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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 (11) 다윗 (시 23:1-6)

by 【고동엽】 2022. 8. 26.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 (11) 다윗  (시 23:1-6)


아마 오늘 본문의 말씀 시편 23편의 말씀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웬만한 사람은 대개 암송하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때문에 시편 23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다윗을 좋아합니다. 저도 그래서 다윗이 좋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읽게 되는 다윗은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근사한 사람입니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편 23편을 중심으로 다윗에 대한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그의 시편 23편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푸른 초장과 아름다운 물가에 누어 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다윗이 너무 근사해 보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시편 23편에서 자신을 사자나 호랑이 같은 강한 동물로 인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자신을 어린 양과 같이 나약한 동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양과 같이 약한 동물들은 눕지 않습니다. 세상에 누울 수 있고, 누어서 잘 수까지 있는 동물은 강한 동물들뿐입니다. 사람은 강한 동물이기 때문에 누어 잡니다. 사자와 같은 동물도 강한 동물이기 때문에 누어 자기도 합니다. 누어 잔다고 하여도 누가 감히 건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약한 동물 중에 누어 자는 놈들이 있기는 합니다. 집에서 길들여진 강아지와 고양이 같은 놈들입니다. 야성이 살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동물은 원칙적으로 강한 동물이 눕고 약한 동물은 눕지 않습니다.

약한 동물들은 잠을 자도 웅크리고 잡니다. 유사시 즉시 도망갈 수 있는 자세로 잠을 잡니다. 바스락 소리만 나면 뜁니다.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뜁니다. 양과 같이 약한 동물이 눕는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목동 출신으로 그와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다윗이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자기는 양과 같이 약한 존재이어서 누어 잘 수 없지만, 마음과 삶에 쉼도 없고 평안도 없지만,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시기 때문에 누울 수도 있고 쉴 수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말 양과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유난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를 해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의 삶을 한 마디로 대표할 수 있는 단어가 있었다면 아마 그것은 ‘고난’일 것입니다. 세상에 다윗만큼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산 사람이 사실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다윗은 남 못지않은 고난의 삶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그와 같은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가 그와 냄새를 우리에게 전혀 풍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3편도 다윗의 시편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시편 중에 하나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꺽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아멘.

이 시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가면서 쓴 시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하나님에게 자기는 너무 대적이 많다고 고백합니다. 일어나 자기를 치는 자가 너무 많다고 고백합니다. 오죽 대적이 많으면 세상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대적이 되어 자기를 쳤겠습니까?

사람들이 그와 같은 다윗의 모습을 보고 저는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도망을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가 그의 시편에서 고백한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라는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피난가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의 삶과 인생을 포기할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피난을 갑니다. 그것은 그가 비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편 3편은 피난 중에 하나님께 드린 다윗의 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갈 때 맨발로 머리를 숙이고 울며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삼하 15장 30절) 그런데 그와 같은 처절한 모습으로 피난을 가면서 쓴 시편 3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수치스러워 머리를 가리 운 그 자리에서 그는 영광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이 다시 머리를 들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회를 얻기 위해 삶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피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다윗은 시편 3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그 와중에서도 누워 자고 깨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도대체 상상이 가십니까?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가면서도 잠을 자고 깬다는 것이 여러분은 이해가 가십니까? 저는 상상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랬습니다. 그 와중에도 잠을 잤습니다. 깊은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그의 시편 23편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 와중에서도 누워 자고 깰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붙잡아주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천만인이 둘러치려 해도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와 같은 마음을 오늘 시편 23편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말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고백은 말의 고백이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을 벌벌 떨게 하였던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히 <너는 칼과 단창을 의지하고 내게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네게 나아간다.>라고 외치며 나아가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근사한 사람입니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는 도무지 절망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겁이 없는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자신의 항심(恒心)과 평정심(平靜心)을 잃지 않았던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삶 속에는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가 있었습니다.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세상이 줄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뺏을 수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다 다윗과 같은 복을 받았고 다윗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평화는 힘에서 옵니다. 그것은 폭력과 무력과 같은 외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세상적인 힘은 오히려 평화와 평안을 깨트립니다. 사람들은 평화와 평안을 깨트리는 무력을 보다 강한 무력으로 막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힘으로 평화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미국이 911 테러를 당한 후 자신의 막강한 힘과 군사력을 믿고 그 힘으로 테러를 진압하고 평화와 평안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는 점점 더 그로 인하여 멀어지고 있고, 세계의 평화는 고사하고 미국민들 자체도 심각한 불안 가운데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힘에서 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고 불안한 까닭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누워서 자지 못하고 웅크리고 잘 수밖에 없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평화와 평안을 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경제력에서 올까요? 군사력에서 올까요? 과학에서 올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하여 평화와 평안을 보장 받으려고 하지만 그와 같은 힘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약해지고 불안에 떨게 되는 것입니다.

돈으로 편안함을 얻을 수는 있지만 돈으로 평안함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불안하게 될 것입니다. 부자가 될 수록 담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권력으로도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권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경호원들이 많이 따라 붙어야만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와 평안을 가져다주는 참 된 힘은 세상에서 오지 않고 하늘에서부터 옵니다. 사람에게서 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돈에서 오지 않고 믿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잊곤 하지만 하나님은 한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으로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우리를 해치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천군천사들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른 자에게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제가 설교 중에 참 많이 사용하는 예화를 다시 사용하려고 합니다. 막내가 여섯 살 때 골목길을 함께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골목 아래에서 오 학년짜리 아이 하나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자마자 우리 막내가 ‘아빠 저 형아가 나 때렸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복수를 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내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자 내 손을 뿌리치고 가서 그 오 학년짜리 아이를 발로 차주고 왔습니다.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빠가 없다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야 하겠지만, 아빠가 옆에 있으니 오 학년짜리도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그때 어린 소년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간단히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 여섯 살, 골리앗 오 학년, 하나님 80 kg>.......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다윗은 유난히도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의 일생은 정말 힘든 일만 많았습니다. 소년 때 골리앗을 만나지 않나, 그 골리앗을 물리치자 사울이 죽이려고 쫓아다니지를 않나,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되었지만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나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너무 당당합니다. 꿋꿋합니다. 한번도 그 힘들고 거친 세상에 항복하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불안해 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거친파도 넘실거리는데 그와 같은 세상에서 사는 다윗의 내면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입니다.

평안한 세상에서의 평안이라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평화와 평안은 평안한 세상에서의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불안한 세상에서의 평안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와 달리 강한 사람이었다면 그의 평안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오 학년이고 골리앗이 여섯 살이었다면 다윗의 당당함과 그가 누렸던 평안함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은 존재들인데 다윗은 사자와 같은 존재였다면 그의 평안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윗은 우리와 똑같이 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여섯 살이었고, 그가 만난 골리앗은 우리와 똑같이 오 학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때문에 늘 힘들고 불안한 삶을 사는데 다윗은 우리와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서 삽니다. 두려움과 불안을 모르는 삶을 삽니다. 골리앗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이겼다면 그것은 근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랬다면 그것은 장수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니 근사한 것입니다. 세상이 만만하다면 우리가 세상을 이겨 산다고 하여도 하나도 근사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은 누구에게만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가난한 자에게도 만만치 않고 사실 부자들에게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은 낮은 사람들에게도 힘들고 사실 높은 사람들에게도 힘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자가 되면 될 수록 오히려 담장이 높아져야만 하고,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경호원이 많이 따라 붙어야만 합니다. 삶이 편치 않다는 증거입니다. 불안하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을 근사하게 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참 사람을 근사하게 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믿음은 우리에게 용서라는 근사함을 주었습니다. 오늘 보니 믿음은 우리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라고 하는 근사함을 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골리앗처럼 무서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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