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진보의 씨앗입니다 (빌립보서 1장 12-14절)
빌립보서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무려 19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래서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쁨의 서신이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기쁨은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진행되어 생기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엄청난 시련 속에서 피어오르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믿는 사람의 고난은 반드시 유익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천국의 영광을 얻음으로 대미를 장식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됩니까?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라고 시작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가 복음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사도 바울은 “이제 내 인생이 끝났다. 내게는 미래가 없다. 소망도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무서운 사람입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누가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는 고난조차도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까?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런 말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매인 자가 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사도 바울에게 그에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서 오히려 그를 지키는 시위대와 기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감옥 속에서도 바울을 사용하셨습니다. 감옥의 쇠사슬이 그의 육신을 맬 수는 있었지만 그의 복음을 향한 열정은 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귀한 열매가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열매입니까?
빌립보서 4장 22절을 한번 보십시오. 이 구절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구절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그저 지나가기 쉬운 구절이지만 놀라운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가이사란 영어로 ‘시저’라고 하는데 로마 황제를 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 문안을 한다는 말은 로마 황제의 가족 중에 몇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은 결코 우연이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 로마 제국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복음화의 초석으로 삼기 위해 사도 바울을 로마 감옥에 갇히게 하신 것입니다.
< 절망적 환경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은 선교사역을 하면서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세계 선교를 이루려면 당시 세계의 서울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를 복음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를 당하고 로마 황제에게 최종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어 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기도하면서 위대한 부흥사가 되어서 세계의 서울인 로마로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 속에 들어가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체포된 초라한 모습으로 로마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화려한 모습이 아닌 체포된 모습으로 로마에 가게 하셨을까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여비 문제도 고려하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자가 아닙니다. 그는 천막을 차서 팔면서 선교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세월에 로마에 갈 수 있는 뱃삯과 여비를 마련하겠습니까? 그런데 체포되어 가니까 여비도 없이 로마에 갈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안전 문제도 고려하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로마로 가는 머나먼 여정을 혼자서 가게 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수로 잡혀 가니까 호위병까지 붙어서 안전하게 로마로 갈 수 있었습니다.
셋째, 무엇보다 복음 전파 문제를 고려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로마 황제의 집에 믿는 사람들이 몇 명 생기게 되었습니까? 그 원인을 추적하면 그것도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일반인 신분으로 로마로 왔다면 황제 주변으로 접근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수의 신분으로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오는데, 후송 도중에 하나님의 섭리로 한 가지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유라굴로 광풍 사건입니다. 그때 유라굴로 광풍으로 다 죽게 되었을 때 바울을 호송했던 백부장은 바울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보았던 백부장이 로마에 도착해서 어떤 얘기를 했겠습니까? 황제의 시위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 보통 사람이 아냐? 신비한 능력을 가졌어!” 그러면서 지나온 일을 다 말해주었을 때 아마 바울에 대한 경외감이 시위대를 중심으로 쫙 퍼졌을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 일을 인해 그 뒤로 수많은 고위관료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을 찾아 강론을 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3-14절 말씀대로 로마 황제의 호위를 맡던 시위대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게 되고, 그런 역사를 목격한 사람들이 더욱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황제의 집 식구들까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개선장군으로 로마로 들어오지 않고 죄수로 들어왔지만 그 일로 인해 오히려 일반 사람들보다 황제 중심을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것이 복음의 확산에 견고한 버팀목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하나님은 때로 우리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일을 멋있게 이루십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고통, 불행, 돌발적인 사고, 절망적인 환경에도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젊은 나이에 큰 교회를 이루고 큰 교회 목사님의 아들로서 교회를 물려받는 목사님들을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그런 축복을 허락하지 않으실까?” 의식에서는 그런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만 무의식에서는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욕심입니다. 만약 그런 점에만 마음을 두면 속상해서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자세히 보면 일찍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축복만은 아닙니다. 지금 연약하기에 더 땀을 흘리고, 더 한 사람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부족해도 실망하지 않는 믿음의 훈련이 소중한 믿음의 훈련인지 모릅니다. 천국의 상급은 교회 크기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교회가 커서 마음이 교만해지고 한 사람 소중한 줄 모르게 되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물질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 많은 것이 반드시 축복만은 아닙니다. 물질을 잘 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물질이 아주 풍족하게 많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딴 생각을 품게 됩니다. 또한 돈을 필요로 하는 이성이 돈 많은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유혹이 몇 배는 많아집니다.
가끔 보면 결혼 전에 돈 많은 것을 보고 배우자를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마음고생을 할 각오를 하고 마음훈련을 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은 사람은 자기 외에 마음을 줄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질을 잘 쓰는 훈련을 철저히 잘 받은 사람은 예외이지만 그런 미혼 젊은이를 찾기가 쉽겠습니까? 물질이 많으면 아무래도 타락의 가능성도 훨씬 커지고, 가정이 불륜과 자존심 문제로 깨어질 확률도 커집니다.
돈이 많은데 가정이 왜 깨집니까? 돈이 유혹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돈이 없었을 때가 행복했던 가정들이 많습니다. 풍족한 것이 반드시 축복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고난의 훈련이 그 사람에게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 훈련을 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 복음 전파의 비전이 뚜렷해야 합니다 >
특별히 어떤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그 고난을 영광으로 승화시키려면 꿈과 비전이 뚜렷해야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가 온통 복음 전파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려움을 당해 그것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면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환경과 사건을 평가하는 기준은 복음전파였습니다. 그것이 고난이든 평안이든 복음전파에 유익이 되면 성공이요, 복음전파에 해를 가져오면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좋은 환경과 출세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고 그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우리는 꿈과 비전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람은 비전이 고상한 만큼 고상하게 됩니다. 비전이 고상한 사람은 그만큼 인격이 고상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되 특별히 복음 전파에 분명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복음전파가 없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고, 아무리 힘든 인생을 살아도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는 인생으로 살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미국의 스탠리 탬이라는 플라스틱회사의 회장이 있습니다. 그는 20살에 사업에 뛰어 들었고 다섯 번의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5번째 실패를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트럭에 짐을 싣고 시골로 내려가던 중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는 왜 일을 혼자 추진하고 내게는 구하지 않느냐?”
그 음성을 듣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다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사업을 시작할 때는 하나님을 회장으로 모시고 사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게 구하라! 그러면 열방을 기업으로 주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서약을 맺고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업에 더욱 큰 축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업을 소유하시다”라는 책을 통해서 자기가 체험한 축복된 삶의 지침을 5가지로 정해 실천했습니다. 1) 어떤 역경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자. 2) 형제에게 해로운 말을 하려거든 차라리 번갯불에 손을 대자. 3)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자. 4) 사랑으로 경영하고 분노로 사람을 다스리지 말자. 5) 매일 3번 다른 사람을 칭찬하자.
이 5가지 삶을 지침을 가지고 살면서 자신의 삶의 제일 목표를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에 두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매년 85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회사에서 나오는 이윤의 10분의 9까지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니까 사업을 하면서도 얼마나 기쁨을 만끽하며 사업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삶의 제일 목적과 관심을 복음 전파에 두어야 합니다. 때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복음 전파의 목적이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항상 사도 바울처럼 ‘내가 당한 일’을 축복의 씨앗으로, 또한 모든 일을 복음의 진보 기회로 삼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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