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얼굴의 빛으로 누리는 평강(민수기 6:25–26)
주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주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짧고도 깊은 축복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영혼을 덮는 하늘의 햇살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평강을 원합니다. 평강은 누구에게나 간절하고도 절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단지 문제의 부재나 갈등의 잠잠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에 비로소 주어지는 생명의 질서이며, 존재의 안전이며, 영혼의 고요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안정감과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평강은 조건이 흔들리면 함께 흔들리고, 환경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집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시는 평강은,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상황의 바깥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안에서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민수기의 이 말씀은 제사장이 백성에게 선포하는 축복, 곧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은혜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잘 되라”고 막연히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복의 근원과 복의 형태와 복의 목적을, 하나의 문장 안에 담아 주십니다. 그 복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시고, 얼굴을 향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평강은 하나님 얼굴의 빛에서 흘러나옵니다.
여기서 “얼굴”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인간처럼 형상화하여 이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와 호의와 관심을, 실제로 우리에게 향하신다는 언약적 언어입니다. 누군가의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얼굴을 돌린다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얼굴을 향한다는 것은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심판과 징계를,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자비와 긍휼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를 어둡게 가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 위에 밝히 드러내시며, 어두운 마음과 무너진 뼈마디 위에 은혜의 햇빛을 비추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단지 따뜻한 감정의 위로가 아니라, 죄를 죄로 드러내고, 상처를 상처로 직면하게 하며, 동시에 용서와 회복의 길을 열어 주는 거룩한 빛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평강을 “문제가 사라지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걸음 더 깊이 우리를 데려갑니다.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얼굴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비추시는가, 혹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그 얼굴을 피하고 있는가. 평강의 결핍은 단지 환경의 소란에서만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얼굴을 잃어버린 영혼의 방황에서 옵니다. 세상이 아무리 조용해도, 하나님과 화평이 깨어져 있으면 마음은 사막이 됩니다. 반대로 세상이 요동해도, 하나님 얼굴의 빛 아래 있으면 마음은 샘을 가집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은 은혜로 나타납니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보였기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죄로 인해 마음은 어두워졌고, 의지는 굽어졌으며, 사랑은 자기에게로 말려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얼굴빛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주체가 아니라, 은혜의 수혜자입니다. 이 축복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관계를 열고, 평강을 주시는 분이심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는 어떤 모양으로 우리에게 옵니까. 성경은 하나님 얼굴빛의 은혜가, 결코 죄를 덮어두는 모호한 관대함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죄의 실재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은혜는 죄의 값을 치르지 않고 관계를 회복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값비싼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값은 우리 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값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지불되었습니다. 민수기의 제사장적 축복은 장차 오실 참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거룩이 죄인을 태워버리는 불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 전환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바로 대속의 은혜에서입니다. 죄를 심판하시되 죄인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식,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복을 받게 되는 신비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얼굴빛의 은혜는, 십자가를 통과하여 우리에게 옵니다.
“주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라는 말씀은 더욱 깊습니다.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빛의 행위라면, 얼굴을 향한다는 것은 관계의 결단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정하셔서 “나는 너를 외면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종종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시면 어떡하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면 어떡하나.” 특별히 실패했을 때, 넘어졌을 때, 오래 묵은 죄를 다시 마주했을 때, 마음은 자기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려버립니다. 그러나 이 축복은 우리의 심장을 다시 붙잡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서 당신의 얼굴을 당신 백성에게로 향하십니다. 그 얼굴은 변덕의 얼굴이 아니라, 언약의 얼굴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하나님을 해석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기준이 됩니다.
여기서 성도 여러분께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향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품은 채로도 안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향하시기에, 우리는 그분 앞에서 정직해집니다. 숨길 수 없기에 회개합니다. 외면당하지 않기에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멀어지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를 핑계로 삼아 도망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나오게 합니다. 하나님 얼굴빛은 우리의 가장 어두운 방까지 비추어, 우리가 스스로도 외면하던 마음의 거짓을 드러내며, 동시에 정죄가 아니라 회복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결론 없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의 세계입니다. 샬롬은 단지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샬롬은 깨어진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온전함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이웃과의 화평, 내면의 통일, 삶의 질서, 공동체의 건강, 창조세계의 회복까지 아우르는 넓은 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 한 조각만 달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하나님 질서 속에 다시 놓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평강을 어떻게 “누립니까.” 이 축복은 “원하노라”라는 기도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상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정하신 은혜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평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은혜를 받는 자에게는 은혜에 합당한 통로들이 열립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얼굴빛을 바라보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얼굴을 향한 마음을 되돌리고, 성례를 통하여 은혜의 확증을 맛보며, 공동체 안에서 화평의 열매를 맺는 길이 열립니다. 평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결실입니다.
예화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 노인이 오랜 세월 마음의 불안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선택이 남긴 죄책감이 깊었고, 가족과의 관계도 여러 번 틀어졌습니다. 그는 늘 “내가 평안해질 날이 있을까”를 중얼거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작은 시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예배 마지막에 목회자가 민수기의 제사장적 축복을 천천히 선포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 노인은 이상하게도 그 말이 마치 자기 이름을 부르며 건네는 하나님의 편지처럼 들렸습니다. 예배 후 목회자에게 찾아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이 저를 오래전부터 외면하신 줄 알았습니다.” 목회자는 조용히 되물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얼굴을 피해 도망친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칼처럼 마음을 가르며 동시에 약처럼 스며들었습니다. 노인은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변명하지 않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날 밤 그의 환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해결된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처음으로 잠을 잤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가 해결돼서가 아니라, 하나님 얼굴이 나를 향해 있다는 확신이 오니,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샬롬의 시작입니다. 세상이 바뀌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 오는 평강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경계해야 합니까. 하나님 얼굴빛을 말하면서도, 그 빛을 감상으로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죄와 회개의 자리에서 떼어내어 달콤한 위로만으로 소비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얼굴빛은 거룩한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를 자기연민에서 건져내고, 회개로 이끌며, 그리스도께 붙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평강을 “내 마음의 컨디션”으로만 축소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의 평강은 반드시 관계를 향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자는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려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화평의 씨앗을 뿌리는 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평강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단지 개인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민수기의 축복은 공동체 위에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백성 전체를 얼굴빛 아래 두시고, 언약 공동체를 지키십니다. 교회가 흔들릴 때, 시대가 흔들릴 때, 우리는 전략만 찾고 방법만 찾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 얼굴빛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실 때 교회는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향하실 때 공동체는 다시 일어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와 거룩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 얼굴빛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얼굴빛은 가장 선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얼굴빛의 영광을 맛보고 싶다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은혜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마음이 불안하십니까. 평강이 멀게 느껴지십니까. 오늘 말씀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평강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평강은 조건을 완성한 후에 주어지는 상이 아닙니다. 평강은 하나님 얼굴빛 아래로 돌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회개는 정죄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평강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함을 얻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얼굴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얼굴을 비추십니다. 은혜를 베푸십니다. 얼굴을 향하십니다. 그리고 평강을 주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영혼이 할 일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빛을 만들어내려 하지 말고 빛 아래로 나오십시오. 평강을 짜내려 하지 말고 평강의 근원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드시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 믿음은 막연한 자기암시가 아니라, 십자가로 확증된 언약의 진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둠을 통과하심으로, 우리는 빛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평강을 누립니다. 이 복음이 우리의 가슴을 데우고, 우리의 시선을 다시 세우고, 우리의 걸음을 평강의 길로 이끌어 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향하여 드사, 참된 샬롬을 우리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우리의 모든 관계 가운데 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주 얼굴의 빛으로 누리는 평강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설교요약
민수기 6:25–26의 제사장적 축복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은혜의 선언이며, 평강의 근원이 “하나님 얼굴의 빛”임을 드러낸다. “얼굴을 비추심”은 임재와 호의를, “얼굴을 향하심”은 관계의 회복과 언약적 결단을,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값비싼 호의를, “평강(샬롬)”은 존재의 온전함과 관계의 화목을 의미한다. 이 축복은 죄를 가볍게 넘기는 감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주어지는 거룩한 은혜이며, 개인의 내면을 넘어 공동체와 관계 속에서 화평의 열매로 확장된다.
묵상 포인트
- 나는 평강을 “문제의 부재”로 정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릴 때 찾아오는 내면의 불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 얼굴빛을 피하게 만드는 죄의 습관, 숨김, 변명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해질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다”는 두려움이 들 때, 내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로 확증된 언약을 붙들고 있습니까.
- 샬롬이 내 마음에서만 끝나지 않고, 가족·교회·이웃과의 관계 속 화평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 하나님 얼굴빛을 구하는 구체적 통로(말씀, 기도, 예배, 성례, 교제)를 나는 실제로 걷고 있습니까.
강해
이 본문은 아론 계열 제사장이 공동체 위에 선포하는 축복의 중심부로서, 복의 핵심을 “하나님의 얼굴”로 집중시킨다. 복의 본질은 물질적 풍요나 외적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밝음과 관계적 화평이다. “비추사”는 하나님께서 어둠을 거두고 임재의 빛을 드러내시는 행위이며, 동시에 죄를 드러내고 회복을 여시는 거룩한 조명이다. “은혜”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호의에서 비롯된다. “향하여”는 단지 빛을 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관계의 방향이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로 정해졌음을 나타낸다. 그 결과로 주어지는 “평강”은 샬롬의 충만으로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뿌리로 하여 삶 전반의 질서와 관계적 온전함을 포함한다. 신약적 성취의 관점에서 이 축복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가능해진 화평, 곧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케 되는 은혜로 완성된다.
주석
- 본문은 기원(원하노라)의 형식이지만, 단순한 소망표현을 넘어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주시려는 복의 성격을 규정한다.
- “얼굴”은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와 관계적 태도를 나타내는 언약적 표현이다. 얼굴을 비추심은 호의와 생명의 공급, 얼굴을 숨기심은 심판과 거리두기의 이미지로 성경 전반에 반복된다.
- “은혜”는 죄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식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없이는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 회복이 성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 복음의 핵심과 맞닿는다.
- “평강”은 내면의 안정감만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과 공동체적 안녕을 포함하는 성경적 총체 개념으로 읽어야 한다.
(히브리어-구약) 원어 주석
- “פָּנָיו (panav, 그의 얼굴)”는 관계의 표지로서 ‘임재/호의/관심’을 함축한다. 하나님의 “얼굴”은 형상적 묘사가 아니라 언약적 친밀과 태도의 언어다.
- “יָאֵר (ya’er, 비추다)”는 빛을 비추어 밝게 하다/환히 하다의 의미로, 단순한 시각적 빛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길을 드러내는 빛의 작용을 시사한다. 하나님 얼굴빛은 인도와 회복의 은혜로 나타난다.
- “וִיחֻנֶּךָּ (vichunneka, 네게 은혜 베푸시다)”는 ‘חנן(하난)’ 어근에서 왔으며, 자격 없는 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은총’의 뉘앙스를 강하게 가진다.
- “יִשָּׂא … פָּנָיו (yissa… panav, 그의 얼굴을 들다/향하다)”는 관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주의 깊게 바라보시며’ 호의를 보이신다는 함의를 가진다.
- “שָׁלוֹם (shalom, 평강)”은 완전함/온전함/안녕/화목/충만을 포함한다. 단지 “불안이 없음”이 아니라 “깨어진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상태”를 말한다.
(헬라어-신약) 원어 연결 주석
민수기 본문 자체는 히브리어 구약이지만, 신약에서 이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평/화목” 개념으로 확장된다. 신약의 “εἰρήνη (eirēnē, 평화/평강)”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화목)과 공동체적 화평의 결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민수기의 샬롬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평과 연결되어 읽힐 수 있다.
금언
- 평강은 조건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얼굴빛의 선물입니다.
- 은혜는 죄를 덮어두지 않고,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평강으로 인도합니다.
- 하나님 얼굴을 피하는 마음이 불안을 만들고, 하나님 얼굴을 바라보는 믿음이 샬롬을 낳습니다.
- 십자가는 하나님 얼굴빛이 죄인에게도 은혜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 참된 샬롬은 개인의 마음에서 시작되나, 관계의 화평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신학적 정리
- 언약적 복: 본문은 언약 공동체 위에 선포되는 복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호의가 복의 본질임을 밝힌다.
- 은혜의 주권: 은혜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며, 전적 타락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편의 주도권이 드러난다.
- 그리스도 중심적 성취: 제사장적 축복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며, 그리스도의 대속이 하나님 얼굴빛과 샬롬의 길을 연다.
- 거룩과 화평의 일치: 하나님 얼굴빛은 거룩한 빛이므로, 은혜는 방종이 아니라 회개와 성화를 동반한다.
주제별 정리
- 평강: 샬롬은 온전함과 화목의 총체 개념이며, 하나님과의 화평이 근원이다.
- 얼굴: 하나님의 얼굴은 임재/관계/호의의 언어이며, 신앙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다.
- 은혜: 값없는 듯 보이나 가장 값비싼 선물이며,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주어진다.
- 공동체: 축복은 개인주의적 소비가 아니라 공동체적 회복을 지향한다.
목회적 정리
- 불안이 깊을수록 “상황”보다 “관계”를 먼저 점검하도록 돕는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회복될 때 마음은 자리를 잡는다.
- 죄책감에 짓눌린 성도에게는 감정 해소가 아니라 복음의 객관적 근거(그리스도의 대속)를 반복하여 붙들게 해야 한다.
- 화평을 말하면서도 관계를 방치하는 신앙을 경계시키고, 실제적 화해와 용서의 실천으로 인도한다.
- 예배의 축도(축복 선포)를 형식이 아니라 신앙의 실제로 받아들이게 하여, 예배 후 삶 속에서 샬롬의 증인으로 살게 한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 하나님 앞에서 숨기던 죄와 상처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확증으로 붙들겠습니다.
- 매일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 얼굴빛 아래로 나아가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구별하겠습니다.
- 가정과 교회와 관계 속에서 화평을 깨는 말과 태도를 회개하고, 먼저 손 내미는 화해의 걸음을 내딛겠습니다.
- 평강을 감정의 등락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 언약의 진실을 기준으로 마음을 다스리겠습니다.
- 받은 샬롬을 흘려보내는 삶, 곧 위로와 화해와 선행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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