예수 믿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형제가 예수 믿었다면 예수 믿는 그 형제의 가정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정이 얼마나 잘되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형제들이 질투를 하게도 되고 멸시를 하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형제가 제일 못살고 고생을 많이 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퍽 답답하지만 이런 형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을 가지고 다루신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4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오윤수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형제가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오 집사님 혼자만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유달리 잘 믿었습니다. 안 믿는 형제들이 볼 때는 예수를 저렇게 잘 믿는데 왜 먼저 죽느냐 하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장례식 때 보니까 형제들이 비판적인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예수 믿어서 그 꼴 당했다는 식입니다.
 저는 장례 예배를 인도하면서 비록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 형제를 하나님이 그렇게 빨리 부르신 이면에는 분명히 아름답고 선하신 뜻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형제들이 질투는커녕 빈정거리고 멸시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그러니 진짜 인생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혼자 남은 미망인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느냐 하는 것을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의 자녀들을 안 믿는 형제들의 자녀들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키워 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안이숙 사모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30대 초반 처녀의 몸으로 평양형무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오랫동안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심문한 사람이나 그를 한 번 만나 본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 신앙인으로서 돋보이는 고매한 인격에 전부 넋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뭘 보고 알 수 있습니까? 그의 소문이 세간에 퍼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때입니다. 평양도청의 연료 담당 주임이라고 하면 세도가 보통 당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임의 부인인 히가시라는 여인이 안이숙 여사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평양형무소에 간수로 취직을 하여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간수라는 것이 그다지 환영받는 직업은 아닙니다. 그런데 젊은 부인이 갓난아기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는 간수 자격으로 이틀에 한 번씩 평양형무소에 들어와서 하루 종일 안이숙 여사 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매료시켰을까요? 안이숙 사모님에게는 분명히 돋보이는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된다고 믿습니다. 당신에게 안 믿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무엇이 있습니까? 질투가 생길 정도로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돋보이는 매력이 있습니까? 이것을 놓고 우리는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주변의 믿지 않는 식구들에게 저는 얼마만큼 매력 있는 사람입니까? 저에게 매력이 없다면 매력을 갖게 해 주십시오. 저희 가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제 자녀들의 장래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런 기도를 꼭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족을 위한 비전을 품어라
 
 끝으로, 바울은 언젠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돌아오는 날, 눈 앞에 전세계가 복을 받는 영광스러운 장면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2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않고 거역하는 것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것을 통해서는 세상이 얼마나 놀라운 복을 더 받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5절).
 
 "저희를 버리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으로 번역하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이 버림 받은 결과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날에는 세상이 얼마나 더 기막힌 복을 누리게 되겠습니까? 마치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것 같은 큰 기쁨을 온 세상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아직도 믿지 않는 자기 동족을 향해서 아름다운 꿈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완악해서 돌아오지 않지만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날, 온 세계가 새로 부활하는 것 같은 찬란한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비전을 그는 한시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꿈을 가지고 항상 자기 동족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어떻게 절망하거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동족을 향해서 어떤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바울의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 민족이 이스라엘은 아니지만, 그래도 꿈을 가지고 보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 한민족을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우리는 21세기에 세계를 위해서 아름답게 사용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정부패가 심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바울처럼 긍정적으로 우리 민족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동족으로 인하여 세계가 큰 복을 누리게 될 날이 오리라는 꿈을 안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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