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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교회

날마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 (골1:28-29)

by 【고동엽】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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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마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   (골1:28-29)  

2007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아침 해가 힘있게 솟아오르듯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와 산업 위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07년도 성지교회의 표어는 “날마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같이 한번 고백해 볼까요?
“날마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
주제성구는 오늘 본문 말씀인 골로새서 1장 28-29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한 해 동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왜 배워야 하는가?
배우지 못하면 답답합니다.
때로는 무시를 당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제 장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분 가운데 아주 어렵게 사는 분이 계시답니다.
부모를 잘못만나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이분은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을 갔답니다.
자녀를 6명이 두었습니다.
그분의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아직도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답니다.
법적으로 미혼상태입니다.
자식들은 모두 전처의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 부모역시 배우지 못해서 자식이 죽은 것으로 처리해서 호적이 없답니다.
그래서 주민등록증도 없이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의료보험증도 없어서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 역시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어머니를 모실만한 사람이 없답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만 도와주었어도 정부의 보조금이라도 받을텐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한 일입니까?
그래서 이 분을 도울 방법이 없냐고 물으셔서 법무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알려드렸습니다.

배우지 못하면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가끔 TV나  신문에 연세가 70이 넘으신 분이 초등학교에 가서 손자와 함께 공부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배우지 못한 한이 서려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요즘은 지식과 정보가 폭발하는 시대입니다.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배우지 못하면 자식들한테도 무시당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핸드폰이 가장 중요한 물건입니다.
핸드폰 안에 그들의 모든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게임을 하고, 영화를 봅니다.
친구가 옆으로 지나가도 말로 하지 않고 문자를 날립니다.
핸드폰을 전화 걸고 받는 수준으로만 사용하신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문맹입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아직도 문자를 날리지 못하는 분 있으면 빨리 배우시기 바랍니다.
엄마가 딸한테 문자 보내는 것을 배웠습니다.
진땀을 흘리며 사랑하는 남편에게 문자를 날렸습니다.
“여보 사망해”
이 문자를 받은 남편은 너무 황당했습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나를 미워했으면 이런 문자를 다 보냈나?
알고보니 ‘사랑해’에서 ‘랑’에 ㄹ을 ㅁ으로 잘못쳐서 실수를 한 것이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중요한 공지사항을 종종 문자로 보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왜 나한테만 연락 안해 주냐고 화내는 분이 있습니다.
필요한 부분들은 빨리 배우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믿으면 되지... 아닙니다.
바로 알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바르게 믿어야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배우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녀도 믿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고 권면합니다.

배우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배우다”라는 말은 몸에 습관이 될 정도로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배우는 내용이 삶에 적용이 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속담 가운데 ‘배워야 면장’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도 아직 젖병만 빠는 신자가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히브리서 5장 13절에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즉 말씀을 배우지 못하고 교회만 다니면 젖을 빠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게로 와서 배우라”(마11:2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배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28절)
골로새서를 통해서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알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은 불충분합니다.
예수님을 내 삶 가운데서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내가 지적으로 알고 있는 예수님을 내 삶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 만이 내 삶의 전부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안식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배움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짧은 2절 가운데 ‘각 사람’이란 단어가 3번이나 반복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배움의 대상이란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배우는데 점점 게을러 집니다.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일수록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직분을 가질수록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 다닐수록, 직분을 가질수록 더 많이 배워야 합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면 교만입니다.
끊임없이 겸손함으로 배워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와 문화에 맞게 부지런히 배우고 변해야 합니다.
옛날의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하면 안됩니다.

오늘 이 나라의 정치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386세대의 정치인들이 군사독재시절의 386 시각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배워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수에게서도 배우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은 날마다 배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배우고, 섬김과 나눔도 배워야 합니다.
전도도 배우고, 선교도 배워야 합니다.
잘하고 있는 교회도 가서 보고, 좋은 것은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부단한 독서를 통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식으로 잘해보자.’
이것은 잘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 식이 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새롭게 도전해야 합니다.
물론 과거의 경험과 연륜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돼서는 안됩니다.
이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맞게 변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해서 안 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학교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사들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배워야 합니다.
학생들의 문화를 배우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눈 높이를 맞추지 않으면 아이들이 교회 자체를 거부합니다.

배우는 자만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다양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물론 프로그램을 거쳤다고 해서 온전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배워야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지교회에 등록하시면 새가족 양육반에서 6주간 교육을 받습니다.
성지교회가 지향하는 비전은 무엇인지?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는 5가지를 배웁니다.
새가족반을 마치시면 일대일 제자양육 훈련이나 알파코스에 들어가셔서 기초 양육을 받으시면 좋습니다.
일대일 제자양육은 이미 훈련을 받은 양육자와 함께 16주 동안 일대일로 양육을 받는 과정입니다.
이미 7기까지 수료하신 분이 104명입니다.
앞으로 모집하는 8기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아니면 12주동안 진행되는 알파코스에 참여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원래는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이지만 새가족들이 참여하시면 너무 좋습니다.
이미 5기가 진행되어서 151명이 수료를 했습니다.
앞으로 6기가 1월 25일 목요일부터 시작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올해부터 일대일과 알파코스를 마친 분 중심으로 36주간의 제자훈련을 실시합니다.
12명씩을 뽑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된 제자를 삼기위해서 함께 말씀을 배우며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는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2-13절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예수님을 닮은 온전한(complete) 그리스도의 제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바로 믿음과 행함이 일치되는 온전한 자를 의미합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사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 모든 성지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받은 자만이 강한 영적 군사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군대 갔다 온 남자 분들은 훈련의 중요성을 잘 압니다.
학교생활이나 직장에 다니다 온 신병교육대의 모습은 오합지졸입니다.
그러나 군복을 입히고 제식훈련부터 총검술, 유격훈련까지 받고나면 사람이 바뀝니다.
말이 바뀌고, 행동에 절도가 있습니다.
아들 면회가서 당황한 분들 계실 겁니다.
고참이 면회시 따라 나옵니다.
부모가 ‘힘들지’ 라고 물으면 어떻게 말합니까?
‘네 괜찮습니다’ 벌떡 일어납니다.
평소 같으면 푸념을 할 아들이지만 4주 훈련만 받아도 말이 달라집니다.
걷는 것도 팔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고, 시선은 전방을 향하고 절도있게 갑니다.
총소리만 들어도 벌벌떨던 아들이 사격을 합니다.
가장 무서운 막타워에서 뛰어내립니다.
왜 이런 훈련을 시킵니까?
훈련을 통해 강한 군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체력단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을 제압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끊임없는 영적 싸움입니다.
혈과 육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는 악한 영들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떠나서 내 생각대로 옛 사람의 모습으로 살도록 부추깁니다.
마귀의 집요한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대해서 잘 말씀해 주십니다.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라고 하십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가슴에는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하십니다.
제사장들이 가슴에 ‘여호와께 성결’ 이라는 표를 붙였던 것처럼 예수의 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허리에는 진리의 띠를 띠라고 하십니다.
허리는 몸을 바쳐주는 중심입니다.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에 나를 바쳐주어야 합니다.
한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거이니 우리 믿음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손에는 성령의 검 말씀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검은 대적을 무찌르는 중요한 무기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품고 있을 때 악한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할 때 성령의 검,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발에는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신을 신으라고 하십니다.
날마다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했습니다.(행5:42)
올 한해동안 모든 성지가족들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아직 부족하다고 여기시면 부지런히 배우시기 바랍니다.
내가 리더의 위치에 서 있다고 여겨지시면 가르치는 일에 앞장서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배우면서 성장하고, 또한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모르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강한 믿음의 군사로 승리하기 위해서 열심히 배우십시오.
배우는 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강하게 훈련 받은 자만이 전쟁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희가 공수훈련을 받을 때 유격 조교들이 한 말이 지금도 기억됩니다.
“지금 제군들이 흘리는 땀 한 방울은 여러분의 피요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수고하면 땀흘리는 모든 과정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지는 축복의 길입니다.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가르치고 양육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내 생각이나 결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라는 표현을 영어는 “labor, striving”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Labor”라는 단어의 헬라어 표현은 “kopiaw - 코피아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뜻은 정말 소리 그대로 ‘코피 나도록 힘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같이 위대한 분도 자신의 노력으로 힘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누구입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자신은 온힘을 다하여 수고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열심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로 그렇게 하도록 이끄셨고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 고백이 진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처칠은 위기에 처한 영국 국민들에게 “땀과 눈물과 피”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수고의 땀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순교의 각오도 필요합니다.

저희 교역자와 직원들은 1월 2일 시무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갔습니다.
새해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몸바쳐 순교한 그분들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도전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2-30대의 젊은 나이에 그 머나먼 길을 와서 죽게 만들었을까요?
남편이 죽자 아내가 그 뒤를 이어 계속 선교사업을 했습니다.
자식 3명이 모두 풍토병으로 죽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조선 땅에 묻히기를 소망했습니다.(헐버트)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조선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켄드릭)
이것이 그냥 교회 다녀서 된 일이겠습니까?
당시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앞길이 전도양양한 젊은이들이 이 땅에 와서 피의 순교자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위해 살고 예수위해 죽고자 하는 강한 영적 군사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 동안 우리는 “날마다 배우고 가르치는 교회”로 표어를 정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족하다고 여겨지시면 부지런히 배우십시오.
내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시면 열심히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양육함으로 섬기십시오.
주님은 마지막 대 위임명령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로, 복의 근원이 되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양인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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