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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설교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살전 2장 1-8절)

by 【고동엽】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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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살전 2장 1-8절)

<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잇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때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고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군중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상하게도 군중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군중들이 따를 때도 “기적의 떡보다 하늘 떡을 추구하라!”고 듣기 힘든 말씀을 하니까 군중들은 썰물처럼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처럼 주님이 자기를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군중들은 마음이 돌아섰고, 결국 주님은 교권을 가진 유대인들과 로마 병정에 의해 잡혀 심문을 받고, 욕을 먹고, 채찍질까지 당했습니다. 그렇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군중들은 “저 모습은 절대 메시아의 모습이 아냐!”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메시아로 여기던 주님에 대한 실망이 분노로 변해 “호산나! 메시아를 찬양하라!”는 외침은 며칠 만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변했습니다.

그처럼 군중은 며칠 만에 사람을 왕으로 만들었다가 또 며칠 만에 사형수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철학에서 말하듯이 사람은 선해도 사람들은 악합니다. 인간은 선해도 군중은 악합니다.

제가 수영하는 곳에 초등학교 2학년 악동 둘이 있습니다. 둘만 특별 수영지도를 받는 것을 보니까 있는 집안 아이들이었습니다. 한 아이의 할아버지는 이름을 말하면 다 알만한 고위공직자입니다. 너무 가볍게 자기 집안 자랑을 하니까 나쁜 사람 만나면 범죄의 표적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겸손하지 않고 말을 주의하지 않으면 사단이나 납치범의 표적 1호가 됩니다.

이 악동 둘은 얼굴은 곱게 생겼는데 행동은 곱지 않았습니다. 강습이 끝나면 목욕탕에서 끊임없이 큰소리로 떠들고, 욕조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말도 함부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어른들의 야단을 맞았지만 그 버릇은 그대로였습니다. 한 마디로 천방지축, 안하무인입니다.

그런데 이틀 전에는 둘 중에 한 학생만 보였습니다. 혼자 있으니까 너무 얌전하고 목욕탕이 다 조용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얘야! 왜 오늘은 혼자니? 친구 어디 갔어?” 그러자 그 아이가 얌전하고 예의바르게 말했습니다. “가족들과 스키장에 갔어요.” 둘이 떨어지니까 아주 착한 아이로 돌변했습니다. 그때 사람은 선해도 사람들은 악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리면 죄도 용감하게 짓게 됩니다.

사람은 어떤 그룹에 소속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처럼 되기를 원하든지, 다른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왕따를 두려워하고, 자기의 소속감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잔인한 일도 합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과 도덕성을 잃어버리고 군중과 다수의 뜻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가장 치열한 영적 싸움은 군중심리와 자기 정체성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에서 자기 정체성이 이겨야 합니다.

본래 예수님의 뜻은 군중의 뜻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르려면 군중과 다수를 거절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그 거절이 싫어서 예수님의 뜻 대신 군중을 선택하면 그때부터 예수님과의 관계는 희미해집니다. 지금도 군중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과 반대되는 길로 갑니다. 군중들은 다수를 최고로 여기고 힘을 숭상합니다. 심지어는 리더에게 잘못된 길을 추구하도록 강요합니다.

이사야 30장 9-11절에는 군중에 대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 도다.”

군중은 패역합니다. 거짓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기 싫어합니다. 정직을 싫어합니다. 말을 부드럽게 하라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외면합니다. 사실보다는 외모와 거짓된 모습을 추구합니다. 정로를 싫어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싫다고 합니다. 이사야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군중은 대개 그렇습니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

지금 우리가 사는 군중의 힘이 커진 시대입니다. 유행의 물결이 무섭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길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말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Focus on the Word)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고난과 능욕을 당하고 많은 영적 전쟁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복음에 초점을 맞춰 살았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크게 말하면 말씀이 복음입니다. 말씀은 변하지 않는 사실(Fact)이고, 기독교 신앙의 헌법입니다. 말씀(Fact)은 감정(Feeling)보다 중요합니다. 감정에 의지하는 신앙은 위험합니다. 본인이 낙심한 상태이면 모든 것이 다 우울하게 보입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변함이 없는데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감정보다 말씀에 초점을 맞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열왕기상 17-19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이야기는 말씀 중심적인 신앙의 중요성을 잘 가르쳐 줍니다. 어느 날, 엘리야가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제의했습니다. 제단에 희생 제물을 놓고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신을 참 신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소리치고 몸까지 자해하며 기도했지만 불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엘리야기 기도하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렸습니다.

그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는 엄청난 권세로 바알 선지자들을 다 기손 시내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전혀 반대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는 바로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능력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밑에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심한 디프레스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그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 먹을 것을 통해 힘을 얻고 40일 만에 호렙산에 도착해 호렙산 굴에 은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아야! 왜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장 10절에서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의 일을 특별히 열심히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저만 남았는데 이제 저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열왕기상 19장 11-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에도 있지 않았고, 지진과 불에서도 있지 않고, 조용한 속삭임 중에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대개 자기감정을 움직일 놀라운 불과 같은 기적적인 무엇을 찾지만 사실상 하나님의 임재는 기적적인 능력보다는 조용한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어떤 어려운 환경을 만나도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2. 목표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Focus on the goal)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하나님으로부터 부탁받은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처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미국에 전설적인 야구선수 중에 조 디마지오(Joe DiMaggio)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선수생활 말년에 그가 속한 뉴욕 양키스 팀이 리그 1위가 거의 확정되었는데도 그는 리그 초반처럼 매 경기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1위는 맡아놨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뛰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관중 중에 저의 경기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지금 주님뿐만 아니라 천국과 이 땅에서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목표를 결코 이탈하지 말고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고, 무엇보다 그 일로 바빠야 합니다.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이 철학가 디오게네스를 존경해서 원하는 것은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디오게네스가 “영원의 한 조각만 달라!”고 하자 대왕이 사자를 통해 그것만은 주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디오게네스가 말했습니다. “가서 대왕에게 전해 주시오. 영원의 한 조각도 주지 못하면서 무슨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그리 바쁘신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전해 주시오.”

우리는 무엇보다 영혼 구원에 바빠야 합니다. 영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부와 명예가 다 허무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복음이나 영생이나 사명보다 축복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에만 매달리는 기복주의는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고, 그런 신앙에는 언젠가 반드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축복이 아니라 복음과 사명입니다. 그 점이 분명하지 않으면 기독교와 다른 미신은 차이가 없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축복도 주시지만 축복은 목적이 아니라 부차적인 산물입니다. 진짜 최고의 축복은 복음이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축복이 복음보다 앞서면 그 축복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고 그 신앙은 곧 실족합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라는 목표에서 결코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성장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Focus on growth)

본문 7-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이 장면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구원 후의 성장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점차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 앞에 찬란한 미래가 준비되어 있음을 믿고 그 미래를 향해 꿈과 비전을 가지고 줄기차게 도전해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죽습니다. 사람도 성장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습니다. 마음도 죽습니다. 인간관계도 죽습니다. 행복도 죽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뜻한 바대로 이루지 못해도 지속적으로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저는 벌써 목회를 15년째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가 크지 않습니다. 주변에 엄청나게 큰 대형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 교회들과 겉모습만 비교하면 “나는 이제까지 무엇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끔 낙심의 기운이 틈탈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낙심에서 저를 일으켰던 것이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는 자세였습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는 생활이 어려워 책도 쓰고 번역도 했습니다. 쓴 책과 번역한 책이 늘어나는 것도 하나의 성장이었습니다. 그 보람이 낙심을 이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신학교에 강의를 다녔습니다. 그때 신학교마다 교무과장에게 강의하지 않은 새로운 과목을 수업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5년 동안 강의한 과목이 총 24과목이었는데, 그때 강의한 과목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도 낙심을 이기게 했습니다.

2000년부터 인터넷 말씀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저의 말씀을 찾았고, 목사님들 중에도 저의 설교말씀을 유난히 좋아하고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2년에 요삼일육선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 교회에서 선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선교사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희 선교사역을 위를 위해 기도해주는 후원 그룹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후원그룹들이 낙심을 이기게 했습니다.

2004년 말에 미션퍼블릭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20개 설교파일이 완성되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서 선교후원 차원에서 그 파일을 구입하는 분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파일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얼마 전에는 미션퍼블릭에서 책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를 출판했습니다. 이번 2월에는 미션퍼블릭에서 2번째 책 ‘빈손 인생의 축복’을 출판하게 합니다. 그렇게 책과 파일이 늘어나는 것도 낙심을 이기게 했습니다.

저는 미션퍼블릭을 통해서 더 많은 선교를 꿈꿉니다.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가 1판이 다 팔리고 2판도 상당히 팔아서 미션퍼블릭에서 꽤 수입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그 수입으로 두 번째 책을 출판해야 경영원리에 맞는데 수입보다 헌금을 더 해버려서 적자가 난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앞으로 미션퍼블릭을 통해서 더 많은 선교를 하겠다고 생각하면 기쁘고 그런 생각도 낙심을 이기게 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또한 2005년부터 사랑칼럼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사랑칼럼 독자가 지금 4천 명 정도 됩니다. 그 독자 중에 헌신자가 나왔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우리 교회 세금 문제도 그 독자들의 헌신이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그 독자 중에는 더 많이 선교하라고 우리 선교회로 십일조를 내는 교인도 생겨났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아름다운 헌신자들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처럼 사랑칼럼 독자가 늘어나는 것도 낙심을 이기게 했습니다.

또한 지금도 국제화 시대의 흐름에서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미션퍼블릭 사역을 확대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어떻게 하면 선교를 더 많이 할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선교는 생각만 해도 힘을 줍니다. 저도 47세니까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처럼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며 선교하고 있습니다. 지난 15년을 그렇게 달려왔고, 그런 과정에서 생긴 작은 열매들이 낙심을 이기게 했습니다.

언젠가는 건물과 군중 중심으로 이루는 한국 교회의 성장은 한계를 드러낼 것입니다. 현재 거의 폐허처럼 된 유럽 교회들이 그 사실을 웅변해줍니다. 그러나 건물은 사라져도 문서는 남습니다. 군중은 사라져도 성장을 위해 노력했던 땀의 흔적들은 남습니다. 육신은 죽어도 열매와 영향력은 남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면 반드시 열매는 남게 됩니다.

이제 현재의 모습에서 머물러있지 말고 하나라도 더 발전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신앙생활에서도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습관적인 신앙입니다. 어떤 분은 모태신앙을 자랑하지만 ‘모태신앙’은 자칫 잘못하면 ‘못해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신앙’입니다. 현재의 모습에서 지속적으로 성장을 추구할 때 미래에 축복의 지경이 넓혀질 것이고, 죽은 후에도 하나님 앞에서 어엿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 마음을 더욱 넓히십시오 >

요새 교회 성장이 멈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개인의 성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마음이 넓어져야 축복의 지경도 넓어지는데 마음이 별로 넓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과 욕심을 앞세운 성도들이 많습니다. 교회와 교단은 주님 안의 한 형제라기보다는 넘어뜨려야 할 경쟁자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사단만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마인드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그릇이 커야 합니다.

어느 날,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레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그는 지옥문 수문장에게 물었습니다. “수문장님! 저 안에 가톨릭 교인이나 장로교인이 있습니까?” 수문장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웨슬레를 따르는 감리교인도 있습니까?” 수문장은 역시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크게 상심한 채 그는 그곳을 떠나 천국 문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천국 수문장에게 물었습니다. “수문장님! 천국 안에는 가톨릭 교인이나 장로교인들이 많지요?” 그런데 수문장은 그런 사람들은 이곳에 없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라서 웨슬레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감리교인은 있습니까?” 수문장은 그런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웨슬레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있습니까?” 그때 수문장이 대답했습니다. “천국에는 교단 이름을 가지고 온 사람은 없고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만 왔소.” 결국 그의 꿈은 군중과 다수를 추구하고, 벽을 높이 쌓고, 기득권에 연연하면 안 된다는 엄중한 메시지입니다.

20세기 초에는 전 세계에 약 1,900개의 교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열 배가 넘는 20,000개 이상의 교단이 있다고 합니다. 한 세기 동안 분파, 분열, 벽 쌓기가 극심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정로를 잃었습니다. 그처럼 서로 벽을 쌓고 싸우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단에게 다 먹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사자와 멧돼지가 무더운 여름날에 옹달샘에서 서로 먼저 물을 마시겠다고 죽도록 싸웠습니다. 그 싸움을 언덕 위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자가 말했습니다. “이보게! 우리가 이렇게 싸우면 둘 다 독수리 밥이 되겠네. 자네 먼저 물을 마시게.” 그때 멧돼지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형님이 먼저 마시지요.” 결국 둘은 물을 차례로 마시고 길을 떠났고 독수리는 헛물만 켰습니다.

그 이야기를 누군가 각색했습니다. 그 후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독수리가 옹달샘 주위를 배회하는데 10년 전의 그 멧돼지와 사자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독수리는 재빨리 몸을 숨겼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자와 멧돼지가 계속 싸워서 결국 멧돼지는 죽고 사자도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독수리가 내려와 사자를 쪼아 죽여 두 마리 짐승을 독수리가 맛있게 포식했다고 합니다.

서로 싸우면 다 죽습니다. 차이를 인정해주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비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서로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저도 아내를 볼 때 가끔 놀랍니다. 너무 방향 개념이 없습니다. 길을 찾을 때는 아내가 말하는 쪽으로 가면 반드시 그 장소가 안 나옵니다. 반대쪽으로 가면 반드시 찾습니다. 숫자 개념도 없습니다. 제가 비자금을 만들어도 전혀 눈치를 못 챕니다.

저는 아내의 머리가 나쁜 줄 알고 아이들도 머리가 나쁠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으로는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드라마를 보면 눈앞에 TV를 계속 지켜보면서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설거지 하고, 가끔 안방도 가고,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하면서 가끔 TV에 나오는 소리를 듣고도 드라마 전체의 스토리를 쫙 파악합니다. 영화관에 가면 저게 무슨 뜻이냐고 자주 물어보니까 귀찮아합니다.

사람은 다 다릅니다. 그 장단점을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군중심리를 따라 내가 남처럼 되고, 남도 나처럼 되기를 원하면 행복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획일적인 하나’가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자유와 일치와 행복과 축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성장하고 마음을 넓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의 지경이 넓혀지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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