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① (시편 5:1-3)
기도에 대한 말씀을 설교로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구절을 몇 곳 읽어 드리겠습니다.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마음을 열고 기도하라
우리가 평소에 많이 듣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들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지킬 만한 것 중의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전부 우리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말이나 기도하는 자세나 기도하는 입술이나 기도하는 내용보다도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먼저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입으로 표현되는 말을 듣고 저 사람은 저런 기도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이 마음의 가면을 벗어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한 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죄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죄, 죄인, 회개하라 이런 메시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순복음운동이 우리 한국에 불붙기 시작하면서 순복음 메시지에는 이런 죄책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여러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 방송으로 들었는데 그중 유명하신 목사님들의 설교가 모두 소망, 축복, 행복을 강조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당연하고 좋은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죄책하는 메시지 앞에 마음을 닫으면 안됩니다. 교회가 왜 자꾸 죄를 운운하고 죄인을 운운하느냐고 하는데 그러면 무슨 말로 바꾸면 좋겠습니까? '죄'라 하지 말고 '허물' '실수'라는 말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독약이 들어있는 병에다 독약이라 안 쓰고 소화제나 진통제로 써 붙이면 되겠습니까? 독약이 들어 있는 병은 독약이라고 써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동으로는 죄인이 아닙니다. 입으로도 죄인이 아닙니다. 형식상으로 죄인이 아닙니다. 중심을 볼 때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될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걸 안고 죄인 아닌 것처럼 기도하는 것은 가면이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가면을 벗고 기도해야 되는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몸부림을 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왜 기도를 하면 한 두 마디하고 나면 할 말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내면의 문제가 기도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이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기도의 자리로 돌아와야 된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가정은 화목해야 되고 직장이나 일은 잘 되어야 하며 우리는 친절해야 되고 겸손해야 되고 의롭게 살아야 된다는 등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해야 된다, 의롭게 살아야 된다,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기도해야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행복해지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요즘 세상은 훈련이나 교육을 시키면 될 줄 아는 철학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훈련을 아무리 받고 교육을 아무리 받아도 안되는 게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힘으로 개선이 되고 사람의 힘으로 뭔가 문제가 풀려 나가는 줄 알고 그 길로 자꾸 강조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원함은 있지만 원하는 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 말씀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힘으로 능으로는 기도영역이 아닙니다. 기도를 안해도 됩니다.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는 이 문제는 기도의 영역입니다. 이게 바로 선지자들에게 주신 여호와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야 되는 그 영역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영역이 없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리며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2:7-8).
이것이 메시야의 예언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야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 그러면 내가 철장으로 깨뜨리겠다. 십자가를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겠다는 약속입니다. '질그릇 같이 저들을 부수리라.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라'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 땅 끝까지 이르러서 열방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을 메시야에게 약속했는데 그 일을 위해서 '내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구해야만 우리 힘으로 이루지 못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셔야 할 그 일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기도로 나라를 구했습니다. 앗수르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러 왔을 때 포위가 됐습니다. 유다는 앗수르를 대항할 능력이 없습니다. 군사력이 절대 모자랍니다. 그 당대 가장 강한 대국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러 왔을 때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요청을 하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 나갔고 온 방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앗수르 군대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해 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히스기야가 자기 개인에게 죽을병이 들어 있을 때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개인의 문제도 기도로 해결을 했습니다. 병이 나았고 15년의 생명 연장이 주어졌습니다. 이런 두 가지 문제에 히스기야의 기도가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위기와 기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위기의식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안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똑똑하고 장래가 아주 촉망되는 서른 살에 세상의 부귀영광을 다 얻은 탄탄한 미래가 있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주변에서 전도를 많이 하는데도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에게 청천벽력 같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가장 까다롭다고 하는 췌장암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암 치료를 받는 그 가운데서도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두꺼운가, 그 위기의 순간에도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그 사람을 보면서 죄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부인도 남편이 예수를 믿게 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가 한없이 교만하고 자존심이 있으니까 예수를 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때 목사님이 그 부인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마지막 순간에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을 믿게 하는 역사는 사람이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붙잡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일에 기도하라
우리 나라가 월드컵 행사를 합니다. 이 월드컵 행사를 우리가 한달 동안 열광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제 2월 달부터 열광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시안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대통령 선거를 하지만 4월 달부터 대통령 후보선출이 있습니다. 1년 내내 선거축제입니다. 그러니까 2002년도는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1년 내내 축제입니다. 선거도 축제이고 각종 스포츠 대회도 축제입니다.
그러나 이 축제 내면에 큰 위기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선거 때문에 받을 상처, 중상모략, 분열 등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거가 단순히 당선된 사람에게는 축제일지는 몰라도 수많은 상처를 남기는 것이 선거입니다. 월드컵 행사에 외국 사람들이 많이 올 것입니다. 달러를 벌어 국위선양이 되고 다 좋겠지만 작년 한해 우리 나라의 에이즈 환자가 공식적으로 삼백 서른 몇 명이 발표되었습니다. 통계수집이 안된 환자도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에이즈는 외국인 근로자, 여행객 이런 사람들이 들어와서 에이즈를 퍼뜨리고 가는 것입니다. 월드컵이 관광수익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얼마나 많은 온갖 위기의 씨를 뿌리고 갈는지 모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이 축제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는 내면적인 의미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고 기도해야 될 많은 문제는 보이는 세상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안 보이는 문제 때문에 많은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실천으로 따라하는 것이지 구호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는 기도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겠지만 십 년 전에 제가 교회건축 비전을 발표했습니다. 천 석의 예배당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기도를 하고 이 목표를 가지고 성전건축을 해 보자고 제가 이미 십 년 전에 비전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천 석의 예배당을 지을 수 있는 조건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했지 그냥 막연하게 성전건축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천 석 예배당을 지으려면 부지를 하나님이 주셔야 하기 때문에 부지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자꾸 구체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게 하옵소서"라는 이 표어만 기도하면 기도의 깊이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를 해야 기도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호성 기도는 한 두 마디 하면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기도생활을 답습하면 안됩니다. 기도의 깊이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상을 제거하고 기도하라
히스기야 왕이 이런 일을 했습니다. "여러 산당을 제하여 주상을 깨뜨리며"(왕하 18;4).
주상은 바알 신상입니다. 주상이라는 말은 바알의 거대한 대리석 신상을 말합니다. 아세라는 여 신상으로 목상입니다. 바알은 대리석으로 신상을 만들었고 아세라는 목상으로 만들었는데 이걸 전부 다 깨뜨리고 불살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 왕이 바알신상과 아세라 목상을 깨뜨리는 것이 왕이니까 쉬운 줄로 아시면 안 됩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왕의 아비 되는 사람이 바알 숭배자입니다. 조상 대대로 바알을 숭배하는 사람도 섞여있는 것입니다. 자기 밑에 섬기는 자들도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신상을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무엇을 암시합니까? 우리 안에 깨뜨릴 것을 깨뜨리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깨뜨릴 것을 그대로 두고 부르짖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오는 기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기도가 얼마나 실천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대기, 열왕기를 보니까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백 회 이상이 나옵니다.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는 말은 많은 왕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조상들이 섬겼던 산당을 깨뜨리지 못했는데 히스기야는 그것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왕이요 믿음의 왕입니다. 아무나 못하는 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상을 깨뜨리고 목상을 깨뜨렸던 히스기야의 이 실천적 행동이 히스기야의 기도와 함께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뜨릴 것을 하나씩 깨뜨리는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영적 환경이 정비되어 가야 합니다. 기도생활은 하는데 신앙생활은 자꾸 복잡해지면 안됩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깊어지는 기도가 됩니다.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우리가 표어에 "부흥"이라는 말을 내 걸었습니다. 부흥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성경에도 부흥이라는 말의 의미가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5;21).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부흥을 일으켜 주옵소서 라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을 재건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건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가 느헤미야 1장부터 나오는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전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히 할 일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될 일인데 느헤미야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이 건축되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안에 보면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을 입게 하옵소서"(느 1;11) 이런 기도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의 민심을 돌이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그 당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데 실권을 쥐고 있는 바벨론 왕이 아닥사스다왕 입니다. 이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성의 건축을 허가해 주지 않으면 성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 아닥사스다왕의 마음을 움직여야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의 엄격한 규례를 따릅니다.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 앞에 못 나아갑니다. 우리가 에스더 이야기를 보아도 왕이 부르기 전에는 임의로 왕 앞에 못 갑니다. 가면 죽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왕 앞에 지금 가서 예루살렘 성곽 건축을 하는 허가를 받아 내야겠는데 길이 없습니다. 왕 앞에 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왕 앞에 나아갑니다. 이 대목이 참 중요합니다. 정면승부를 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를 하고는 이제 아닥사스다왕 앞에 정면승부를 하러 나아갑니다. 그 때 왕이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느2;2) 왕이 물었습니다. 자네가 건강한 사람인데 왜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고 물을 때 느헤미야가 머뭇머뭇하니까 아닥사스다왕이 이렇게 답을 합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느2;4)
여러분, 왕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로비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말을 하도록 느헤미야가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수 있는 왕의 허락을 받아 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우리가 본받을 것은 느헤미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방법을 붙잡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곽이 건설될 수 있는 길을 느헤미야가 기도 중에 깨달았고 그 깨달은 진리와 방법을 붙잡고 그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기도 중에 깨닫게 하시고 깨달은 것을 붙잡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교감과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내가 기도를 하고 나서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인가 깨닫게 해 주시는 그 음성을 내면적으로 들어야 됩니다. 기도를 하고 생각 중에 기도를 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방법을 가르쳐 줄 때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아야 됩니다. 귀로 들려주는 청각의 음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의 느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것을 깨닫는 영이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유우머가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장가도 못 가고 홀로 늙은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이 할아버지와 자주 어울리는데 할아버지께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니까 "얘들아, 어느 곳에 한 남자가 있었단다. 그런데 그 동네에 예쁜 여자가 있었는데 무척 좋아했어. 그래서 남자는 결혼이 하고 싶어서 그 여자에게 청혼을 했단다. 그런데 그 여자는 결혼 조건으로 말 두 마리는 말고 소 다섯 마리만 가지고 오십시오" 그랬단다. 할아버지는 "그걸 모르고 혼자 50년을 살다가 이렇게 늙었단다" 하고 자기 신세 한탄을 한 것입니다. 그 때 한 아이가 "할아버지 말 두 마리는 말고 소 다섯 마리라고 하면 '두 말 말고 오소'란 뜻으로 두 말 말고 결혼하자는 뜻 아니예요?"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하염없이 울었답니다. 상대방의 말뜻을 모르고 50년을 홀로 살았답니다. 혹시 우리 신앙생활에 이런 착오가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벌써 우리 삶 속에 답을 주셨는데 깨닫지 못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방황하는 영적인 어리석음이 없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믿음이고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우리 입으로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정 반대로 가르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는 죽은 믿음이니라"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느니라"
여러분, 이 두 가지 시각을 두고 보면 믿음은 입술의 고백인가 아니면 행함인가 혼동스럽습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정 반대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종합해서 하나님의 관계에서 보면 하나도 모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의 관계와 연결이 될 때 다 유효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고백이나 하나님과 관계없는 행함은 믿음으로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할 때 입술의 고백만으로 다 평가해 버리면 안됩니다. 믿는 대로 행함이 따라야 하고 또 도덕적인 행함만을 가지고도 안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두 남녀가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 있고 사랑한다고 서로 표현하고 결혼식을 해서 사는 그것이 부부의 사랑입니다. 마음의 고백이 있고 입으로 고백이 있고 행동으로 결혼하는 이것이 합쳐져서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서 기도가 바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성경에서 우리를 '그릇'으로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고 사도행전 9장 15절에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그들을 위한 택한 나의 그릇이라"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그릇으로 보십니다. 우리가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릇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담는 것입니다. 밥그릇이 밥을 못 담는다면 그것은 밥그릇의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이 질그릇이 김치를 못 담는다면, 장을 못 담는다면 질그릇으로서 가치를 잃는 것입니다. 그릇의 최고 가치가 무엇입니까?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년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무엇을 담으려 하시든지 내 그릇에 담겨지고자 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바로 기도의 수용성입니다. 그 하나님이 담아서 쓰시는 그릇으로 내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릇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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