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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삼중 고난 /마 27:32-46

by 【고동엽】 2022. 8. 17.

마 27:32-46

오직 예수!
고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십자가 고난으로 마감하신 사실을 기념하며, 주님의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하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를 배워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 짐을 지시고 자원하여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주님은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또한 무덤에서 부활·승천하심으로 만유 위에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역사적 유산을 남깁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 Toynbee)는 세계 역사상의 우수한 문화와 문명을 ‘고난과 역경의 소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인류를 위한 모든 고난 중에서 가장 유익한 고난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상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고통의 크기도 컸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에 고통을 당하는 전인적인 고난, 삼중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의 삼중 고난을 되새겨 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육체적인 고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극심한 육체적 고난이었습니다.

  35절,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

  1세기 로마시대에 십자가 형은 극형중의 극형이었습니다. 주로 반역자나 극악한 살인자들에게 가해지던 형벌이었습니다. 교수형이나 단두대형은 육체적인 고통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사형법임에 반하여, 십자가형은 육체적인 고통을 최대로 느끼며 몸부림치며 죽게 하는 사형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세로는 이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사형법’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형의 시행과정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십자가형에 언도된 죄수를 빈사상태에 이를 정도로 채찍질합니다.
  둘째, 자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직접 지고 현장까지 가게 합니다.
  셋째, 죄수의 옷을 벗기고 죄패를 목에 걸고 십자가에 못박아서 고통 가운데 서서히 죽어가게 하다가, 죄수의 다리를 꺾어 소생의 가능성을 배제해서 완전히 죽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전 과정을 다 겪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신 주님은 밤새도록 끌려다니시면서 심문받고 군병들에게 채찍으로 린치를 당하는 동안 이미 육체적인 에너지를 소진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 육체적인 힘마저 없는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쏟으셨습니다. 여기에다 주님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22편은 이러한 주님의 고난에 대해 상세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4-16)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처럼 엄청난 고통의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그분에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 잘못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요,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의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를 자원하여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은 이 육체적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본문 33절 이하를 봅시다.
  33절,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절,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여기 ‘쓸개 탄 포도주’는 이미 쓸개가 포도주에 오래도록 담겨 있어서 그 효과를 내고 있는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매우 쓴 맛을 내게 된 것으로, 마취효과가 있어 죄수들에게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져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혀 끝으로 맛보신 다음에 거절하셨습니다. 대못에 박힌 손과 발에서 오는 엄청난 고통, 그리고 깊이 박힌 가시 면류관으로 인해 전달되는 찢어질 듯한 머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는 데 그 포도주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주님은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의 동사가 미완료형(에델렌)이 쓰인 것으로 보아, 마시우려는 로마 군병들과 마시기를 거절하시는 예수님 사이의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주님의 처지라면 어찌했을까요?  아마 그 마취 포도주를 좀더 달라고 애걸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시기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의 의미는 십자가 고통을 고스란히 당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야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궁극적 목적인 인류 구속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몸소 체험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구주요 중보자로서 성도들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또 위로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육체적 고통을 친히 다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극심한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영생의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십자가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늘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다시는 죄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성령의 능력에 힘입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정신적인 고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육체적인 것일 뿐 아니라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고난을 포함합니다.  본문 39절 이하를 살펴봅시다.

  39, 40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예수님은 지나가는 자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머리를 흔드는 것은 심한 조롱의 표현입니다(시 109:35).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온갖 욕설과 비방과 희롱으로 모독적인 말을 퍼부었습니다.

  ‘너 성전을 헐고 있는 자여, 그리고 삼일 안에 다시 세우는 자여!’ -- 그들은 예수님을 비하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떠들었지만, 오히려 그 말은 놀랍게도 실제적으로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육체를 성전으로 말하였으며(요 2:21), 그 성전 된 육체가 지금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이 말은 일찍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의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 속에 있는 공명심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좌초시키려는 마귀의 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이적을 행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신 것의 대가는 오직 모욕과 손가락질 뿐이었습니다.

  41, 42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한결같이 예수님께 희롱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던 예수에 대한 십자가의 처형이 이루어지자 마치 어린아이가 천박하게 장난을 치듯이 계속 조롱하였습니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던 존재인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예수가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마음껏 그를 비웃었습니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  여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내신 왕’이라는 의미가 보다 더 잘 살아나는 표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예수를 더욱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조소 섞인 표현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진정한 사실이었습니다.

  주님의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시편 22편에는 메시야가 당할 정신적 고난과 관련하여 예언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6-8).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모두 벗기고, 그 옷들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벌거벗긴 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주님의 좌우에는 흉악한 강도들이 달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 강도의 두목인 것처럼 처형 현장을 꾸민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3년 동안 그토록 많은 말씀과 사랑의 수고를 기울여 가르쳤건만, 마지막 순간에 스승의 곁에서 용감하게 당국자들과 맞서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지 갈릴리에서 따라온 소수의 여자들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비참한 운명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여인들이 눈물짓고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여인들 중 주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나무에 달린 채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고 있는 십자가 아래에서 창백한 얼굴에 거의 혼절 직전까지 이르런 주름잡힌 여인의 통곡하는 모습이 주님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놓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정신적인 통증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감내해야 한 수치심과 모욕감은 인류 구원의 대업을 향한 주님의 결단 없이는 결코 참아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능히 자기를 구원하고 조롱하는 군병들과 무리들을 제압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모욕과 조롱, 모든 정신적인 고난을 인내로써 참으시며 감내하셨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정신적 고난을 참으신 희생과 인내를 보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죄에서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정신적 고난을 이기지 못하셨더라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더 큰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께 아뢰십시오. 주님의 평안과 위로가 함께하실 것입니다.

3. 영적인 고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또 하나의 고난은 영적인 고난이었습니다.주님의 영적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은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상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에 이르기까지 거의 여섯 시간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 후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무슨 뜻입니까?  엘리야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1의 말씀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절규였습니다. 주님은 인류의 죄 짐을 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죄값을 치루셨고, 이 때 하나님 아버지의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45절에는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였다고 했습니다.
  온 땅에 임한 어두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님의 영적 고난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때 받으신 영적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완전한 하나를 이루며 영교해 오셨습니다. 아버지 안에 아들이, 그리고 아들 안에 아버지께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위에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되셨고, 이 무서운 영적 고통을 아들은 어둠 가운데서 오직 홀로 감내해야만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주님은 십자가에서 전인격적이며 총체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만 당하신 것이 아니라 정신도, 마음도, 그리고 영적으로도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흔히 십자가 고난이라 하면 손과 발이 못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린 육체적 고난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더 크고 심대했습니다.
  주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되어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죄인들의 손에 의해 죽어야 하는 정신적 고통과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영적 고통까지도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는 측량할 길이 없을 만큼 크고 넓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에 감격하여 평생 십자가만을 알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결단했고, 십자가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삶 위에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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