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 물결·부흥의 파도 (창18:22-33)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와싱턴이 장군시절 미 의회에 출석하여 연방군대 창설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의원이 연방군인의 수를 3천명 이내로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의장이 와싱턴 장군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와싱턴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하지만 그 경우 미국에 쳐들어 오는 적들도 2천명 이내이어야 한다는 조항도 의결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적들이 쉽게 이길 수 있을 만큼 만만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공격하는 적은 사방에서 휘몰아쳐 오는 산불처럼 거세고도 많습니다.
산에 올라가 사방에서 몰려오는 산불을 만났을 때 살 수 있는 길이 뭔지 아십니까? 이때 등산객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맞불작전을 펼치는 것입니다. 사탄이 공격의 불화살을 당길 때에, 유혹의 커다란 불길이 우리에게 덤벼들 때에 우리는 더 큰 기도의 불, 성령의 맞불을 지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주위에는 사탄의 불화살 공격을 막을 힘이 없어서 피흘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서 그 짐에 짖눌려 신음 조차할 수 없는 사람들, 기도의 입조차 벌릴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들, 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이 병든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시대, 우리교회, 우리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Again 1907 - 부흥의 높이는 기도의 깊이만큼 더해질 것입니다. 부흥의 불길은 기도의 불길만큼 커질 것입니다.
한 시대, 한 교회, 한 지역의 커다란 부흥 뒤에는 언제나 기도의 큰 불길이 있었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는 명백히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부흥을 체험하기를 원할 때마다, 새로운 축복의 전기를 마련하기를 원할 때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양한 기도 중에서도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도고, 중보기도, 중재기도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한계를 벗어나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온 백성들에게 번져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II.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
오늘 본문의 모습을 그림으로 한 번 그려봅시다. 불 붙는 소돔 고모라의 앞에서, 폭발직전의 화약고 앞에서,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들고 또 한 손은 인간의 아픈 사연을 붙들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까? 민족사의 시련과 고통이 있을 때마다, 나라가 흥망성쇠의 기로에 설때마다, 교회적인 비전이 선포될 때마다, 이웃들의 신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중보기도 사역입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내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특권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엄숙한 모습입니까? 기도는 기도나 해 볼까 하는 도박이거나 막다른 골목에서나 끄집어내는 최후의 수단이 아닙니다. 항상 기도는 최대의 수단입니다. 기도는 만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군가 대통령과 매일 독대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아마 대단한 사람일 겝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한 나라의 대통령과 독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 온 역사를 다스리시는 그분과 독대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그러므로 기도할 기회를 상실한 것은 최고의 기회를 상실한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잃은 것은 인생 최고의 능력을 잃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기도의 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의 자리는 어디나 될 수 있습니다. 성전도 기도의 자리고 집도 기도의 자리입니다. 집안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거리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베드로는 지붕 위에서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 나아와 습관을 따라 기도하는 사람은 최고의 경건을 지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점에서 우리가 각자의 가정에서 기도할 수 있지만 조용한 시간, 교회를 찾아와 그 바닥에 엎드려 기도한다면 하나님을 더 한층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이, 기도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아름답게 기도의 공간을 준비하고 거기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제목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할 때마다 놀라운 불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오순절 다락방을 오늘 우리가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갈멜산 제단을 오늘 우리가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정이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사회를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세우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민족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커다란 통치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기도의 불을 타고 크게 타 오를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항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에서 살아났고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교회와 나라를 살립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기도의 자리를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라고 기록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서 있는 그 모습이 기도의 자리요, 응답받는 기도의 선결조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리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더래도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못하도록, 영광스러운 하나님 존전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는 벽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지만 그 축복이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죄악이 너와 너희 하나님 사이에 벽을 만들었느니라" 죄는 우리 사이에 벽을 만들어서 우리의 기도를 방해합니다. 하늘 축복의 통로를 막아버립니다. 우리가 붙들고 살던 죄를 놓을 때 축복을 붙들 수 있습니다. 내 입술이 죄를 고백한 다음에 비로소 거룩한 입술을 열어 하늘 보좌를 향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전능한 아버지의 이름을 외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해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해라."
제가 아차산 밑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차산 등산을 했습니다. 그러면 바위 틈에서 생수가 흘러 아침에 생수 한 컵을 마시는 것은 신학생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곤 했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샘에서 쾌쾌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생수를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몇몇 학생들이 그 원인을 조사하다 보니까 바위 틈 사이에 들쥐 한 마리가 죽어서 썪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둬내고 바위틈을 깨끗이 한 다음 생수를 다시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생수를 맛보기를 원하는 사람들, 우리 가슴속에 냄새나는 죄악의 멍에들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내 손에 묻어있는 피의 흔적들을 주님의 보혈에 씻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입술에 부정적이고 남을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추악한 입술들을 이사야의 숯불로 그 입술을 정결케 한 다음에야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내 형제 자매들의 이름을 불러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와 성결은 중보기도자로 자신의 그릇을 준비하는 첫걸음이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III. 아버지와 함께하는 행복
기도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고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갖가지 기상천외한 에피소를 낳았던 타이타닉호가 부셔졌을 때의 일입니다. 수천명의 탑승객이 이미 죽어갔고 구명보트에 탄 노약자들은 다 구조되어 구조대마저 철수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영국의 한 문인이 큰 풍선을 가슴에 끌어안고 파도와 싸우고 며칠을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손가락 끝마디에 마지막 힘마져 사라져서 풍선을 집어던지고 생명을 아버지 앞에 맡길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그때에 하늘에 1인승 비행물체 하나가 빙글빙글 돌며 이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다. 누군가 나를 보았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용솟음 치는 것입니다. 던지고 싶었던 풍선을 다시 끌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날생선을 잡아 먹으며 며칠동안 버텨냈습니다. 마침내 해안경찰 구조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왔습니다. 이 사람을 건져주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때에, 친구들마져 배신의 칼을 던지고 떠나갔을 때에, 믿었던 사람들이 결정적인 손해를 내게 입히고 내 곁을 사라져 갔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때에, 온 우주에 혼자 서 있는 커다란 고독에 신음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그것도 전능한 하나님이 나의 모든 형편을 보고 계신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놀라운 담력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이 행복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과 눈 마주치며 사는 인생 행복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를 선택하신 이유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우선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사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나눠주신 다음에야 전도도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에 주님도 거기에 계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며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D.L. 무디 선생이 서재에서 조용히 앉아 있을 때에 아들이 달려 들어왔습니다. 아들아 뭘 해줄까?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라고 하며 아빠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은 아빠의 행복이요 자식의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걸어간다. 내가 가는 곳에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행복을 이 기쁨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영혼의 고아가 되어서 홀로 인생을 외롭게 걸어가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옆에 있는 교우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는 행복을 아십니까? 행여 당신이란 벽 속에 갇혀 이웃이 보이지 않는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임진왜란 때의 일입니다. 일본의 장수 가등청정이란 사람이 백두산의 호랑이를 생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호랑이를 풍신수길에게 선물로 보냈지요.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개 세 마리를 잡아먹고 잘 도착하라고 큰 우리 안에 넣어 보내 주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하고 보니 호랑이가 죽어있고 개 세 마리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개가 바로 일본이 몰랐던 한국의 용맹한 개 풍산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위기가 있을 때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능히 그 문제를 물어 뜯을 수 있습니다. 위기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한소망교회가 부흥을 경험하고 비전채플을 건축하고자 할 때에 가장 필요한 일은 온 성도가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부흥도 기도를 타고 오고 건축도 기도로 세우는 것입니다.
IV. 티끌같은 나라도 감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의 태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7절에서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이 역설적인 한 문장 속에 기도의 태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는 티끌이나 재와 같은 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섰을 때에 나는 참으로 티끌 같은 존재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고백 없이 그 누구도 기도의 자리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질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자만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없이도 의미 있는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의 입술이 막혀지고 마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교만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하나님 없이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불신앙이요 교만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는 사람이지요.
우리는 티끌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흉한 죄인이기 때문에 기도의 입술을 닫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요. 27절 후반절에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감히가 필요한 것입니다. 31절에도 역시 "감히"라는 말이 다시 나옵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강하신 분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티끌처럼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강철같은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티끌 같은 나라도 감히 하나님께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여기 "감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감히 어떤 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소돔성은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소돔성을 간섭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소돔성을 변화시킬 어떤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이 성을 사해 주지 않겠습니까? 여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있는데 이 성을 주님 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도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무감각의 질병입니다. 죄로 인해 쓰러지고 넘어지는 세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안타까와 함이 없습니다. 무너져 가는 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영적인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사단의 불화살에 맞아 신음하는 내 이웃들을 보면서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져 허우적 거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적인 감각이 없는 것, 영적인 무감각의 질병, 이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질병입니다.
한국교회가 커다란 위기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문제인줄 알지 못합니다. 교회가 무거운 사명과 과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책임의식이나 축복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쓰임받을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시간 이후 여러분의 입에서 나라의 문제를 안타까와 하고,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며 교회의 부흥과 성숙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번영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건 이미 여러분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가고 있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성숙되어져 가고 있는 뚜렷한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나라와 교회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당신은 주님의 경영에 동참한 것입니다.
V. 중보기도로 얻은 복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결코 자기 조카 롯 만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님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24절에 보면 오십인을 통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28절에 보면 오십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온 성을 멸하시겠나이까? 분명히 온 성을 위하여 간구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 내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 내게 결정적인 손해를 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용서를 선포할 수 있고 그를 위하여 중보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욥기서라는 구약의 책이 있습니다. 42장으로 구성된 긴 이야기입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욥만큼 커다란 고난을 당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욥은 1장부터 42장까지 얼마나 쓰리고 아픈 고통을 겪는지 모릅니다. 열 아들이 모두 죽습니다. 모든 재산이 바람에 날아가듯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그를 원망하고 저주합니다.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욥을 찾아왔지만 욥의 가슴을 난도질했습니다. 온몸은 질병으로 자기 몸은 지금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아파서 기왓장으로 가려운 데를 벅벅 긁으며 피를 줄줄 흘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 고통이 42장에 걸쳐서 절절히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42장 10절에 놀라운 한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때" 그에게 상처를 준, 결정적인 아픔을 주었던 친구들을 용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떠나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욥의 환난이 깨끗이 없어져 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들을 용서하고 그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시작했을 때에 고통이 사라져 갔습니다. 질병이 떠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프레미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전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을 욥에게 주었더라. 우리는 욥이 갑절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 사실 즉 중보기도에 대해서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을 용서했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했습니다. 그때 질병이 떠나갔습니다. 갑절의 축복을 욥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가 가져다 주는 축복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기도할 수 있는 의인 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라의 문제, 민족의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할 수 있는 의인 열 사람. 쓰러져가고 무너져가고 있는,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해 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할 수 있는 한국교회 의인 열 사람을 주님은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를 위하여, 이웃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의인 열 사람을 지금 이 시간에도 부르고 계십니다. 한소망교회의 비젼과 사명을 가슴에 품고 몸부림하는 의인 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이것은 어느 기업체의 구인광고가 아니올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잃어버렸던 아담을 찾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노아 홍수 직전에 울려퍼졌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오늘 불붙은 소돔과 고모라 성 앞에서 의인 열 사람을 내가 찾는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누가 이 교회의 사명을 걸머지고 기도하겠느냐? 누가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울며 기도하겠느냐?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VI. 기도하는 의인 한 사람
의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한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과 기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경험하는 그 사람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언제나 자신의 문제를 아뢸 수 있고 전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낼 수 있는 사람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이 시간에도 기다리고 찾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 의인을 통하여 온 지경을 용서할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소돔의 정치인들은 그들의 정치가 국가의 안보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르지요. 소돔의 군인들은 그들의 군사전력이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소돔의 교육자들은 그들의 교육이 안보의 원천이라고 믿었겠지요. 소돔의 경제인들은 그들의 헌신적인 경제활동이 민족의 운명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이 성에 유황불을 유보하고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의인 열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열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성을 용서해 주겠다.
분명히 성경은 말합니다. 야곱 때문에 라반의 집에 축복이 임했습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과 모든 소유에 복이 임했습니다. 사도 바울 때문에 유라굴라 광풍에서 이백칠십육명의 승객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엄숙히 자각을 해야 합니다. 나 하나로 말미암아 내 가정이 망해갈 수도 있고 새로운 부흥을 체험할 수도 있다. 나 하나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가 큰 부흥을 체험할 수도 있고 침체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 교회 하나로 말미암아 이 도시에 가득찬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할 수도 있고 이 도시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다. 한국교회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새로워질 수도 있고 몰락해 갈 수도 있다. 엄숙한 각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경영학의 80대 20 법칙이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총 생산량의 80%가 20%의 사람들에 의하여 생산이 되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개미는 열심히 일하는 곤충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만 정작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20%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20%의 개미들만이 열심히 땀흘려서 나머지 80%를 먹여 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음하는 80%의 사람들을 살려낼 중보기도자들, 피흘리고 쓰러져 고통에 겨워하는 사람들을 건져낼 사람들, 아픈 상처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 20%의 역군들을 우리교회가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교회의 미래에 승패를 가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을 때에 저는 한가지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천사와의 씨름이 계속되어 지는데 의인 오십명이 있으면 의인 사십오인이 있으면 의인 사십명이 있으면 의인 삼십명이 있으면 의인 이십명이 있으면 열명이 있으면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오명이 있으면 나머지 한명이 있으면 이 성을 사해주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 성을 용서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 너무나도 크고 많으신 분이신데 한명의 몸부림으로 인하여 이 성을 주님 용서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왜 여기 마지막 자리까지 기도할 수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의인 한 명을 찾으면, 진리를 구하는 사람 전능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한 명을 찾아내면 내가 이 성을 용서하리라. 사하리라. 그래요 기도는 마지막 한명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쉬는 죄, 그것이 무서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내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쉴 때에 내 자녀들이 방황하게 됩니다. 내가 내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게 될 때에 친구들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내가 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 그것이 무서운 죄악입니다.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멈추는 것 그것이 무서운 죄악입니다. 성도의 최고의 사역은 교회 비전과 과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기도의 종말 그것은 소돔성의 종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멈출 때에 그것은 하늘 축복의 종말임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지 아니할 때에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지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중보기도의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신분을 "너는 왕같은 제사장이느니라" 여러분 한분 한분은 하늘의 왕같은 제사장임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기도로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 통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치가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고 하면, 여러분이 노무현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청와대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각료가 되는 것입니다.
6.25때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습니다. 풍전등화와도 같은 한국에 파병을 결정하는 자리였습니다.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했던 소련의 대표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한국에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총에 맞아 피흘리고 쓰러지는 한 이름모를 무명의 용사가 기도했는지, 아니면 피난 길에서 다리를 절며절며 누군가 기도했는지, 토굴속에 숨어서 두려워 떨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지, 누군가 유엔을 위하여 기도했던 그 한사람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원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시를 위하여, 미국을 위하여 이 시간에 기도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미국의 정치에 내정간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권입니까?
여러분 중보기도로 우리는 세상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보기도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보기도로 우리는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VII. 기도 물결·부흥 파도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우리는 지난 700일 동안 금식기도 대행진 물결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창립감사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1. 한국교회와 한소망교회에 1907년 그 날의 성령 폭발이 다시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성령님 사랑합니다. 사모합니다.
2. 한국 땅 모든 도시 특히 고양과 파주에 교회를 파괴하는 악한 영을 결박하고 교회마다 대부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 고양, 파주에 대부흥을 !
3. 이 엄청난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함께 G12 비전이 한소망 교회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가득하길 기도했습니다. - 비전의 기름 부으심이 넘치게 하소서.
4. 한소망 가족의 꿈, G12 비전을 품는 그릇 - 비전센타 건축으로 열방의 도시와 민족을 구원하길 소망했습니다. - 주의 비전을 담아내는 그릇을 주소서.
5. 북녘 땅에 전도의 문이 열리고 한반도가 평화의 도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한반도가 21세기 예루살렘되게 하소서
이 기도가 이루어져 한소망교회는 계속 부흥을 경험해왔고 이제 곧 비전채플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밤 금식기도 700일 완성, 비전채플건축 축제, 그리고 또다시 300일 금식기도 대행진을 이어가는 새출발 잔치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당 건축은 기도로 하는 겁니다. 금식기도, 중보기도 물결이 일어나면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능력있는 기도의 물결이 넘실되게 하십시다. 반드시 이 땅에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 샤다이 (창17:1-8) (0) | 2022.09.03 |
---|---|
빈 들에서 일어난 표적 (요한 6:1-13) (0) | 2022.09.03 |
주님께 끌려온 죄인 (요한복음8:1-11) (0) | 2022.09.03 |
큰 용사여! (사사기 6:11~16) (0) | 2022.09.03 |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요한계시록 3:14-22) (0) | 2022.09.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