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 (예레미야 32:6~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시위대장의 뜰에 갇혀 있을 때의 일입니다.
BC 587년 곧 유대 왕국이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1년 전이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사촌 되는 하나멜이 찾아와서 아나돗에 있는 자기의 밭을 팔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멜은 토지를 매매할 때 가까운 친족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한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며 사촌인 예레미야에게 자기의 밭을 사라고 권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에게 은 17세겔을 주고 매매증서를 받아 인봉해 두었습니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아서 언제 나라가 망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있는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을 챙기려는 하나멜은 매우 이재(利財)에 밝은 현실주의자입니다. 한편 똑같은 상황임에도 그 밭을 사고자 하는 예레미야는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 같지만 그래도 훗날을 대비하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신앙세계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또 이에 대하여 성도는 어떤 안목을 가져야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역사의 거울
선진들이 남겨놓은 과거의 발자취는 다음 시대의 사람들에게 거울이 됩니다. 특히 신앙세계의 역사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바른길을 걷게 하는 등불이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 11:1).
1)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그들의 살아온 역사를 조명해 볼 때 기적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천하 만민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시고 자자손손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언약에 근거합니다(창 12:2-3).
훗날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그 백성의 지난 역사를 회고하면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신 32:7). 지난 역사 가운데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순종했을 때 만사가 형통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신 28:1-6).
2) 범죄한 백성에 대한 징벌
다른 사람보다 특권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걸맞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 만민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구별되었습니다(출 19:6).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었습니다(출 20:3-6). 그럼에도 그 백성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며 배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고 탄식 하였습니다(사 1:4). 결국 그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도 불신앙 운동을 전개하던 무리들이 모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민 14:34, 16:31-35).
3) 역사의 교훈
사도 바울은 선진들의 역사를 조명하고 그들이 남긴 성공과 실패의 자취를 교훈삼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에 보면 출애굽 기간에 있었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들과 축복의 내용을 소개하고 또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광야에서 멸망당한 일을 거론하면서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과거의 역사를 보는 잘못된 관점들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과 율법을 알고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내세운 것처럼 과거의 역사를 자랑하며 조상을 팔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지난날의 역사를 오늘의 관점에서 판단하며 부끄러운 역사로 매도하는 경우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올바른 자취는 그대로 지키며 발전시키되 잘못된 걸음은 돌이켜서 불행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현재 일에 민감한 사람
예레미야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온 선지자입니다. 강대국 바벨론이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위협해 오는데 유대 나라의 지도자와 백성들은 극심한 대립과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때였습니다.
1) 유대 왕국의 종말
나라의 장래가 불안해지면서 백성들은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제각기 자기의 살길을 찾기에만 급급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적 상황은 주권국가의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유대나라 16대 요시야 왕(BC 639-608)이 므깃도에서 애굽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후 왕실은 애굽과 바벨론에 의하여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애굽왕 바로 느고가 그를 폐위시키고 여호아하스의 동생 엘리야김을 왕위에 올린 다음 이름을 여호야김이라고 고쳤습니다(왕하 24:29-37). 여호야김은 애굽과 대립하면서 3년 동안 바벨론을 섬겼으나 결국 주변국들의 협공을 받고 무너졌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지만 불과 석 달 만에 바벨론으로 붙잡혀 가고 그의 삼촌 시드기야에게 왕위가 넘겨졌습니다. 시드기야는 즉위한 이후 계속 바벨론에 시달리다가 드디어 11년 4월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2) 범죄한 백성의 불행
사회적인 혼란과 국가적인 멸망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도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하고 외쳤습니다(렘 5:1). 그만큼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 상태에서 모두가 다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24:3에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멜의 현실 인식
하나멜은 매우 영특하고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세를 파악하고 민첩하게 자기의 밭을 팔고자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끌려 갈 것인데 그럴 경우 가지고 있는 토지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헐값에라도 팔아 현금을 챙기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께 대한 비전이 없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익만을 챙기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봉착할 때마다 인내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거나 어떻게든지 피해 가려고만 애를 씁니다.
3. 미래를 여는 사람
선지자 예레미야는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졌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지만 신령한 눈을 열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미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렘 1:9-11).
1) 새 언약의 환상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몸이었지만 신령한 눈을 열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다음 시대의 일을 내다보았습니다. 그것은 찬란한 메시야 시대의 환상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1:31-33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신약적인 축복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국토가 황폐될 것을 생각하여 토지를 처분해 버리는 지경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희망을 남겨 두셨습니다. 본문 15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멜의 밭을 사라
이 말씀은 시위대 뜰에 갇혀있는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분부입니다. 지금 예레미야의 처지는 밭을 살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있는 것까지 팔고 떠나갈 준비를 하는 때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무모한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셨기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하시는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만 보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반드시 그들 앞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미래가 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과감하게 투자를 하는 사람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어 내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어느 때나 꿈같은 미래의 축복은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 우리는 복음축제를 통하여 미래를 맡게 될 어린세대에게 투자를 하려고 합니다. 이일이 우리 세대에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목회자 칼럼 - 아름다운 결혼식
요즈음 세상에는 “결혼식 공해”라는 말이 있다. 한 쌍의 젊은이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출발하는 결혼예식이 야 말로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진심어린 축하를 받으며 축복 속에 이루어져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일부 인사들의 잘못된 인식 때문에 신성해야 될 결혼문화가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결혼의 기본적인 가치를 망각한 채 부모들의 자존심 대결로 얼룩진다든지, 분수에 넘치는 혼수와 예단, 허례허식으로 치러지는 행사, 신혼여행, 자기 과시형의 낭비성 소비문화 등 정말 고쳐야할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나도 자식들을 결혼시킨 사람이고 또 교회 안팎의 여러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축하해야 할 결혼식이 많이 있다. 요즈음 웬만한 결혼식장은 주말의 황금시간대에 여러 사람이 몰려 있어서 큰 혼잡을 빚기 일쑤이고 예식 또한 진지함이나 엄숙함 보다는 요식행위처럼 치러지곤 한다. 일생을 통하여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해야 될 신랑 신부나 가족들마저 가슴에 와 닿는 감동도 느끼지 못한 채 정신없이 스쳐 보내고 만다. 하객들도 여기 저기 겹치기로 쫓아다니며 혼주에게 눈도장 찍기와 축의금 전달하는 것으로 결혼식의 축하를 대신하곤 한다.
지난 4월 7일 안동 재활원에서 치러진 정하연군과 김혜진양의 결혼식은 근래에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결혼식이었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만큼 감동적이었다. 신랑은 미국(UCLA)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한 청년이고 신부는 프랑스에 있는 파리6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신랑의 아버지는 태국 방콕에 있는 외국인 회사 사장(CEO)으로 오랫동안 해외 생활을 해왔다. 내외분이 그곳에 있는 한인교회에 장로와 권사로 봉사하면서 각종 선교사역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선교사적인 삶을 사는 모범적인 크리스챤이다.
한편 신부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미얀마 정부의 요청으로 그곳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고 국가 기관의 중요 인사들에게 정신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분이다. 사돈되는 두 집이 다 경건한 신앙인이며 명망 있는 분들이다. 이들이 편리하고 좋은 도시의 예식장을 마다하고 산간벽지에 있는 재활원에 가서 결혼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부터 특이하다고 여겨졌다. 두 분이 의논 하여 청첩장을 돌리지 않기로 했고 또 참석하는 손님들에게서 축의금도 받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애경사에 초청을 하는 것도 상호간 품앗이가 되어야 하는데 두 분 모두 20년 이상씩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친척과 친구들에게 청첩을 하기에는 체면이 없다는 것이다.
그날 예식을 재활원에서 하게 된 이유도 신랑과 신부가 신체의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재활원 식구들 속에 들어가서 저희들이 가지는 희망적인 축복의 잔치를 그들과 함께 나누고자 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의 생각과 달리 거기 오셔서 성의껏 주고 가는 축의금은 사양하지 말고 받아서 그곳 시설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도서와 비품을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결혼식은 97세의 고령이신 방지일 목사님의 주례로 간결하게 거행되었는데 식이 끝난 후 아래층의 넓은 연회장에서 하객들과 함께 피로연을 가졌다. 잔치 상에는 그곳 재활원 식구들이 푸짐하게 장만한 음식이 있었고 그 지방 풍물인 안동식혜도 후식으로 먹을 수 있었다. 그날 결혼식에는 안동 사람들뿐 아니라 대구와 부산 그리고 서울에서도 많은 분들이 참석했는데 여느 결혼식처럼 인사치례로 왔다가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토요일 오후 바쁜 시간인데도 느긋하게 앉아서 음식을 같이 먹으며 여유 있는 모습으로 참관하였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신랑신부나 가족들이 손님들과 함께하는 축제에 의미를 두었다. 결혼식 사진도 신랑신부나 가족들만 찍지 않고 오찬을 끝낸 후 넓은 잔디밭에서 모든 하객들과 함께 촬영을 하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진심어린 축하가 있는 결혼식, 축복의 말씀이 있는 결혼식, 나눔이 있는 결혼식, 기쁨을 같이하는 결혼식, 소박함 가운데 밝은 웃음이 가득한 결혼식, 화창한 봄 따사로운 날씨만큼이나 밝고 여유로움을 느끼는 결혼식이었기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듯하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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