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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향기 (마27:50-53,고후2:14-16 )

by 【고동엽】 2022. 8. 22.
 

 부활의 향기    (마27:50-53,고후2:14-16 )

어느 가난한 아버지가 딸에게 조그마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나중에 커서 필요하면 상자를 깨고 그 안의 다이어몬드를 팔아서 유용하게 쓰라고 하면서 그 상자를 주었습니다.

그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고 이 딸은 혼자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여러 역경을 헤쳐나갑니다. 물론 가난은 그가 겪은 역경 중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상자 안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가난 가운데서 용기를 얻고 역경을 이기곤 했습니다.

수년후 그는 드디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생활고로 인해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이아몬드의 중요성도 덜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이 나서 그 다이아몬드를 보석상에 가지고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다이아몬드를 빛에 비춰봅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이봐요, 이것은 다이아몬드가 아니예요. 한갖 유리 조각에 불과해요."

이 소리를 듣고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잠시 후 웃고 울고 다시 웃고 또 웁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아니예요. 보석상 주인님,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귀한 다이아몬드예요."

여인은 가난한 아버지에게서 사랑의 보석을 받았습니다. 여인은 어려울 때마다 이 사랑의 보석을 생각하였기에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보석은 다이아몬드는 아니었지만, 가난한 아버지의 지혜가 담긴 사랑의 보석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 사랑의 보석으로 인해 늘 감사하면서 주어진 역경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도 우리가 늘 감사해야 할 사랑의 보석이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보석이 있지 않을까요? 이 사랑의 보석 때문에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멋지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보석은 무엇일까요? 오늘 부활절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그러면 주님의 부활일까요? 그것도 사랑의 보석일 줄 압니다. 그러나 더 우리의 오늘의 삶에 가까운 선물이 있습니다. 부활절에 주어지는 또 다른 선물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부활절이면 늘 선포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죽음이 이김의 삼킨바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 이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부활절을 맞이하여 늘 선포되어야 할 메시지는 분명히 죽음이 이김의 삼킨바 된다는 메시지이어야 할 줄로 압니다. 죽음이 부활에 삼킨 바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활이 죽음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달리 말씀 드리면 주님의 부활이 주님의 죽음을 없애지 못합니다. 이길 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 우리의 죽음을 없애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2천년 전에 부활하셨어도 계속 온 땅에는 죽음이 덮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유익이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선물로 변합니다.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선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로는 죽음이 부활의 삼킨바 된다는 뜻일 줄로 압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생각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도리어 주님의 부활을 믿기에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줄 압니다. 죽음을 깊이 생각할수록 우리는 죽음이 바로 귀한 선물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바로 부활을 믿는 자에게 죽음이 선물임을 선포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면 부활을 믿고 아울러 죽음을 선물로 받아드리는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기독교 역사상 누구보다도 더 부활을 깊이 체험했고 아울러 죽음을 가까이 하면서 지낸 분은 다름 아닌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납니다. 또한 주님을 위해 사역하는 중 때때로 옆에서 계신 주님을 체험합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늘 죽음의 위험 가운데 삽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된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며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사도 바울은 늘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늘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죽음을 안고 산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을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사도바울은 부활의 향기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부활의 향기가 온 장안을 가득 메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부활의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사도가 된 이유는 사도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뵈면서 살았습니다. 아울러 자신 안에 주어진 죽음의 선물을 늘 간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신비스러운 부활의 향기가 온 천지를 가득 채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부활의 아침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 권세 이기시고 나오신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이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선물을 마음 속 깊이 감사히 받으십시다. 우리들의 삶에는 주님의 부활의 향기가 가득 차고 넘칠 것입니다.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가 간직해야 할 세가지 죽음의 선물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주님은 성금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바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이라는 선물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안고 제자들은 이틀간 고통 가운데 지냅니다. 금요일밤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하루 종일 그리고 주일 아침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제자들은 주님을 버린 죄책감에 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책감을 생각하는 것도 잠시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애통하였을 것입니다. 그토록 고귀하시고 아름다운 분이 생을 멋지게 마치지 못하고 수치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수 밖에 없었음을 생각하며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니콜라스 하비(Nicholas Harvey)라는 분이 '죽음의 선물(Death's Gift)'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깊은 애통 중에 도리어 기쁨이 솟아난다고 말합니다. 애통이 예측할 수 없는 기쁨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을 목격한 후 이틀간 깊은 애통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생애 처음 놀라운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 할수록 어디선가 솟아나는 신비한 기쁨에 잠겨 들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기쁨이 솟아 나오는 것을 서로서로 숨겼을지 모릅니다. '지금이 기뻐할 때가 아니지' 생각하면서 억지로 기쁨을 억눌렀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기쁨 가운데서 계속 주님의 죽음을 애통해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기쁨은 또다시 솟구쳐 올라옵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이 모습을 잘아셨었는지 주님은 3일만에 부활하십니다. 애통 가운데 솟구쳐 나오는 기쁨의 출구를 마련해 줍니다. 애통 속에서 신비한 기쁨이 차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지난 40일간 우리는 수난절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수난절 기간 주님의 죽음을 애통해 한 만큼 우리에게는 신비한 기쁨이 주어졌을 줄 압니다. 아울러 그러한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부활의 모습을 안고 나타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주님의 죽음은 선물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깊게 애통할 때 우리는 신비한 기쁨 가운데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부활의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이 귀한 선물을 늘 간직하십시다.

두 번째로 부활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이웃의 죽음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에 일곱집사가 나옵니다. 그중 대표적인 집사로 스데반과 빌립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최초로 순교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사건이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8장부터는 놀라운 선교가 시작됩니다. 7장과 8장을 잇는데 중요한 계기가 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 8장 2절을 보면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장 3절부터 본격적인 이방인 전도가 시작됩니다. 스데반 집사의 절친한 친구인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로 가서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에 있다가 한참 남쪽인 가사에 가서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를 만나 전도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주의 복음이 온 세계로 퍼지는데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후 비로서 복음은 전세계로 전파케 된 것입니다. 왜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죽음이 필요했을까요?

초대교회 공동체는 스데반의 죽음을 애통해 했습니다. 크게 울었습니다. 그들의 애통함 가운데 초대교회 공동체는 새로운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모습을 가슴에 안고 세계로,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선물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초대교회는 부활의 향기를 온 세상에 퍼지게 한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죽음의 선물'이란 책에서 저자는 스핑글(Spingel)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죽은 사람은 이웃의 애통함 가운데 결코 잊혀진 자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존재의 양태(form of presence)'만 바뀌어집니다. 죽은 사람은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존재로 애통하는 자들의 삶 속에 남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소유가 됩니다. 이것은 바로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 교인들은 애통해 했습니다. 애통하는 교인들의 마음속에 진주와 같은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진주가 애통하는 교인들의 삶 속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초대교회 교인들은 스데반의 생애를 안고 온 세계는 죽음을 마다않고 전도하러 나가게 된 것입니다. 온 세계에 부활의 향기를 발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 116장 15절에 보면 성도의 죽음은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도의 삶을 생각하며 애통해 할 때 그분의 삶이 놀라운 선물이 되어서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의 축복이 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부활의 향기를 발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은 성도가 우리 안에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부활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무덤에 있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석하기 아주 어려운 부분입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성도들의 죽음은 부활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나타날 축복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몸소 우리가 당신처럼 부활할 것을 이 아침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도 귀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죽음을 선물로 감사히 받는 자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부활의 향기를 발하면서 살게 됩니다.

자신의 죽음을 담대히 받아드리며 살던 후릿츠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부인이 자기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후릿츠야말로 사회를 변혁시킬 소망을 품고 언제나 인생과 더불어 적극적인 논쟁을 거듭해 온 사람이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새로이 강렬한 감수성을, 깊은 생의 즐거움을, 아름다운 것을 본질로 하는 대상과의 강렬한 공존의식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와 더불어 가벼운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그가 어린이들, 새들, 꽃들, 나무들, 그리고 구름들을 보며 참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친구들은 삶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집 특유의 평온한 분위기 때문인지 지나는 길에 즐겨 방문하곤 하였다. 친구들은 후릿츠의 애정 어린 관심을 고마워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날까지 그의 충고를 청해오곤 하였다.

후릿츠의 익살과 해학, 부드러운 웃음, 두 눈에 반짝이던 영채(映彩)는 잠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으며, 내가 하는 일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항상 도와주었다. 사람이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일 때에 그 삶이 얼마나 높이 승화될 수 있는가를 나는 보았다."

죽음 앞에서 도리어 높게 승화되는 인간의 모습이 소개되어지는 글입니다.

저의 아들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는 에녹(Enoch)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들려 올라간 분입니다. 왜 저희가 저희 아들의 이름을 에녹으로 지었는지 추측하실 줄 압니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잘 지은 이름 같지 않습니다. 특히 부활절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그러한 생각이 더해 갑니다.

한번 인간으로 태어나서 죽음을 맛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이 보장되어 있는데... 죽음 이후로 큰 유익이 있는데...죽음의 과정이 얼마나 멋있는데... 부활의 소망을 안고 죽음의 선물을 맞이할 때 우리의 삶은 도리어 죽음이 없는 삶보다 드높게 승화될 줄 압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없애기 위함이 아닙니다. 죽음을 승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언젠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선물을 인정할 때 우리의 삶도 높이 승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우리의 죽음의 선물을 담대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이할 수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많이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젊어서 몸이 허약하여 오래 살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가까이하고 살았던 분입니다. 그는 죽음의 선물을 늘 안고 살았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부활의 향기를 밝게 퍼뜨리며 삶을 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부활의 아침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십시다. 아울러 우리에게 주시는 세가지 선물을 고이 간직하십시다. 주님의 죽음, 이웃의 죽음, 나의 죽음, 이 세가지 선물을 감사히 간직하십시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은 선물로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귀한 선물을 마음에 간직하고 온 세상에 부활의 향기를 발하십시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출처/이영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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