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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행복한 이유

by 【고동엽】 2022. 9. 7.
 
 

신명기 33:26-29

예부터 길을 가다가 곰을 만나면 죽은 척을 하면 곰이 그냥 지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곰을 만났습니다. 이 말이 생각나서 길바닥에 누워서 죽은 척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곰은 아주 착한 곰이었습니다. 사람이 쓰러져 죽은 것을 보고 그 착한 곰은 양지 바른 곳에 고이고이 묻어 주었답니다. 여러분 웃고 나니 행복하십니까?
사람들의 소원은 행복입니다. 예로부터“나는 행복한가?”하는 문제는 인간 실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며 오늘도 살아갑니다.
철학자[쇼펜하우어]는<행복론>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가져야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명랑한 정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볼 줄 알고 밝게 생각할 줄 아는 정서가 먼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을 어둡게 보고 비참하게 보고 부정적으로 보는 이 사람은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부(富)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부에는<절대적인 부>가 있고<상대적인 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대적인 부>가 문제입니다. 내가 가난해서 기분 나쁜 것 보다 다른 사람이 나 보다 낫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못사는 게 문제입니다.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해하는 지혜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난하고 내가 부자이므로 만들어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얼마를 가졌던지 나대로 스스로 만족할 때 그것이 행복입니다. 이 정서가 명랑해야 행복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몸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사실 건강 하나만 있어도 그 사람은 절대로 불평할 권리도 불행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건강 할 때는 이것이 행복인 줄로 여기지 않다가 병원에 입원해 보면 그 때에 하는 말은 딱 한마디입니다.“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고 건강 하나면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내가 건강하다면 행복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또 그런가 하면 세 번째로는 정신적 평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만족을 아는 정신적 자세를 말합니다. 사람은“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자기 나름의 한계를 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한계를 내가 정할 줄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안달이고, 높아지면 더 높아지려고 목을 매는 이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한계를 정할 줄 아는 만족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마음이 평안하고 그것이 곧 행복입니다. 행복이 없다는 것은 만족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밑 빠진 독에는 악취 나는 물을 부어도 새고, 오래 묵은 값비싼 포도주를 부어도 샙니다. 인간 근본에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육적 쾌락과 정신적인 부를 가져다가 부어도 새는 것입니다. 결국은 뿌리 뽑힌 나무같이, 물 떠난 물고기같이 허무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칼 힐티]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추위를 막기 위해서는 한 벌의 외투면 족하나 만약 이 경계선을 넘어 의복의 색깔이나 모양에 관심을 쏟으면 색다른 열 벌의 외투도 부족하다”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추워 죽을 지경에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외투 한 벌이면 됐지‘색깔은 빨강이 이쁜데...’,‘목에는 털이 달려 있으면 더 좋은데...’하는 사람이 제정신이냔 말입니다. 자기만족의 한계가 없는데 행복이란 기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네 번째는 인간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재산이 필요하다 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이 재산이라고 하는 것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는<당연히 필요한 재산>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꼭 필요한 재산을 말하죠. 두 번째는<여유 있는 재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남에게 베푸는 겁니다. 주고 싶을 때 주고 남을 위해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이건 꼭 필요합니다.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한 여유재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불필요한 재산>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이 재산 때문에 근심도 많고, 걱정도 많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잃어버리고 자기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백해무익한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다툼이나 생기고, 자식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허랑방탕하게 하는 재산이라면 이건 백해무익한 불필요한 재산이지요. 행복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인격이 이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자기관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나친 재산, 이건 불행입니다. 재산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러나 인격이 감당할 수 있을 때 복입니다. 내 정서가 감당할 수 있어야 되고, 내 가치관이 그것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을 때 복입니다. 관리 능력이 없는 재산, 감당할 인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주어진 재산은 절대로 행복 일 수 없음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붙잡고 일생을 허비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에릭프롬]이라는 철학자가 유명한 책<소유와 존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인간의 타락 원인은 바벨탑 비전에서 비롯된다.”그랬습니다. 인간이 시날 광야에서 바벨탑을 만들 때 하늘까지 쌓으면서 뭐라고 했습니까?“흩어짐을 면하자. 안정과 번영을 누리자”그랬습니다. 하나님에게까지 기어오르려는 이 교만이 오늘도 세계를 망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한 만큼의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그릇된 철학과 오해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까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정리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소유와 행복>은 다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드렸죠. 많이 가져도 그것이 불행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런가하면<소유와 인격>도 별개입니다. 가질수록 인격이 덕망이 있어야 되는데 가질수록 배 내밀고 거만해지는 사람이 더 많잖아요. 더 재밌는 것은<소유와 건강>도 별개라는 사실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건강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위생 따지며 깨끗하게 청결하게 살아보려고 돈을 쓰고 몸부림을 쳐봐도 위생의“위”자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더 건강하게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하나<소유와 생명>도 무관합니다. 부자라고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일찍 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오래 살려고 부자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벌만큼 벌어놓고 먹고 살만하면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문제가 되는<가진 만큼 행복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만큼은 분명히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얻으려고 하는 행복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시적이지도 않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 어떤 것에도 빼앗기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영원한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그것만큼은 알고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통계여론 조사법의 창시자인[조지 갤럽]이“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한가?”라는 여론조사를 했을 때 놀랍게도<생생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경험한 자가 가장 행복하다>라는 답변이 1위였으며, 그 반면에 가장 불행한 사람은<밤낮 술집에서 보내는 사람>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좋은 나라냐 나쁜 나라냐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하나님의 복을 받은 나라이며 민족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성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해야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행복의 근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는 순간, 하나님을 떠난 순간, 어떤 다른 것에 풍성함이 있어도 궁극적인 만족과 행복이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순간 불행은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행복이 있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 사실을 안다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29절 말씀에“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 자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이 무엇이 그리도 행복하다는 것입니까? 아직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온 것도 아닙니다. 물론 눈앞에 가나안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얼마나 많은 고생을 치러야 할지 모릅니다. 수많은 전쟁과 이방 민족과의 갈등이 산 넘어 산처럼 놓여 있는데 모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이스라엘을 행복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요 성경을 잘 보면 분명한 행복의 조건이 곧이어 나옵니다. “너는 행복 자로다”라는 선언 뒤에 곧 바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기에 이전에 그와 같은 구원을 얻은 백성이 없었기에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자들이냐?”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는 이스라엘의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자 그럼 이제 오늘 우리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행복해야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예수 안 믿는 옆집보다 잘 살지도 못하는데 행복할 게 무엇 있습니까? 동창모임에 가면 예수 안 믿는 친구들은 자식도 잘 되었다고 하고 남편도 성공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월급 생활하는 우리 남편, 시험낙방하고 재수하는 자식이 있는 내가 무엇이 행복하단 말입니까? 이 상황에“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남편이 월급쟁이여도 굶지 않고 집안에 웃음이 있어 행복하고, 자식이 재수를 해도 건강하고 화목하니 그만입니다. 그 보다 더한 즐거움, 온 가족이 구원받아 예수 믿는 가정이 되어서 가졌지만 날마다 불화하는 가정보다 부족하지만 서로 아껴주는 가정 된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됩니다. 앞으로 행복해질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 28절에 보면 이런 우리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행복의 이슬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행복의 이슬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구원과 은혜의 이슬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실입니까? 이슬이 아침마다 내리듯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이슬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립니다. 우리가 잠들었을 밤중에 즉 우리는 의식하지조차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우리 곁에 머뭅니다. 우리가 알 듯 모를 듯하지만 항상 구원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이것이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우리를 돕는 방패시요, 우리의 영광의 칼이시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대적들을 이기고 다스리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까지도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그 분과 함께 있다면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행복한자답게 삽시다. 내가 행복한 분명한 이유를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지금 행복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재산이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또 무엇으로 행복의 조건을 삼고 살아가시기를 원하십니까? 명랑한 정서입니까? 건강입니까? 정신적 평온인가요? 남부럽지 않을 자산입니까? 이것들도 다 좋습니다마는 이 보다 더욱 중요한 구원의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고 날마다 이러한 고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출처 : 김철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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