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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설교 :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1:8~16)

by 【고동엽】 202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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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41:8~16)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강한 것 같지만 내면은 참 약한 존재입니다. 달 표면에까지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보면 인간은 참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수 백만, 수억 개의 정보를 조그만 칩에 저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두뇌는 신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던 나이를 80세까지 끌어 올린 것만 봐도, 거의 하나님에 버금가는 능력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답게 대단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에겐 나약하고 작은 모습도 있습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 앞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서운 고독 앞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한 질병 앞에서 하얗게 질려 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 가엾을 정도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14절)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면 지렁이 같다고 표현했을까요? 새해 첫날, 동해 바다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자신의 소원을 비는 사람이, 울산 근방의 어느 해수욕장에만 해도 1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손을 비비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인간의 실존입니까? 그래서 인간이 지렁이로 빗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나약한 존재인 우리가 새해를 다시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한 해를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어떻게 살까?' 하고 우리 마음 속에는 약간의 불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 해를 걸어가야 합니다. 이 미지의 길에 한 걸음씩 발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한 해를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 수 있을까?' 이것이 고민인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 믿는 우리들은 각자 생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늘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이 특별히 생각합니까? 제 경우엔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대표적으로 생각납니다. 그 말씀만 묵상하면 마음에 있는 불안이 사라지고, 제 자신을 초라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게 되며, 커다란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참 엄청난 말씀입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우레소리와 같이 제 영혼을 흔듭니다. 연초만 되면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어떤 새로운 힘을 제게 북돋아줍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 말씀을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마 유대 백성을 향해 하시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는지 모릅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유대 백성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앞으로 100년쯤 지나면 유대나라 사람들이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 값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가 70여 년간 포로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앞으로 100년 후에 일어날 일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그 사실을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우상숭배로 타락하게 될 것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타락한 죄 값으로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하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70년 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면 고레스라는 위대한 왕을 일으켜서 그 왕으로 하여금 철통같은 바벨론을 정복하고 페르시아를 건설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보여 주시면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셔서 도와 주실 것이므로 그 일은 반드시 성사 된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예언이 아닙니까? 150여 년 전에 이런 예언을 한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44장 28절을 보면 놀라운 이름이 나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이 때는 고레스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미 150여 년 전에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5장 1절에도 그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이 고레스 왕이 메데 바사를 일으킨 왕입니다. 즉 페르시아의 창업자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먼 훗날을 내다보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정복했고 새로운 국가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동안 포로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이 동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고국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을 다시 건축하고 성을 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구약성경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를 보면 그 사건이 그대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8년에 이스라엘 백성 중 제 1진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황홀한 꿈을 꾸는 듯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을 내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을 통해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고 도와주실 것을 약속한 것이 41장 10절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지 한 번쯤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8~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유대나라 사람들을 일컬어서 '나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 '나의 택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는 우리를 일컬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또 우리를 만세 전부터 택했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구약에 있는 유대나라 사람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나 오늘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하신 말씀임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바벨론에 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 세상을 일컬어 바벨론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망할 바벨론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은 실제 바벨론이라고 하는 국가에서 포로생활을 했지만, 오늘 우리는 없어질 영적인 바벨론에 몸을 담고 고생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나라 백성을 향해 내가 너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을 했는데, 신약 시대에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똑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러므로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나를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도 전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받아 들이길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알고 이해는 해도, 이 말씀의 능력을 얼마나 체험하고 사느냐 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누가 나를 꺾을 수 있습니까? 누가 나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실제로 신앙생활하다 보면 '그 말씀이 나에게 실제로 나타나느냐? 능력으로 체험 되느냐? 나에게 분명히 현실로 다가오느냐?'라는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왜 이 엄청난 말씀이 나에게 큰 능력으로, 기적으로 다가오지 못할까요? 바로 이 점을 생각하면서 몇 가지를 검토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께는 거짓이 없습니다. 사람처럼 말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진실을 변호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갑자기 진실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설교자의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설교자로서 하나님이 진실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더욱 진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또 제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실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리 문제가 안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이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9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거짓말을 하시거나 마음을 이리저리 바꾸시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 말씀입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여기에서 미쁘시다는 말은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말씀대로 반드시 행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고향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가라는 곳으로 가면 내가 너의 후손에게 복을 주겠다. 그리고 너의 후손으로 온 세계 백성들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해주겠다." 그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많은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의 나이 이미 75세였습니다. 그리고도 25이 ᄌ나도록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안주셨습니다. 100세가 될 때까지 혈육 한 점 주시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겠습니다? 벌써 아브라함이 100세요, 사라가 90세입니다. 자녀를 생산할 능력을 거의 잃어버린 부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은 진실한 하나님이 아닌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 몸이 죽은 것 같은 부부에게서 이삭이라는 옥동자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합니다.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앞서 말했듯이 본문의 말씀은 150여 년 후에 일어날 역사적인 사건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전 538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으로 돌아왔고, 계속해서 2진, 3진, 4진이 돌아왔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실행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노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 가운데 모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고, 성곽을 세웠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려 그 약속의 말씀이 실제로 역사하지 못한 것을 자주 봅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분명히 확인하고 거기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들째로 '왜 이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으로 다가오지 않은가?' 하는 부분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이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다섯 번이나 '내가'를 반복하면서 강조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내가)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따라서 하나님 편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대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편에 있습니다. 과연 그 말씀을 얼마나 믿느냐가 문제입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믿음은 약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믿어야 되는데, 어른처럼 믿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곤 합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나는 나대로 놀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믿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난 사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가룟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의심없이 믿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올라 탔습니다. 배 안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지만 그 배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배임에는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유유하게 저어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간다는 뿌듯한 마음 가운데 신나게 노를 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배에 풍랑이 일기 시작하더니 거센 파도가 배를 흔들어 댔습니다. 마구 물이 들어왔고 아무리 퍼내도 들어오는 물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던 제자들의 믿음은 전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하신 첫 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결국은 믿음에서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끝까지 믿었더라면 아마 굉장한 사건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 앞에 망신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문제의 핵심을 짚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나님을 모시고 가면서 왜 그렇게 떨고 난리법석이냐?"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이 계시는 그 배 안에서 엄청난 역사를 체험했을 텐데, 믿음이 적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하심을 체험하지 못하는 불행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강한 것 같아도 흔들리기 쉽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큰 소리로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소리치면 누가 제일 믿음이 큰 사람 같습니까? 당연히 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제 믿음도 형편없습니다. 좋을 때는 좋은데, 상황이 바뀌면 저도 모르게 막 흔들리고 맙니다. 어떤 때는 믿음이 맥을 못 출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교만해선 안됩니다. 내 힘으로 믿은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이 1959년대 한창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입니다. 가는 곳마다 집회를 하고, 가는 곳마다 전도를 해서 수많은 사람이 돌아오게 되자 매스컴을 타고 그 젊은 청년 목사가 미국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때 템플턴(C. Templeton)이라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도 가슴에 불을 안고 전도하는 전도자입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유럽으로 순회하며 전도할 때도 같이 가서 교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템플턴이 빌리 그래함보다 더 유능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전도하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아 1200석 교회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쯤 템플턴이 믿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한 장의 사진 때문에 그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 사진은 북아프리카의 여인이 굶어 죽은 아기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하늘을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사진이었습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진을 얻었나 봅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엄청난 가뭄으로 사람들이 고통 당하며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고, 많은 짐승들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템플턴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비인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여인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비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시다면, 어떻게 죽어가는 이 아이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다음부터 그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예수님도 포기해 버렸습니다. 전도자의 삶도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로 갔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는데, 이 사람은 한 순간에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불가지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믿어?' 하고는 다른 길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80세로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는데 아직도 안 믿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듯 잘못하면 쉽게 던져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믿지 못하고 흔들린다면 그것만큼 답답하고 불행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내가 얼마만큼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얼마만큼 믿습니까? 어린아이처럼 믿으면 하나님의 힘이 내게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능력이 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처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의심으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기적을 일으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그 함께 하심의 연습을 얼마나 자주 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동행의 연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친한 친구와 걷든지 연인끼리 걷든지 간에 우리가 함께 동행하다 보면 서로 주고 받는 아름다운 교제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서로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눌 때 그 교제가 풍성해집니다. 그럴 때 동행하는 자로서의 파트너쉽이 잘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한쪽은 말하는데 다른 한쪽은 대답이 없어서 대화가 안 된다면 그 동행은 결국 깨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란 어떤 면에서 막연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고 약속하셔도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했으므로 그것은 믿어도 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은 공기를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이 가운데 충만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아도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곧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일을 할 때, 또는 가만히 혼자 앉아 있을 때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이것이 동행하는 연습이 됩니다. 자주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습과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제대로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과연 하루 24시간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습을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10분입니까? 20분입니까? 30분입니까? 24시간 전체를 놓고 볼 때 너무 미미한 시간동안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성경 한 장 보았다고 해서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가득해서 그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과 찬양과 기도가 나오는 동행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미달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안톤 루빈스타인(Anton G. Rubinstein)이 말했던 유명한 말입니다. "연습을 하루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안 하면 비평가가 알고, 사흘을 안 하면 청중이 안다." 그에게 무슨 연습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연습이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본인이 아는 것입니다. 또 게을러서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벌써 비평가들이 냄새를 맡는 것입니다. 사흘을 연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교를 다해 연주를 해도 청중들이 벌써 '연습이 부족하구나!' 하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연습이란 것이 이렇듯 중요합니다. 영적인 경건의 연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 곁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해도 우리가 동행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안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 부부가 결혼 25주년을 맞아 밖에 나가서 같이 식사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눈 대화입니다. 남편이 운전대에 앉아 운전을 합니다. 어느 정도 부유한 미국인들은 차가 꽤 큽니다. 그래서 이 아내가 남편과 약간 떨어져 창가에 붙어 앉아 밖을 구경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가 차 안에서 아주 가까이 붙어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하던 때가 언제죠?"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이 자리에 있었어. 바로 이 운전대 말이야. 나는 이 운전대에 앉아서 항상 내 자리를 지켰지. 이 자리를 떠나 본 일이 없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문제는 아내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분이 좋거나 마음이 즐거우면 운전도 제대로 못하게 팔을 붙잡고 다정하게 대하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남편과 떨어져 창가에 붙어 밖에만 쳐다보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즉 아내가 그렇게 변덕스러운 행동을 한 것입니다. 남편은 운전석을 지키고 있으므로 아내가 제대로만 했으면 차를 탈 때마다 항상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우리가 언제 다정하게 이야기한 일이 있느냐?"고 핀잔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그런데 그 놀라운 말씀이 나에게 능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변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싶으면 조금 기도하다가 싫증나면 며칠씩 넘어가 버립니다. 어떤 때는 성경 말씀 본다고 TV까지 끄다가도 조금 지나면 1주일동안 성경 한번 뒤져보지도 않고 넘어가 버립니다. 따라서 변덕은 내가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하나님께서 내게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 경건의 훈련, 동행하는 연습은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꾸준히 지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계심을 느낍니다. 등 뒤에서 밀어주는 하나님의 힘은 더 강하고 견고해집니다. 그리고 앞에서 당기는 힘도 더 강력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이 사실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10절) 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 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큰 약속을 손에 들고 있는데, 이 약속이 나를 강하게 하며 나를 능하게 하며 나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로 만들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돌아보면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짚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잘 모릅니까?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믿지 못합니까?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습을 게을리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성령께서 그 잘못된 부분이나 잘 안 되는 부분을 고쳐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한 해의 출발을 제대로 한다면, 한해 동안 실패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따를 것입니다. 우리 이상의 삶을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능력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한 해를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주신 말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이 말씀을 내 마음의 옥토에 뿌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길 원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여, 우리가 이 약속을 그대로 믿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경건의 연습을 함으로써 우리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능력 이상으로 뛸 수 있도록,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머리 숙인 귀한 자녀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축복하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옥한흠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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