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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27쪽에 있는 글입니다.
37. 교회 봉사부터 먼저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장 3~8절
우리 몸으로 뛰는 삶 전부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가 되도록 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론으로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한 진리라 할지라도 휴지 조각이 되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이 3절부터 우리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3절에서 13절의 내용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 이하에서는 사회에서 드릴 산 제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서상으로 볼 때 교회 안에서부터 먼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우선순위가 교회 쪽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열 번 들어도 옳은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나가서 바로 살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에게 제대로 하지 못하는 봉사를 세상에 나가서 잘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하면 교회 안에서부터 먼저 봉사해야 합니다. 왜 교회 봉사부터 먼저 해야 합니까? 대략 세 가지로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우리의 몸이요, 각자는 그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 몸의 지체라고 할 때에 자연히 그 몸은 다름 아닌 내 몸이요, 우리 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
이것을 보면 교회가 곧 우리의 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대원칙 하나를 주셨는데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주목하십시오. 이웃이 바로 '내 몸'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내 몸'은 아닌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동시에 내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이웃에 비해 훨씬 가까운 대상이라는 말이 됩니다. '네 이웃'은 우리 몸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이고 '교회'는 우리 몸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다른 형제를 섬기라고 하는 것은 "네 몸과 같이 섬기라"는 말보다도 더 농도가 진합니다. 그것은 "네 몸을 섬기라", "네 몸을 사랑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있는 형제를 섬기는 것은 곧 내 몸을 위하는 것이요, 내 몸에게 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당연히 내 몸을 섬기는 것부터 앞세워야 합니다. 내 몸부터 먼저 섬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내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교회 봉사는 어느 것보다도 우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몸도 변변히 섬기지 못하는 주제에 남을 섬긴다고 큰소리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 몸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형제들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받은 은사가 있다
둘째로, 우리 모두가 주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교회 봉사를 먼저 해야 합니다. 지체라는 말은 몸에 붙어 있는 다양한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섬겨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4절).
이것은 몸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우리 몸을 살펴보세요. 우리 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몸에 붙어 있는 각 지체의 기능은 매우 다양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직분'은 교회의 어떤 직책이라기보다는 몸의 기능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지체가 똑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손은 손대로,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다 각각 기능이 다릅니다. 그러면 왜 지체마다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 몸을 섬겨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6절).
그렇습니다. 제가 받은 은사는 교우들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은사가 다른 만큼 제가 교회 지도자로서 져야 할 책임이 다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고, 똑같이 헌금하고, 똑같이 교회에 봉사하는데 무엇이 다르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따져 보면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일을 하도록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한 기능과 역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은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잘 섬기라고 성령께서 지체된 우리에게 사람따라, 믿음따라 합당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중요한 여섯 가지 은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가 여섯 가지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양한 은사 중에서 몇 가지 예를 들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은사는 특수한 소수에게만 허락하신 선물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3절).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중에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은사를 못 받았다면 그 사람은 지체가 아니 것입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받은 대로 일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묻어 두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주님의 호된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섯 가지 은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언, 섬기는 것, 가르치는 것, 권위하는 것, 구제하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섬김의 은사는 봉사하는 일에 남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의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우리가 다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중에는 섬기는 일에 특별히 뛰어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우들에게 이런 은사를 좀더 많이 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가르침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나 순장은 다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똑같이 가르치는 일을 해도 이 분야에서 남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르치면 놀라운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 중에는 구제 사업에 대단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다 구제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별로 없는데도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면 앞장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남을 위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지만, 사실은 받은 은사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권위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권위라는 말은 남을 특별히 격려하고 붙들어 세우고 위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귀한 은사입니다. 한 예로, 좌절 속에 빠져 있는 어떤 사람을 위로하려고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똑같이 권면을 했지만 두 사람의 말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주저앉았던 사람이 힘을 얻고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세 사람이 똑같이 권면했지만 왜 한 사람만이 그와 같이 아름다운 열매를 거둡니까?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에 대하여
여섯 가지 은사 중에서 예언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 가운데 요즈음처럼 예언을 한다고 여기저기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특별히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리고 예언과 방언을 비교해 볼 때 방언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사람들을 권위하고 안위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언은 참 좋은 은사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예언이란 무엇일까요? 두 가지의 대립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풀어서 가르치며 하나님 나라의 꿈과 환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 견해대로 한다면 설교도 예언에 속합니다. 천국을 이야기하는 전도도 예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는 것이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에 관한 것이면 모두가 예언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받은 은혜 시대의 사람들은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가릴 것 없이 꿈과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들이 됩니다(행 2:17, 18). 예언을 이처럼 포괄적인 의미로 보면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의 진리인 66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흔히 생각하듯 개인의 사사로운 장래사를 이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예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입장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은 우리 자녀들이 하는 예언이 어떤 것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평신도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를 일컬어서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람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아뢰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언은 어느 쪽에 속하는 것입니까?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우리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행 2:17).
이 예언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깊고 오묘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고, 점점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꿈과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우리는 모두 예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남보다 특별히 두드러지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봅니다. 특히 세계 복음화의 꿈을 안고 한 생을 하루처럼 보내는 위대한 선교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교회 일각에서는 다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합니다. 쉽게 말해서 개인에게 일어날 장래사나 세계 역사에 나타날 어떤 일을 미리 알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예로 사도행전 11장 28절에 나오는 아가보의 예언을 들고 있습니다. 아가보는 성령의 계시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아시아 지역 전체에 큰 흉년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한 일이 있습니다. 이 예언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적중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예언하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전적으로 틀렸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성령은 언제든지 원하시면 앞날의 일을 예언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라고 해서 그런 예언은 절대 불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우리나라가 일본과 합방이 되고 나서 약 30년이 흐른 후의 일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점점 불리해지니까 일본 당국은 한국 교회를 더 심하게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투옥시켰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하나님께서 일본의 장래와 한국 교회의 내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예언의 은사를 소수의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것을 봅니다. 그 중의 한 분이 박관준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는 의사였고 믿음이 아주 투철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미리 알고 있었고 그 내용을 일본 당국에 알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본으로 가는 데는 문제가 따랐습니다. 그는 일본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주님 앞에 기도한 끝에 응답으로 만나게 된 분이 일본어를 탁월하게 구사하는 안이숙 사모님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본 국회의사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유황불을 비같이 쏟아 부어 이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오" 하고 큰 소리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붙들려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는지요. 6년 후, 그 나라에 가공할 만한 원자탄이 터져서 진짜 유황불 세례를 받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와 같이 특별한 시기, 특별한 경우에는 앞으로 될 일을 사전에 예언하는 은사를 받는 자들이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적으로 보면 '예언'은 특별하고 희귀한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거의 사라진 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확히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2천 년 가까이 예언자라고 불리울 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예언하는 자가 귀하다는 데 있지 않고, 너나 가릴 것 없이 아무나 예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깊은 산속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했다는 사람 중에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중에는 예수 점쟁이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틀림없이 마귀가 그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마귀가 점을 치면 얼마나 정확하게 맞추는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소위 예언한다는 자들이 점쟁이와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 이름으로 점친다는 것뿐입니다. 마귀가 예수 이름 들고 나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예언을 잘한다는 사람에게 찾아갔습니다. 사업을 해야 좋을지 안 해야 좋을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예언자는 일을 벌이기만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질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곁들여서 돈을 벌면 얼마를 반드시 자기한테 헌금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힘을 얻어 사업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크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점쟁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자칭 예언자라고 떠벌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모 교회 권사였습니다. 요즘에 이런 예수 점쟁이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길은 무엇입니까? 말씀 안에서 무엇이든지 겸손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성령이 알게 하시고 확신을 갖게 하신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다른 이상한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사사로운 개인의 문제를 가지고 성령이 들려 주신 음성이 어떻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십중팔구는 사탄의 소리거나 사람의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이런 소리를 하는 자가 있으면 귀를 막아버리십시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도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받으면 안 될까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답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사를 받았으면 섬겨야 합니다. 은사는 바로 소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받은 은사를 가지고 봉사해야 합니다.
겸손으로 봉사하라
셋째로, 사회에 나가서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먼저 섬기는 자의 삶을 익혀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 봉사를 먼저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한다고 해서 전부 다 유익하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덕을 끼치지 못하면 참다운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덕을 세우는 봉사인가를 알려면 교회에서 그것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로서의 올바른 인격을 터득한 다음에 세상에 나가야 불신자들 틈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올바른 봉사인지 3절이 가르쳐 줍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사람마다 분수에 맞게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봉사를 할 때는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분수 안에서 남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올바른 봉사를 배운 사람은 어디를 가나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봉사에 있어서 무엇이 겸손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서야 할 자리에 서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분수에 걸맞지 않는 일을 넘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옥 목사의 믿음이 다르고 여러분의 믿음이 다릅니다. 우리 각자가 처한 형편도 다릅니다. 성령께서 이것을 정확하게 아시고 그 사람에게 꼭 맞는 분량의 은사를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지나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설혹 똑같은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같은 양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형제가 못할 수 있고, 다른 형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다른 형제에게 내게 없는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내가 못하는 일을 저 형제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내가 중요한 것처럼 다른 형제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일하는 사람입니다. 열심이 지나치다 보면 가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이 뜨거워도 자기라야 할 수 있다는 식의 교만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면 뭘 합니까? 그런 잘못된 아집을 가지고 뛰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골칫거리만 될 뿐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편이 낫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최소한 가만히 있으면 남에게 피해는 입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나서서 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거만한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어 있고,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든 장로든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봉사자가 되려면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자기 평가를 정직하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자기 은사에 만족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가 남의 것에 비해서 어떤 면에서는 빛이 안 나는 은사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땀 흘리며 노력해도 사람이 칭찬하지 아니하는 은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혹 자기가 하는 일이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라 해도 받아들입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좋은 일,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충성합니다.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아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든지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못합니다" 하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정직성의 결여로 인하여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각자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정직하게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사에 걸맞게 직분을 맡아서 섬기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는 지체의 섬김을 통해 자란다
욕심이 지나쳐 앉아서는 안 될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형제에게 기회를 주었다면 온 교회가 크게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자신이 쥐고 있어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주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지체의 기능을 통해 교회를 움직일 수 있게 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다양한 신분, 다양한 은사를 가진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섬길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세계 강국으로 지난 반 세기 동안 군림할 수 있었습니까?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일 민족은 아니지만 통일성을 가진 국민으로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잭슨 목사는 비록 듀카키스에게 패배했지만 당시에 그가 한 연설은 길이 후대에 남을 명연설이었습니다.
"마이클 듀카키스의 양친 중 한 분은 의사였고 한 분은 교사였습니다. 나의 부모는 하인이었고 미용사였고 경비원이었습니다. 듀카키스는 법률을, 나는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종교, 지역, 인종의 차이, 경험과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란 나라의 진수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다수의 차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와 나의 오솔길이 한 곳에서 만나도록 한 것입니다. 듀카키스의 선친은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앞 세대가 무슨 배를 타고 미국에 왔든지 간에 그와 나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 가지 실,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천으로 짜여진 담요가 아닙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보냈던 나의 유년 시절, 나의 어머니는 담요 한 장 마련해 주지 못하셨지만 슬퍼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춥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털헝겊, 실크, 방수천, 포대 자루 등 그저 여러분들의 구두나 간신히 닦아낼 수 있는 조각천들을 모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기운찬 손놀림과 튼튼한 끈으로 그 조각천들을 꿰매어 훌륭한 누비 이불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힘과 아름다움과 교양을 상징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른바 '누비 이불'을 건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힘은 바로 이 '누비 이불'과 같은 다양성에서 나온다고 잭슨 목사는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다양한 지체를 가진 교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배경이 다릅니다. 자라난 환경도 다릅니다. 교육 수준도 다릅니다. 생활 형편도 다릅니다. 재능도 다릅니다.
하나님이 왜 교회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 놓으셨을까요? 이 다양성에서 교회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목사라고 해서 다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주시지를 않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목사는 적어도 너덧 가지 은사는 구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너덧 가지 은사 중에서도 많이 받은 은사가 있는가 하면, 적게 받은 은사도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윌로크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신의 영적 은사를 정직하게 분석해 본 일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 일이 너무 많다 보면 목사라도 영적으로 침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목사는 이런 침체를 느낄 때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은사 점검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나의 영적 은사를 정직히 분석했다. 가장 큰 은사는 리더십, 다음은 복음전도 설교였다. 그 다음이 가르치는 것과 행정이었다. 나는 즉시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사역자를 두 사람 구해서 그 일을 맡겼다." 그는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출중하지 못해서 강해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데 20시간 이상이 걸렸고 그로 인해 자주 탈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가르치는 일이 그만큼 그에게는 과중한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큰 은사인 리더십이나 전도 설교가 그렇지 못한 은사 때문에 크게 지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보다 가르치는 은사를 훨씬 많이 받은 목사를 청빙해서 그 일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전도 설교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습니다. 그의 결단은 교회를 위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말해 볼까 합니다. 저는 가르치는 은사와 훈련하는 은사를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이만한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을 보면 리더십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은사는 별로 없다고 생각됩니다. 또 제가 약하다고 생각되는 분야는 상담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겸손해야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전도 사역과 상담 사역을 할 수 있는 은사받은 교역자들을 모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 혼자 다 할 수 있다는 사람치고 겸손한 사람이 없습니다. 겸손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고, 그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자란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받은 은사대로 열심을 다하라
우리가 겸손하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은사도 그렇지만 다른 형제의 은사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받은 은사가 어떠하든 간에 불평하지 아니하고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은사가 빛나는 것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를 잘 관리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분수에 맞게 주셨다는 것을 믿으면 겸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 교회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시무하고 있는 사랑의교회에는 약 2,500명의 교우들이 평신도 지도자로서 받은 은사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원, 차량 관리, 주방 일, 루디아회, 마리아회, 순장, 대학부와 청년부 리더, 그리고 현재 제자훈련 또는 사역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은 전체 교인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무엇을 합니까? 주일에 교회 나와서 예배만 드리고 갑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개인에게 주신 은사가 있는데 그 은사를 사용할 생각은 안 하고 교회만 드나드니까 아깝다는 말입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조금만 봉사해 주면 다른 형제들이 그만큼 활기차게 영적으로 자랄 수 있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큰 몫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너무 몸을 사리고 봉사를 안 하니까 주님이 손해를 보시고, 우리 자신도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겸손히 섬기는 문제를 다룬 이유를 다시금 정리해 보면, 사회에 나가서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안에서 내 몸인 형제들을 겸손하게 섬기는 법을 몸에 익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인 교회에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바깥 세상에서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날마다 교회에 와서 교회 일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가끔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 중에 집에 있는 시간은 다섯 시간 정도이고, 나머지 열아홉 시간은 교회에 와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가정생활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요? 분명히 균형이 깨어진 가정생활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일도 주의 일이요, 교회 밖에서 하는 일도 주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 둘을 균형 있게 영위해 나가야 합니다. 결코 균형을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균형과 우선순위를 혼동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균형을 잡아서 교회 일도 하고, 집안 일도 하고, 회사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교회 봉사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것을 훈련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회사에 나가서 제대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우리가 우선순위를 분명히 할 때 바른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차량 안내를 하는 분들은 정말 고생이 많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수고를 늘 마음에 담고 유심히 살펴봅니다. 차량안내를 잘하는 것을 놓고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교통 정리를 하는 형제들 가운데는 특별히 순발력이 뛰어나고 센스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차 한 대 주차하는 데 안내자가 몇 번 손을 흔드는가 하고 제가 세어 본 적이 있습니다. 고분고분 잘 따라와서 주차하는 차량은 너덧 번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나갈 때 빨리 빠져 나갈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려고 안내자의 말을 안 듣고 왔다갔다 하는 차량은 안내자가 열다섯 번 정도 손을 들어야 겨우 제자리에다 주차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안내를 하는 분들은 환한 얼굴로 기쁘게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차량 안내 봉사를 사시사철 한 주도 안 빠지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름에는 뙤약볕에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겨울에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기쁘게 그 일을 감당합니다. 대체 그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차량 안내를 맡아 봉사를 잘하는 사람이 직장에 가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또 이웃에게는 얼마나 다정하게 잘해 주겠습니까? 교회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법을 배웠으니까 누구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차에서 내리면서 "어이, 이 차 좀 대 줘요" 하고 마치 자기 기사에게 명령하듯 하고는 성경책을 들고 예배당으로 들어가 버린다고 합니다. 그의 눈에는 봉사자가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인쯤으로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안내하는 형제들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봉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아니면 이런 훈련을 어디서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주님의 몸이요, 나의 몸인 교회에서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얼마든지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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