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3:13-15
<이 설교는 박조준 목사님의 설교를 교사헌신예배에 맞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한 구석에 영원히 지을 수 없는 분들이 있다. 한평생 숱한 만남의 사람이 있고, 인연(因緣)으로 얽혀진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스승을 세 가지 면으로 말할 수 있다. 곧 부모, 교사, 목사가 그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낳아서 키워주는 데에 선생의 가르침이 있고, 교사는 지식 교육과 인격을 교육함에 선생의 가르침이 있고, 목사는 영적인 교육을 함에 선생의 가르침이 있다. 이를 가르쳐 삼사(三師)라 혹, 사부일체(師父一體)라고도 한다.
1. 먼저 생각할 것은 누가 가장 위대한 스승인가?
한 소년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방황했다. 온 세상을 헤맸으나 "위대한 스승"을 찾지 못했다. 소년은 너무 지쳐서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흰 수염과 맑은 눈동자를 지닌 한 노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아, 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소년이 대답했다.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마. 지금 곧장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한 사람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올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네가 찾는 위대한 스승이란다." 소년은 "위대한 스승"을 빨리 만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다. 소년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뛰어나와 소년을 맞았다. 그 "위대한 스승"은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다.
여러분,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어머니 곧 부모는 최선의 교육자이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운 학교이다. 부모는 그 가정 학교의 교사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말씀 안에서 잘 양육하도록 부모에게 맡기셨다. 부모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가치관을 심어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산업화, 분업화되면서 하나님의 학교로서 가정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다. 모든 것은 일반 학교 교육에 맡기고 가정은 단지 쉬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부모가 더 이상 교사이기를 포기한 데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녀들을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학원으로 내몬다. 부모는 이제 학비를 조달하거나 생활편의를 도모해주는 아저씨며 도시락이나 싸주는 아주머니 노릇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칼릴 지브란은 말하기를 "부모는 활이요, 자녀는 화살이니 하나님께서 궁수가 되어 목표지점을 향해서 멀리 당길 때 그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나아간다"고 했다. 그렇다. 부모는 활이다. 부모가 당기는 대로 화살인 자녀는 날아간다. 여러분은 어디를 향하여 화살을 쏘고 있는가? 세상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서인가?
하나님이 맡기신 이 사명을 학교의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100% 다 넘겨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자기 자식을 제자로 삼아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먼저 위대한 스승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움은 부모가 100% 감당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본디부터 스승을 부모만큼 공경하는 것을 도리로 여겨왔다. 육신은 어버이에게서 받았지만 정신은 스승들에 의해 길러지기에 그림자조차도 밟을 수 없는 제2의 부모로 섬기는 미풍양속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사실 삶의 고비 때마다 인생의 빛이 되어 마음을 어루만져 줄 스승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승은 위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적 지식을 가르치는 목사와 교사는 진정 위대한 스승이다. 사실 존재적인 면으로만 생각한다면 목사와 교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가장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그래서 고전 4:1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곧 복음을 가르치며 전하는 자를 위대한 스승으로 알고 인정하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기에 가장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교사 여러분, 우리는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서 일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2. 스승은 존경받아야 된다.
여러분, 교육이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심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교육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시설이나 교육 기자재의 현대화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이 없이는 교육은 죽은 것이다. 선생님에 대한 참된 존경과 고마움이 있을 때 비로소 교육은 시작되고 배움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다. 노벨 수상자의 22%(480명중 93명), 세계 200대 재벌의 15%, 미 의회 정치인의 10%, 미국 변호사의 30%, 법대, 의대교수 중 50%, 언론사, 예술가, 과학자 등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다.
어떻게 소수민족인 유대인들이 이처럼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교육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교육 시스템 가운데 어떤 요소가 세계 최고가 되게 할까요? 그것은 교육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교육의 주체인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풍토가 유대인을 가장 강인한 민족으로, 다방면에 걸쳐 세계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는 민족으로 키운 원동력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교육을 가장 귀하게 여겨온 족속들이다. 그리고 교육의 주체인 랍비를 가장 존경하였다. "랍비"라는 말은 말 그대로는 "선생님"이라는 말이지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위대하신 분" 또는 "존경할 사람"이라는 뜻의 말이다. 유대사회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정치가도, 재력가도, 사업가도, 군인도, 관료도 아니라 랍비들, 즉 선생님들이다. 랍비들의 가르침을 묶어놓은 책이 탈무드인데, 탈무드가 유대사회에서 가지는 권위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성경에 버금갈 만큼 권위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존경하면서 자라도록 만들어진 사회적 분위기, 사회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는 선생님에게 가장 성스러운 권위를 부여했던 공동체가 유대인 공동체요 사회였다. 이런 것이 유대인을 세계 최고가 되게 하는 교육의 힘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현실은 지금 사회 학교에서의 선생님은 모두 죄인으로, 부도덕한 사람들로, 돈만 아는 돈 벌레로 깔아뭉개고 있지 않는가? 또한 교회학교에서는 어떤가? 교회학교 교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내가 교사라는 자긍심도 없어요. 이런 풍토 속에서 무슨 교육이 이루어지겠는가?
스승은 존경받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목사나 교회학교 교사는 더욱 존경받아야 한다. 그래서 딤전 5:17에서는 말씀하시기를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double)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그랬다. 교회를 잘 다스리는 장로를 보통 성도보다 갑절로 존경해야 된다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사나 교사는 그들보다도 더 특별하게 존경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스승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가장 존경하게 하는 풍토를 다시 살려야 하겠다. 우리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스승을 무시하고 악평하고 조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사를 우습게 보도록 말하고, 교회학교 교사를 쓸데없는 존재로 평가하는 곳에는 더 이상 살아있는 교육은 없는 것이다.
3. 그러면 오늘에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신가?
얼마 전 일간지에서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과 싫어하는 선생님에 대한 조사결과를 일본학생들과 비교하여 실었다. 어린아이들이 바라는 선생님의 모습은 우리가 닮아야할 품성이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 4위는 늘 웃는 얼굴로 대하는 선생님, 3위는 순수하고 솔직한 선생님, 2위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선생님, 1위는 재미있는 선생님이었다. 일본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 4위는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 3위는 친하기 쉬운 선생님, 2위는 유머가 있는 선생님, 1위는 상냥한 선생님이었다.
반면에 한국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으로는 4위는 무뚝뚝한 선생님, 3위는 잘난 체하는 선생님, 2위는 교실에서 담배 피우는 선생님, 1위는 짜증을 많이 부리는 선생님이었다. 일본 학생들이 싫어하는 선생님으로는 4위는 잔소리가 심한 선생님, 3위는 완고한 선생님, 2위는 편파적인 선생님, 1위는 화를 잘 내는 선생님이었다.
로엘 하우는 그의 저서 '대화의 기적'에서 인간은 두 가지 대화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말로 된 언어와 관계로 된 언어가 그것이다. 인간 사이에서 대화의 장벽을 해소하려면 말로 된 언어보다 관계로 된 언어를 잘 구사해야 한다. 좋은 관계 개념은 대화의 기적을 낳게 된다. 우리는 대화의 관계 속에서 살지만 너무나 많은 장벽들이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장벽이 많이 있다. 인종의 장벽, 언어의 장벽, 종교의 장벽, 문화의 장벽,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장벽들이 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장벽이 없었다. 이 지구상에 어디를 가 봐도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장벽은 없는데 인간이 무료하여 별의 별 장벽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좋은 스승, 좋은 선생님은 누구인가? 이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생명적 관계, 떼고자 하나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사람을 대하며 가르치는 스승, 그가 가장 좋은 스승인 것이다. 아이가 어떻게 되든, 교회에 나오든 안 나오든 나는 관심 없이 대한다면 그건 교사가 아닌 것이다.
4. 참된 스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동서고금을 통해 만인이 우러러보는 인류의 참 스승이라 하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최고의 스승이다. 히브리어로 랍비는 선생님(요 20:16)이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랍비라 부르심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랍비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했다(마 28:8,10). 이같이 말씀하심은 선생과 지도자의 책임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었다.
참된 선생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고 하면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드디어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인이요,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대 스승이요, 영원한 감동을 주는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희생이 있어야 하고, 참된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감동(感動)이 존재해야 한다. 배우고 싶어 목마른 제자의 뒤통수를 쳐줌으로써 제자는 무릎을 꿇는다. 여기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감동이다. 감동이 없는 한, 스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말은 애초에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을 수조차 없다"는 고마움의 절규이지, 자칫 오해되듯 강제적 규범이 아닌 것이다.
교회학교는 어린이들에게 영적인 감동과 감격을 주는 곳이다. 학교교육은 이성과 경험을 강조하는 머리교육이며 교회학교는 계시와 영성을 강조하는 가슴교육이다. 이 위대한 일을 우리 교사들은 잘 감당해 나가야 하겠다.
오늘날 "스승은 많되 참된 스승은 없다"고 말한다. 참 스승이 필요한 시대이다. 오늘 우리 각자가 좋은 스승이 되기를 다시 한번 상기하시고, 무엇보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교사 여러분 모두가 위대한 스승임을 자각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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