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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교회 안에서는 이렇게 봉사하라

by 【고동엽】 2022.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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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49쪽에 있는 글입니다.

 

 

38. 교회 안에서는 이렇게 봉사하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로마서 12장 9~13절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산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봉사를 해야 합니까?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인 동시에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형제를 섬기며 주를 위해 헌신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도록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형제를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는 데 필요한 재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대로 겸손하게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형제를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장에서 살펴본 말씀의 요지입니다.

 이 시간에는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네 가지 기본적인 원리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봉사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유익을 주지 못하는 봉사도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뛴다고 해서 다 경주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형제를 섬기고 교회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경기 규칙대로 뛰어야 경주가 되듯이 교회 안에서 봉사할 때도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원칙대로 봉사해야 비로소 바른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교회마다 크고 작은 시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수습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자주 당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교회는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시험을 당할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회라도 봉사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입니다. 수가 적고 많고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마다 재물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합니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원리대로 봉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는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부리는 텃세 때문에 심한 진통을 겪습니다. 텃세가 너무 심해서 교인 뿐만 아니라 교역자까지도 견뎌내지를 못합니다. 늦게 들어온 교역자가 몇 년 일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텃세에 밀려서 자꾸 쫓겨 나갑니다. 새 교인들이 들어와도 자기들 눈에 들지 않으면 정착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교인 수는 더 이상 늘지 못하고 교역자는 자꾸 바뀌는 안타까운 현상이 반복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봉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면 무엇합니까? 쓴뿌리 노릇을 하기 위해 부지런을 떠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교회에서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원리를 따라 봉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되고 형제에게 유익을 주는 아름다운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기 위해서 꼭 명심하고 지켜야 할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두 열두 가지 원리가 나옵니다만 그것을 크게 묶어서 네 가지 원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으로 봉사하라, 둘째, 열심히 봉사하라, 셋째, 어려워도 봉사하라, 넷째, 나누면서 봉사하라. 이 원리를 한 가지씩 공부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아울러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발견하고 보완하여 하나님 앞에 바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봉사하라

 

 첫째, 사랑으로 봉사하라는 원리를 살펴봅시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절).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랑의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 사랑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거짓이 숨어 있으면 안 됩니다. 사랑은 연극을 하듯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진실해야 합니다. 혹시 '선반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선반 위에 뭔가 귀한 것이 얹혀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갖은 아양을 떨며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빗대어서 '선반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기 눈에 드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손에 넣겠다는 얄팍한 계산에서 '선반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얻을 유익을 미리 따져 보고 사랑을 하는 사람은 벌써 위선자입니다. 그것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은 악을 미워합니다. 왜 악한 것을 미워합니까? 마음에 악을 가지고 형제를 대하면 그것은 반드시 형제를 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마음은 형제를 해하는 데 사용됩니다. 마음에 악을 품고 있으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겉으로는 금방 표가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형제를 해치게 되고 잘못된 곳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마음에 악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형제를 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미워해야 합니다. 그 대신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형제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선이라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서라도 그 선을 따르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선에 속하라"는 말은 '선에 매달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의도, 선한 감정, 선한 목적, 선한 동기가 없이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을 보면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절).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한 형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나 이제 갓 들어온 사람이나 일단 예수 믿는 사람으로 교회에 소속되었으면 믿음 안에서 서로 형제라는 뜨거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형제를 대할 때 인간적인 조건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구별하는 악한 면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서 조금 못하다고 생각되면 얕잡아 보려고 하는 악한 근성이 있습니다.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악한 생각을 품는지 정말 끔찍합니다. 차라리 비교하고 싶으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사랑이 빠져버리면 하나님 앞에 남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굉장한 은사를 받아서 천사의 말을 하고, 굉장한 은사를 받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풀어 가르치고, 굉장한 은사를 받아 자기의 재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해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요. 아무리 해 봐야 아무 가치도 없으니까요. 아무리 해 봐야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시니까요. 사랑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사랑은 주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이것은 주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

 

 그러면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본능적으로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몸은 누구나 다 사랑합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 사랑의 뿌리가 다분히 본능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자기 몸을 참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이웃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를 사랑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가까이 있는 이웃만이라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옛 계명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은 옛 계명과 얼마나 다릅니까? 새 계명은 본능적인 요소에 뿌리를 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사랑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 앞에서 가슴이 찔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런 사랑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약하다는 구실을 가지고 주님의 명령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높은 차원의 사랑을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봉사해도 이 사랑이 빠져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점수를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둔 봉사를 해야 합니다.

 

 사랑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을 놓고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옥 목사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어?" 하고 마음 속에 의문을 가지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변에서 가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들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A :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B : 네.

 A :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B : 믿음으로요.

 A :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B :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A : 그러면 또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무엇으로 보여주시겠습니까?

 B: 제 믿음을 가지고 보여 줄 수 있습니다.

 A : 왜 믿음을 가지고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B : 성경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구절절 다 옳은 말입니다. 질문에 답하는 사람의 말이 틀린 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대답은 될 수 없습니다. 거짓 신자도 얼마든지 그런 식의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참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은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표현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은 성경에 꼭 두 번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 말씀의 골자는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사망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하나님이 지배하는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말씀이 다른 곳에 또 한 번 나옵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무슨 뜻입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의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싶으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논할 때에는 요한복음 5장 24절과 요한일서 3장 14절을 한데 묶어 놓고 검토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분명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동시에 그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구원받은 증거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합니다.

 흔히들 구원 이야기를 하면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문제를 가지고 구원이라고 하면 이상한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무덤을 깨고 부활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 시로부터 영원히 삽니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시간을 따지면 둘 다 영원합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든지 지옥에서 영원히 살든지 다 영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가지고 영원을 논하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지고 논해야 합니까? 영원의 질을 가지고 논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질을 가진 영원이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영원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고 할 때 그것이 축복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형제들의 따뜻한 사랑에 둘러싸여서 영원토록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이요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옥은 영원히 사는 곳이기는 하지만 사랑이 없는 곳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영원토록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각자 자기를 향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에게 진실하지 못한 사랑은 없는가? 나에게 형제 의식이 빠진 사랑은 없는가? 나에게 악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랑은 없는가? 나에게 남을 멸시하는 사랑은 없는가? "당신은 정말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라

 

 둘째, 열심으로 봉사하라는 원리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1절).

 

 여기서 '열심을 품고'라는 말은 '가슴에 불을 안고'라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이 충만하여', '가슴이 뜨거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불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뜨거운 열정은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뜨거운 열심은 그리스도인의 빼놓을 수 없는 공통된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미지근하게 다니다가 갑자기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은혜받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열심을 내면 은혜받은 사람이요, 열심이 식어지면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만큼 기독교 신앙과 열심은 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명한 신학자 중의 한 분인 한철하 박사는 "기독교는 열심의 종교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신학을 일컬어 "나의 신학은 열심의 신학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열심이 없으면 건물이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라고 해도 이미 죽어버린 교회입니다. 그만큼 열심은 중요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미지근한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 16절에서 이 점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노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 16).

 

 열심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못 봐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열정이 담겨 있지 않은 찬송, 기도는 제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열심이 없어 봉사를 잘하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 오는 것조차 싫다는 말씀입니다. 열심이 없는 사람을 주님이 얼마나 싫어하십니까? 성경에서 이 말씀만큼 우리에게 충격을 던져 주는 말씀이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기독교 역사에는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주를 섬기려 하고 봉사하려는 사람을 멸시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좀 유식하다는 사람일수록 열심을 내는 사람을 은근히 멸시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미지근한 것을 좋아하는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그들 표현대로 한다면 광신자 티를 내지 않을수록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이런 스타일의 생각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한편 '병든 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당할 만큼 언동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교회일에는 남보다 열을 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병든 열심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심이란 사람들한테도 칭찬 듣는 열심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 밖에서 그런 봉사를 하리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는 분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주님의 질책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신을 변명하거나 합리화시킬 근거가 있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아마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남이 알아 주든지 알아 주지 않든지 구석구석에서 혼신의 힘을 바쳐 충성하는 형제 자매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그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교인 수가 많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형제 자매들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아도 주님만 바라보고 기쁨으로 헌신하는 형제 자매들이 많기 때문에 저는 목회자로서 무한한 긍지를 느낍니다.

 각 부서마다 수고하는 분들이 많지만 주일학교에서 우리 자녀들을 위해 땀 흘리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제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의 교육을 전담하고 있는 목사님에게 자랑할 만한 교사 한 분을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사를 잘해서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주인공은 김경임 집사입니다. 이분은 나이가 45세인 평범한 주부입니다. 거주지는 사랑의교회에서 먼 거리에 속하는 노원구 상계동 주공아파트입니다.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을 맡아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편은 김윤환 집사, 한국전력에 근무하는 분인데 그분도 함께 주일학교에서 봉사합니다. 슬하에 자녀가 둘 있습니다.

 이분들의 주일 스케줄이 어떤지 보십시다.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합니다. 한 시간 반 걸려서 교회에 도착합니다. 9시 30분까지 교사 준비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기도회가 끝나면 11시 10분까지 1시간 40분 동안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말씀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 드리면서 씨름합니다.

 11시 30분부터는 대예배에 참석하여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1시부터 2시까지 점심식사를 하고 2시부터 3시까지는 교사 중보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기도회가 끝나고 나면 4시부터 6시까지 2시간 동안 어린이 제자훈련을 지도합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각은 언제입니까? 남편은 애들 때문에 조금 일찍 돌아가도 부인은 8시쯤에 귀가한다고 합니다.

 왜 이 부부가 이와 같은 수고를 합니까? 돈벌이를 위해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식 교육을 위해서 그렇습니까? 진급을 위해서 그렇습니까? 대체 누구를 위해서 수고의 땀을 흘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면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그토록 시간 바치고, 힘을 쏟아서 지치도록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녁에 집에 가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분명 주님이 그들을 각별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아름다운 열심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워도 봉사하라

 

 셋째, 어려워도 봉사하라는 원리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12절).

 

 이 말씀은 현실적으로 보아서는 우리에게 직접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마음을 떼고 오직 하늘에 있는 영광만을 소망하는 것이 하루에 기대할 수 있는 낙의 전부라면 그것은 절대로 평범한 삶이 아닙니다. 문을 쾅쾅 두드리듯이 다급하게 부르짖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환난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12절 말씀은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기는 하되, 환난의 때를 만났을 때를 전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봉사하고 주님을 위해서 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게 봉사를 하면 주님께서 매일 평안함을 주시고 어려운 일이 없이 형통하게 하실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꼭 환난 핍박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봉사를 하기 때문에 자주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육체적인 건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시간에 쫓겨서, 하던 일이 정상적으로 안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가정에 우환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남에게 욕을 먹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의 일에 열심히 봉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런 때일수록 기뻐하면서 봉사하고, 인내하면서 봉사하고, 기도에 더 힘쓰면서 봉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봉사를 중단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물론 건강이 나빠지면 쉬어야 합니다. 가정에 특별히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작은 어려움을 핑계로 하던 일을 그만두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워도 봉사해야 합니다.

 어떤 핑계를 대고 봉사를 그만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은사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둔 분이 있다면 자기가 받은 은사에 맞는 봉사 영역을 찾아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도 있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그만둔 분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 핑계로 봉사를 그만두는 것은 주님 앞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와 같은 봉사에 직접 동참하지 못한 분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마냥 이런 식으로 교회생활을 이어나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당신에게 "아니야, 너는 그래서는 안 돼. 교회를 위해 봉사해. 세월을 그렇게 보내서는 안 돼"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관심을 갖는 영역이 어디입니까? 그 영역을 찾아가십시오. 없으면 일을 만들어서라도, 놀고 지내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누면서 봉사하라

 

 끝으로, 나누면서 봉사하라는 원리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절).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 대부분이 극빈자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생활이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당시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 대부분이 가난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어렸던 시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 찾아갈 곳이란 뻔했습니다. 성도의 가정이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라도 이름만 듣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집밖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돈이 없으니 여관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이 로마는 당시 가장 화려한 국제 도시였습니다. 사방에서 손님들이 찾아들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거절하기란 대단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너무 자주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시험에 든 사람도 교회 안에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기 식구들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손님을 대접해야 했고 자기 식구들이 거처할 자리도 좁은데 손님을 위해 방을 내주어야 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상황에서는 정말 사랑으로 봉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불평하지 말고 가진 것을 나누면서 봉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믿는다는 이유로 찾아가서 남의 집 신세를 지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봉사의 원칙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 안에서 형제를 섬기려면 가진 것을 나누고 경우에 따라서는 손해를 보면서도 봉사해야 합니다. 입에 발린 말로만 봉사하지 마십시오.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각자가 가진 귀한 것을 나누어 주면서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원래 봉사는 희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신문에 <8공주 가정>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공주라고 하니까 듣기는 좋지만 막상 딸이 여덟쯤 되고 보면 난감한 일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식구가 많으면 좀 넉넉하다고 해도 가계를 이끌어 가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어머니는 봉제 공장 종업원으로 일을 하니 살림살이가 얼마나 빠듯하겠습니까? 딸 둘은 시집을 가고 이제 여섯이 남았는데, 이 아이들이 똑똑해서 모두 공부를 잘합니다. 그러니 학비 조달도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이처럼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남의 어느 산동네에서 방 두 칸에 세들어 사는데 주인이 또 방세를 올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덟 식구가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또 방세를 올려 달라고 하니 막막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그 가정을 탐방한 기자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고 본인들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이 딱한 사정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 기사를 읽은 우리 교회 몇 분이 필요한 액수를 마련해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나누면서 섬기는 생활입니다. 손에 있는 것을 꽉 쥐고 내놓지 않으면서 남을 섬긴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식으로 처신한다면 어떻게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부터 나누면서 봉사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벤 다이크의 <대저택>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가 인도하는 대로 자기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주 작은 오두막이 나타났습니다. 보기에도 민망한 그 오두막이 그가 살아야 할 집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 옆에서 천사들이 한창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고 있었습니다. 누구 집이냐고 물었더니 자기와 한 동네에 살던 초라한 의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에 비해 형편없는 그가 어떻게 저런 맨션에서 살 수 있느냐고 항의조로 말을 했더니 천사가 부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짓고 있는 건축 자재는 모두 그 집에서 살 본인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부지런히 보내온 것들입니다. 당신은 너무 적게 보냈어요. 당신이 평생 보낸 자재만으로는 이 오막살이의 지붕도 제대로 씌울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 대저택을 보십시오. 당신이 잘 아는 그 가난한 의사 집인데 그는 평생 동안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가 남을 위해 쓴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곳에 도착했어요. 자재가 너무 많아 저렇게 큰 저택을 짓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뭔가 우리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교회 봉사의 네 가지 원리를 정리해 봅시다. 사랑하면서 봉사하라. 열심히 봉사하라. 어려워도 봉사하라. 나누면서 봉사하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교훈을 잊지 맙시다.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봉사를 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의 몸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원합니까? 교회 안에서부터 주님이 가르쳐 주신 원리대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삶이 매일매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이와 같은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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