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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 이해편◑/Comprehensive

다가올 영광의 소망(로마서 8:18).

by 【고동엽】 2026. 1. 26.

다가올 영광의 소망(로마서 8:18).

로마서 8장 18절은 바울의 심장이 가장 뜨겁게 뛰는 문장 중 하나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문장 안에는 신자의 인생을 떠받치는 기둥이 서 있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을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난을 고난의 자리에서만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의 지평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무게가 “비교”라는 법정에 서게 됩니다. 바울은 저울을 꺼내 들고, 한쪽에는 “현재의 고난”을, 다른 한쪽에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결론을 선언합니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영광이 무거워서입니다. 고난이 짧아서가 아니라, 영광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영광이 거룩하고 찬란하며 하나님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광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 “그러니 고난은 별것 아니다”라는 차가운 말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의 위로는 상처를 무시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상처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의 값을 인정하며, 신음의 길이를 헤아립니다. 로마서 8장은 성도의 신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성도도 탄식합니다.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러니 바울의 선언은 눈물을 닦아내는 무정한 명령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등불입니다. 밤이 깊어도 새벽이 사라지지 않듯, 고난이 커도 영광의 약속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복음의 확언입니다.

“현재의 고난”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오늘이 들어 있습니다. 몸이 아픈 분들의 통증, 마음이 무너진 분들의 우울, 관계가 깨진 분들의 상실, 경제적 압박 속에서 숨이 가빠지는 분들의 한숨, 죄와 싸우다가 지쳐버린 성도의 탄식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 고난을 “현재”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고난이 실제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고난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현재일 뿐, 최종 판결이 아닙니다. 현재는 잠시 머무는 계절이며, 마지막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고난의 방에 갇히면 그 방이 우주 전체인 줄 압니다. 창문이 닫히면 하늘이 사라진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바울은 성도의 시선을 “현재”에만 고정시키지 않고 “장차”로 들어 올립니다. 신자의 신앙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더 깊이 해석하는 눈입니다. 고난을 부정하지 않되, 고난이 말하는 거짓말을 믿지 않는 눈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잊으셨다. 너의 삶은 망했다. 너의 끝은 이 눈물이다.” 그러나 복음은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너의 삶은 십자가로 이미 붙들렸다. 너의 끝은 눈물이 아니라 영광이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는 표현은 특히 아름답습니다. 영광은 단지 미래의 보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광은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은 가려져 있고, 덮여 있고, 때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드러납니다. 씨앗 안에 숲이 숨어 있듯, 지금 우리의 연약한 몸과 흔들리는 마음 안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영광은 우리가 만든 업적의 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서 흘러오는 광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붙드는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구원의 시작도, 과정도, 완성도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은 “우리의 자기증명”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끝까지 밀어붙이는 약속”의 결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그 놀라운 사슬 안에서, 성도의 미래는 이미 하나님의 손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할 정도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 편에서의 확실성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합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은 가능성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단지 천국의 금길입니까. 단지 고통이 없는 상태입니까. 물론 하나님 나라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다시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광의 중심은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는 은혜,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지식이 온전히 밝아지는 날, 성령의 빛이 우리 존재의 모든 그늘을 몰아내는 날, 그리고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날입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걷습니다. 그날에는 보는 것으로 걷습니다. 지금은 기도하면서도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사랑하려다가도 자기중심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날에는 사랑이 자연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배가 때로는 갈라진 마음을 끌어모으는 싸움이지만, 그날에는 예배가 호흡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 완성하시는 빛나는 결말입니다.

여기서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능력이 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교는 단순히 계산이 아닙니다. 비교는 시선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됩니다. 세상은 현재의 쾌락과 현재의 성공을 비교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초조합니다. 남의 성취와 내 현실을 비교하며 마음이 깎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현재의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비교는 사람을 무디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난은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장은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울면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프면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흔들리면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능력은 인간의 긍정심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현재의 고난을 친히 통과하셨고, 그 고난의 끝에서 영광의 부활로 일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길이 우리의 길이 됩니다.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오듯, 성도의 고난 다음에는 영광이 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광부들이 깊은 갱도에서 작업을 하다가 갑작스런 붕괴로 어둠 속에 갇혔다고 합시다. 공기는 탁하고, 시간은 늘어지고, 어디가 출구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위에서 구조대가 내려보낸 작은 무전기 하나가 켜집니다. 무전기 속 음성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발견되었습니다. 구조대가 통로를 뚫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끌어올릴 것입니다.” 그 음성 하나가 어둠을 당장 밝히지는 못합니다. 공기를 즉시 맑게 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그 음성은 갇힌 사람들의 마음을 바꿉니다. 이제 그들은 “버려진 사람”이 아니라 “구조된 사람”입니다. 아직 올라오지 않았지만, 이미 구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성도의 소망이 이와 같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은 고난의 갱도 안으로 내려오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이것은 상황의 즉각적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지위를 바꾸는 선언입니다. 나는 버려진 자가 아니라, 영화로 향하는 자입니다. 나는 끝난 사람이 아니라, 완성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숨이 차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두려워도 손을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조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현재의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이 질문은 쉽게 답하면 위험합니다. 고난의 원인을 단정하는 말은 종종 상처를 더 깊게 찌릅니다. 성경도 욥의 친구들처럼 섣부른 해석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거룩한 목적들을 조심스럽게 보여 줍니다.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붙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가 붙들던 헛된 지팡이들을 부러뜨립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정결하게 합니다. 고난은 장차 올 영광을 더 귀하게 보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난은 우리가 “자기 힘으로 살아남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나는 사람”임을 배우게 합니다. 개혁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무능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을 소망으로 열어 준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끝까지 보존하십니다. 성도의 견인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붙드는 손이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은 강하십니다. 저는 자주 놓치지만, 주님은 놓지 않으십니다.”

바울이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난을 적게 겪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매를 맞았고, 감옥에 갇혔고, 굶주렸고, 위험을 겪었고, 배신을 당했고, 몸의 가시로 인해 신음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고난이 영광에 비해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이 영광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은 그 자체로 선이 아닙니다. 고난은 원래 죄로 인해 들어온 비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비정상까지도 붙잡아 구원의 정상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섭리입니다. 악이 선으로 변했다는 말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악을 이기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그 절정입니다. 십자가는 악이 가장 흉포하게 터져 나온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성도의 고난도 십자가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선을 잃으신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을 더 깊게 이루시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통로의 끝에 영광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광”을 단지 미래의 사건으로만 미루면, 우리는 현재를 버티는 힘을 잃습니다. 성경의 소망은 미래로만 도망치게 하지 않고, 현재를 새롭게 살게 합니다. 왜냐하면 장차 나타날 영광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 자체가 영광의 선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의 씨앗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마음 자체가 영광의 싹입니다. 눈물로라도 예배를 지키는 그 자리 자체가 영광의 예고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상처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결핍 속에서도 감사의 작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을 향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영광에서부터 붙들려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공중에 떠 있는 낭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박힌 현실이며, 빈 무덤에서 터져 나온 새창조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고난 중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믿음이란 단지 “견디자”라는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실제적 행위입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상황을 조종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리는 생명줄입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감정을 즉시 바꾸지 않을 수 있지만,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진리를 심습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홀로 버티는 영웅주의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서로의 믿음이 됩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죄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죄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죄를 더 달콤하게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선을 행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행이 구원을 사지는 못하지만, 구원받은 자의 생명은 선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이는 도피가 아니라, 방향 재설정입니다. 배가 폭풍을 만날 때 별을 보고 항로를 잡듯, 성도는 영광을 보고 믿음의 항로를 다시 잡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8장 18절의 소망은 두 가지 극단을 막아 줍니다. 하나는 냉소입니다. “인생은 원래 그래, 기대하지 마”라는 마음은 현재의 고난을 절대화합니다. 다른 하나는 허황입니다. “고난은 믿음이 약해서 온 거야, 금방 사라질 거야”라는 말은 고난을 가볍게 여기고 상처를 짓밟을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길은 냉소도 허황도 아닙니다. 복음은 고난을 정직하게 보되, 고난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은 지금의 울음을 인정하되, 그 울음이 마지막 노래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고난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광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은 남의 몫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숨겨진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억울함이 풀릴 것입니다. 오해가 벗겨질 것입니다. 눈물이 씻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기쁨,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진 자유, 성령의 빛 아래서 완전히 치유되는 존재의 안식,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고난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로마서 8장 18절로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끝”을 말할 때, 복음으로 “장차”를 말하십시오. 고난이 “비교할 수 없다”고 비웃을 때, 십자가와 부활로 저울을 다시 세우십시오. 고난이 “너는 혼자다”라고 속삭일 때, 성령의 탄식과 그리스도의 중보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고난이 여러분의 신앙을 빼앗으려 할 때, 이렇게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는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하십니다. 저는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십니다. 저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주님은 저를 장차의 영광으로 이끄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소망은 죽음을 이깁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더 이상 문을 닫는 손이 아니라, 문을 여는 손이 됩니다. 죽음은 빼앗는 자가 아니라, 인도하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과해 생명으로 길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장차 나타날 영광을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좋은 날이 오겠지”라는 위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된 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날, 우리의 믿음은 더 이상 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더 이상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더 이상 분산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더 이상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중심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 현재의 고난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영광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소망을 가슴에 품고 다시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눈물로 걸어도 괜찮습니다. 숨이 차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함께 걸으십니다. 그리고 영광이 기다립니다. 아니, 영광이 이미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부속 자료 묶음

1) 요약

  • 로마서 8:18은 고난을 부정하지 않되,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의 빛 아래 두어 “비교 불가”의 결론으로 인도합니다.
  • “현재”는 고난의 현실성을, “장차”는 고난의 비최종성을 드러냅니다.
  • 영광은 단지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뵙는 완성,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완전한 변화, 죄와 죽음에서의 최종 해방입니다.
  •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소망은 인간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예정·부르심·의롭다 하심·영화롭게 하심의 구원 사슬에 근거합니다.
  • 소망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 믿음·기도·말씀·공동체·거룩·선행을 지키게 하는 현재적 능력입니다.

2) 묵상 포인트

  • 지금 제가 “현재의 고난”을 최종 결론처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저는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며 살고 있습니까? (성공 vs 실패, 인정 vs 소외, 혹은 고난 vs 영광)
  • “장차 나타날 영광”이 제 일상(예배, 관계, 죄와의 싸움, 두려움)에 어떤 방향을 줍니까?
  • 고난이 제게 들려주는 거짓말(버림받음, 무의미, 끝장)을 복음으로 어떻게 반박할 수 있습니까?
  •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지금 제 기도에 어떤 위로가 됩니까?

3) 강해(본문 전개를 위한 해설)

  • “생각하건대”는 단순 감상이 아니라, 신학적 성찰과 성령 안에서의 확신을 전제합니다. 바울의 결론은 낙관이 아니라 복음적 판단입니다.
  • “현재의 고난”은 개인적 시련뿐 아니라, 로마서 8장 전체 문맥에서 피조세계의 탄식, 성도의 신음, 구속의 미완성 속에서 경험하는 전인적 고통을 포괄합니다.
  • “장차”는 시간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경륜 속에서 반드시 드러날 사건성을 담습니다.
  • “나타날 영광”은 감춰진 실재의 계시입니다. 현재는 “숨겨짐”, 미래는 “드러남”입니다.
  • “비교할 수 없다”는 고난의 무시가 아니라, 영광의 압도적 실재를 통한 고난의 재해석입니다.

4) 주석(핵심 관찰)

  • 본절은 고난의 원인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고난을 구속사적 맥락에 위치시킵니다.
  • 로마서 8장 흐름에서 18절은 17절(“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과 연결되어, 고난이 성도의 길에서 낯선 예외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 나타나는 동행임을 보여 줍니다.
  • 18절 이후(19–23절)는 피조물의 탄식과 새창조의 기대를 펼치며, 26–27절은 성령의 중보를, 28절은 섭리의 확신을, 30절은 구원의 황금사슬을 제시해 18절의 소망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5)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핵심 어휘)

  • λογίζομαι(로기조마이, “생각하다/여기다/판단하다”): 단순 추측이 아니라, 근거 있는 산정·평가의 뉘앙스가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근거 위에서 “평가”합니다.
  • παθήματα(파데마타, “고난들”): 단수보다 복수로,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포괄합니다(육체·관계·영적 싸움·박해 등).
  • καιρός νῦν(현재 때): “지금”은 실재하나 잠정적이며, 종말론적 대비를 강화합니다.
  • δόξα(독사, “영광”): 단순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무게·광채를 포함합니다.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주어지는 참여적 영광입니다.
  • ἀποκαλυφθῆναι(아포칼뤼프테나이, “나타나다/계시되다”): 감춰진 것이 드러나는 “계시”의 동사로, 영광이 이미 준비되어 있으나 때가 되면 공개됨을 암시합니다.
  • οὐκ ἄξια(우크 악시아, “가치가 ~에 미치지 못하다”): “고난이 무가치”가 아니라 “영광에 견주어 자격/가치가 미치지 못한다”는 비교 평가의 표현입니다.

6) 금언(짧은 문장들)

  • “고난은 현재이지만, 영광은 영원입니다.”
  • “십자가를 통과한 자는 영광을 잃지 않습니다.”
  • “소망은 상황이 아니라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 “비교가 바뀌면 인생의 무게가 바뀝니다.”
  • “눈물은 끝이 아니라, 영광의 길목입니다.”

7) 신학적 / 주제별 / 목회적 정리

  • 신학적(개혁주의) 정리: 성도의 소망은 인간의 의지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주권의 은혜—예정, 유효한 부르심, 칭의, 성화, 영화—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흔들리는 감정 위가 아니라 언약과 그리스도의 공로 위에 서 있습니다.
  • 주제별 정리(고난-영광): 고난은 죄로 인해 들어온 비정상이지만, 하나님은 그 비정상까지도 사용하여 성도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십니다. 고난의 의미는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결말(영광)**이 부여합니다.
  • 목회적 정리(상처를 대하는 태도): 고난의 원인을 단정하는 언어를 경계하고, 울음을 억압하기보다 복음으로 해석하게 도우며, 공동체적 돌봄과 실제적 도움을 연결해야 합니다. 위로는 “가볍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말”이어야 합니다.

8)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구체)

  • 저는 고난 중에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판단을 멈추고, 말씀에 근거해 “하나님이 붙드신다”는 고백을 택하겠습니다.
  • 저는 매일 짧게라도 로마서 8장을 읽고, 특히 18절을 기도문으로 바꾸어 입술로 고백하겠습니다.
  • 저는 고난의 시기에 공동체를 피하지 않고, 믿음의 사람 한 명에게라도 상황을 나누어 함께 기도받겠습니다.
  • 저는 고난을 핑계로 죄와 타협하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정직하게 회개하며 거룩을 사모하겠습니다.
  • 저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묵상하며,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선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용서의 한 걸음, 격려의 한 마디, 예배의 자리, 섬김의 실천).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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