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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by 【고동엽】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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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8:19-32

   오늘은 486번째 맞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AD 1517년 10월 31일,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과 부패에 항거하여 "오직 믿음"을 외치며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신앙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거대한 교황권으로 세계를 손안에 쥐고 있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탄절 때면, 성탄 미사를 중계하는 TV에서 보게 되는, 그 베드로 성당을 완공하려고 엄청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였습니다.
   면죄부란....
부모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누구든지....
잘못된 신앙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도 면죄부를 사는 돈이 돈궤에 "땡그랑"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그 불쌍한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행 차표"입니다.
   이 면죄부 판매를....
교황 레오 10세는 "알브레트"란 사람에게 맡겼고, 그는 유명한 웅변가 "테첼"을 고용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그 특유의 웅변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지옥 간 부모 형제를 구원하려는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려고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일행이 위텐베르크(Wittenberg)에 왔을 때....
이 기막힌 사실을 목격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95개 조항으로 작성하여 위텐베르크 교회의 벽에 붙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에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의지나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면죄부를 사서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돌아가자"를 외친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AD 1517년 10월 31일에 95개 조항의 성명서를 위텐베르크 교회의 벽에 계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기념일은 10월 31일이지만, 종교개혁 주일은 10월의 마지막 주일에 지킵니다.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부패하고 타락한 신앙에 대항하여 신앙의 개혁을 외치며 항거한(protest)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 카톨릭에 항거하며 바른 신앙의 길을 찾은 사람들을 항거한 자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항거한 자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분가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신앙을 되찾아 바른 길을 가는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 본래의 교회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에....
일반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구교와 개신교, 천주교회와 예수교라는 분리를 하며, 개신교를 천주교의 작은 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상은 천주교가 부패, 타락한 신앙의 길로 본래의 교회에서 이탈해 나간 것입니다. 개신교가 딴 살림을 차려서 작은 집으로 분가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의 정신....
그것은 중세 시대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요, 앞으로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외친 종교개혁의 정신은....
     ①.오직 믿음(Sola Fide)
     ②.오직 성경(Sola Scriptura)
     ③.오직 은혜(Sola Gratia)
     ④.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은 신앙의 근본 정신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에 오늘의 교회가 이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교권 쟁탈, 돈 문제, 여자 문제, 잘못된 종말론, 거기에다 교회 세습 문제 등의 부끄러운 모습은 신앙의 근본 정신에서 이탈한 부패하고 타락된 모습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에서 바른 신앙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계시록 13:14-15절/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앞으로 이런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이 되고, 주님의 재림의 때가 다가올수록 믿음에서 떠난 엉터리 예수쟁이들이 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고, 신앙의 근본 정신을 버리고, 소위 말하는 시류를 좇아 살아가는 엉터리 예수쟁이들이 판을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평화의 시대에서도....
교권 쟁탈, 돈 문제, 여자 문제, 잘못된 종말론, 거기에다 교회 세습 문제 등의 부끄러운 모습으로 엉터리 예수쟁이들이 판을 치는데,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죽이는,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의 근본 정신을 버리도록 강요를 하는 시대가 오게 되면 교회는 더욱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중세 시대처럼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던 곧 기독교를 박해하던, 그런 박해의 시대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박해의 시대를 우리 기독교가 대비해야 합니다.
교계 신문인 "기독교신문"에 『‘종교개혁’485주년 특집- 한국교회를 진단한다』는 작년 기사에 「한국교회는 1백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현재 ‘장로교회’의 간판을 내 건 교단만도 100개가 넘는다는 게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 분열의 이유도, 신학과 신앙의 차이보다는 교권을 둘러싼 다툼과 지방색 때문이었다는 것 역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설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이같은 분열현상 역시 개혁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장로교단만 100개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 분열의 이유가 신학과 신앙의 차이가 아니라 교권을 둘러싼 다툼과 지방색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어도 다가올 박해 시대를 감당하기 힘들 것인데, 장로교단만 100개가 넘으니....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루터회, 성공회, 순복음 등 각 교파를 다 감안한다면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이러한 분열되고, 부조리한 모습들이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열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하나의 교회"로 연합하자는 외침이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학과 신앙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의 교회"만을 목표로 연합하는 데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하나되기 운동"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치, 하나의 경제, 하나의 문화, 하나의 종교.... 이 "하나의 종교"의 흐름이 WCC 운동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고백과 신학적으로 하나될 수 없는 교단과 당간 교류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신학이 혼합되는 또 하나의 변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오늘의 한국 교회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신앙과 신학의 변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음주문제(飮酒問題)만 하더라도 불신자들은 예수쟁이는 술을 안 먹는 것으로 압니다. 오히려 신자들이 술을 먹을 수 있다고 하며 함께 마시는 실정입니다. 술 마시는 게 「죄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건덕(健德)」의 문제입니다. 바울처럼 남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건덕(健德)을 위해서라면 먹지말아야 합니다(고전8:12-13).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과 신학이 변질되어져 가고, 교회가 그 거룩성을 잃어 가고,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비난과 욕설을 당하는 현실 앞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시던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각자 스스로를 돌아보아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교회를 개혁하는 첩경입니다.

   1.회개하라

   본문 30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여기의 "돌이켜 회개하다"와 "떠나다"는 같은 단어[슈브(bWv)]로.... "돌아서다, 돌이키다, 회복하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죄를 마음으로 뉘우치고, 그 죄된 삶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뉘우친다[나함(!j'n:)]"는(삿21:6)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뜨거운 감정을 동반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에는 결단이 촉구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눅18:13) 고백하는 세리의 마음으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요8:11)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세리와 같은 뉘우침과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는(욥34:31) 결단으로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그러기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죄를 뉘우치고[나함(!j'n:)], 그 죄악된 삶에서 돌이키라고 했습니다[슈브(bWv)]. 그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 모든 죄악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버리고 등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하던 발걸음을 뉘우쳐 돌이켜 다시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이 바로 회개의 삶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한번 회개한 성도는 더 이상 회개할 필요 없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한번 하나님께로 돌이킴으로 두 번 다시 돌이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됩니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도록 하나님께 다다랐다"고 할 때까지....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 안에 거하십니다. 그것은 생명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의 거룩을 가지고 서는 것은 삶을 말합니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삶입니다.
   그 회개....
바로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마음 가죽을 베는 일」입니다(렘4:4). 이것을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했습니다(겔36:26).

   2.의를 행하라

   본문 21절/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의를 행하면 정녕 산다고 했습니다. 그가 악인이든, 그가 죄인이든.... 의를 행하면 정녕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악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나" 곧 회개하고 "의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의를 행하라"....
의를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과 구례를 지키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표면적 의미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는 그저 단순히 법 조항으로써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신6:5).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레19:18). 주님은 이것을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습니다(마22:39-40).
   "의를 행하라"....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의를 행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실천할 때 "의를 행하는 것"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도적질하지 말라」의 제8계명은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지 않음으로 제8계명을 지켜 "의를 행한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도적질하던 자가 도적질 않음으로....
도적질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의"를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적질 않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던 자가 다시 도적질하지 않고 제 손으로 수고하여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때에(엡4:28) 비로소 "의를 행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된 사람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 "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율법의 조항을 어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을 좇아 살아갑니다. 진정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된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에베소 4: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적이 회개하고서 열심히 수고하여 얻은 소득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바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의를 행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3.공평을 행하라

   본문 25절/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 도다"....
여기의 "공평하다[타칸(@k'T;)]"는.... "저울로 달아 균형이 맞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평(天平) 저울로 달아 균형을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짐이 없습니다. 물론 이 공평이 하나님의 공의(公義)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하나님의 의」로 "호리"의 죄악도 용납할 수 없는 의를 말합니다(마5:26).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 도다"....
지금 이렇게 주를 향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무죄를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으로(겔18:2), 자신들이 당하는 모든 재앙은 조상들의 죄악 때문이기에 자신들은 회개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죄를 자신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시니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8:3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는 말씀을(출20:5)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제2계명의 말씀은 죄악의 영향이 3-4대까지 미친다는 말씀으로 봅니다. 이는 다음의 말씀에서 분명히 하고 있고, 다시는 이런 속담을 쓰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20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의인의 의도, 악인의 악도 모두 각각 자기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죄악을 담당하는 일에 아비와 아들이 서로 대신할 수 없으며, 의도 또한 서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다니엘, 욥과 같은 의인이라도, 그들은 멸망에서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만 건지겠다」고 했습니다(겔1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한 사람은 공평을 행하여 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오히려 하나님보다 더 공평하다고 외쳤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범죄한 것이지,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고 했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신 포도를 먹었느냐는 것입니다. 옛 속담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교만이 하늘을 찔러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징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3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위하지, 사망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의인은 생명으로, 악인은 멸망으로 심판하시나 의인을 기뻐하심 같이 악인이 회개하여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고 했습니다(본문32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회개의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계명과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 베푸는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옛 속담과 같은 전통과 관례에 얽매여 치우치지 말고 공평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종교개혁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엉터리 예수쟁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엉터리 목자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고, 신앙의 근본 정신을 버리고, 소위 말하는 시류를 좇아 살아가는 엉터리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론 말세의 징조이긴 합니다만 너무나 엉터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노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네 농촌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학생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SFC 학생회, 청년회가 제 구실을 못하는 교회가 늘어갑니다. 교회의 성도들의 연령분포도가 심각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문을 닫은 서구의 교회가 걸어간 길을 지금 한국 교회가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486주년을 맞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엉터리 신앙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가고 있는 엉터리 신앙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엉터리 신앙으로 빠져들어 가니, 거룩성은 오간데 없고 거저 "하나되는 것"이 최고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을 잃지 말아야 성도입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고후6:17).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계18:4). "하나되기"에 앞서 관연 그 곳에 하나님의 거룩이 있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잃지 않는 것이 오늘의 성도가 이루어야 할 종교개혁입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진정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이 혼탁해져 가는 세대를 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계에서 발표하는 통계로 보면, 기독교인이 전국민의 1/4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카톨릭까지 합치면 1/2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자신들이 개신교측보다 더 많다고 하지요. 그런데, 한국의 문화는 기독교화 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 문화를 좇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 성도들 모두는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스스로를 개혁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개혁의 첩경입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공평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공평은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공평의 저울로 달아 판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공평이 교회 안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교권 쟁탈, 돈 문제, 여자 문제, 잘못된 종말론, 거기에다 교회 세습 문제 등의 부끄러운 모습으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욕설을 듣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공평의 저울에 달아볼 수 없습니다. 달아볼 사람도, 달아볼 공평의 저울도 없습니다.
   교회 법이 있다고 하나....
이미 공평을 잃은지 오래라고 서로를 못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서로간에 불신만 키워가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사랑을 외치면서도 서로가 미움을 넘어 증오로 치달리고 있습니다. 급기야 세상 법정으로 달려갑니다. 교회는 "거룩한 무리" 곧 성도의 모임이므로 교회의 모든 문제는 "거룩성"이 함께 합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교회의 "거룩"을 세상 법정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세상 법정이 교회의 "거룩"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까....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진정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진정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성도간에 공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집사, 권사, 등은 받은 바 은사를 따라 주어진 직분입니다. 이것이 계급화 되어 공평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이요,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같은 지체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눈일 수 없고, 모두 다 귀일 수 없고, 모두 다 코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12:17). 바로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 했습니다(고전12:29-30).
   그렇다고 "너나 나나"가 아닙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딤전5:17). 여기의 "다스리다[프로이스테미(proi?sthmi)]"는.... "앞에+서다"는 합성어로 "인도하다, 사회하다, 다스리다"는 뜻입니다. 주님처럼 몸소 양떼를 앞서가며 모본을 보이는 사람을 말합니다(요10:4). 이런 장로를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존경은 계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서 나옵니다. 존경심은 마음 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모본을 보이는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목사)를 그보다 더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롬12:10). 결국 성도간에 서로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존경심은 사라지고, 계급화를 이루어 공평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진정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성도간에 공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가 이루어야 할 종교개혁입니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몇 몇 교회의 문제들.... 그 핵심은 바로 공평을 잃은 것입니다. 거룩을 잃은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을 잃은 것입니다. 진정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나부터 거룩을 회복하고, 공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들이 모여 교회개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교회가 이루어야 할 종교개혁입니다. 진정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나부터 거룩을 회복하고, 공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 교회개혁에 초석이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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