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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행 3:1-10)

by 【고동엽】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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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행 3:1-10)

하루에 세 번 기도를 드리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에, 오늘날의 시간으로 말하자면,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아름다운 문'(美門)이라고 불리는 성전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돈을 달라"며 구걸하였습니다. 대개 구걸하는 사람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법입니다. 오랫동안 앉아 있다 보니 등이 굽어지고, 가난하고 병들어 몸을 곧바로 추스를 수 없는 탓도 있겠지만, 대개 걸인들은 자신의 모습을 가급적 처량하고 불쌍하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동정심을 유발하여 돈 한푼이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향해 "얼굴을 들고,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구걸하는 거지는 뭔가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애타게 손을 벌리고 앉아 있는 거지에게 베드로는 엉뚱하게도, 생뚱맞게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렇게 외친 후에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걷기고 하고, 심지어는 뛰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지방회에 제출하려고 사무총회록과 교회대장을 정리하던 중에 그 동안의 교세와 재정의 통계를 일목요연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전부터 대충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서류를 보니까 마음이 조금,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제가 오기 전까지 교인의 숫자가 계속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고친 앉은뱅이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지만, 우리 교회는 점차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임 목회자 시절에 급격한 교인 감소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누가 얼마나 더 잘 못했는지는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그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린 것은 너무 애통한 일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요즘 한 영혼을 얻기는 어쩌면 천하를 얻기보다도 더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더욱이 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숫자는 매우 희박해집니다. 그에 반해 신자들이 떨어져나가는 비율은 점차 커집니다. 이런 어려운 형편에 그렇게도 아까운 많은 영혼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것은 정말 분통이 터질 일입니다.

누가 더 잘하고 누가 더 잘 못했든지 간에, 교회 분쟁은 교회와 세상 사람들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아무리 못됐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성도가 아무리 고약하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교회 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 분쟁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을 갈기갈기 찢는 일이요, 이 땅에서 교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범죄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교인과 교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아니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회는 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끝까지 기도하고, 끝까지 참고, 결국에는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거룩한 교회를 지키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예수님처럼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잘못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의 평화와 거룩한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원수와 같지도 않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 자신이 만든 원수에게 복수하려고 예리한 칼을 마구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같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향해 비난과 저주와 배척의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의 문제든 성도의 문제든 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회 재판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불가피하지 않으면, 아니 절대로, 교회 재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이기든지, 누가 지든지 간에, 교회 분쟁은 모두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깁니다.

교회 분쟁은 양적인 후퇴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큰 손실을 끼칩니다. 바람에는 쭉정이만 날려가고 알맹이만 고스란히 남을 수 있지만, 교회 분쟁이라는 바람에는 쭉정이 신자들만 모두 날려가고 알맹이 신자들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오히려 순수한 교인들이 상처를 더 많이 입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교회도 아름답지만, 아니 작은 교회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교회 분쟁 때문에 작아진 교회는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양적으로 줄어든 교회는 다시 일어나기 무척 어렵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상처를 받고 침체를 겪은 교회는 다시 일어서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위의 소문이 나빠서도 그렇지만, 교회가 큰 타격을 입고 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문제 교회가 빨리 회복되고 성장하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 전체가 진지하게 뉘우치고 뼈아픈 교훈을 얻기까지 하나님께서도 성장을 보장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관해서는 저는 서류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시절과 여러분의 심령을 되돌아볼 수도 없으니,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경제가 훨씬 좋아지고, 오락과 유흥이 더 발전하는 나라일수록 대개 교인의 숫자는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숫자가 줄어드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적인 침체입니다. 한국 교인들이 점점 모이기를 싫어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기를 싫어하는 것을 보니까, 한국 교회는 바야흐로 영적인 침체기에 접어든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이런 영적인 침체기에, 영적인 힘이 별로 없는 부족한 제가, 분쟁을 겪고 큰 상처를 입은 우리 교회를 맡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조금 안타까운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을 향해 여전히 감사와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작은 교회라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저는 이 작은 교회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영적인 침체와 맞물려 우리 교회가 영적인 앉은뱅이 신세를 지금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하고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솔직히 한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는 처음부터, 날 때부터 이렇게 허약했습니까, 아니면 점차로 허약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세월이 흐를수록 영적으로 더욱 강건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허약해지고 있습니까? 육신은 병들고 늙어가더라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육신처럼 날로 낡아지고 있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지금 처음에는 든든히 서 있는 강건한 성도였지만, 지금은 점차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아니 어쩌면 아주 가라앉은 앉은뱅이 성도와 비슷할 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듣기 괴롭고 인정하기 싫더라도, 인정할 것은 솔직히 인정합시다. 우리가 영적인 앉은뱅이가 된 것을! 이것마저 애써 부인한다면, 우리는 구제불능입니다.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는 적어도 자신이 앉은뱅이라는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가라지처럼 작은 믿음도 있었습니다. 비록 병을 고쳐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왕래하는 성전 문 앞에서 당당히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육신으로는 배가 부르지만 영적으로 헐벗은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서로 상처를 입고 상처를 준 지나온 날의 허물을 뼈아프게 뉘우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남의 도움, 아니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녕 확신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약삭빠르게도 남이 보란 듯이 일어나는 시늉만을 하다가는, 곧장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바지와 치마 밑에 지팡이를 숨기고 일어나더라도, 집에 가서는 주저앉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힘없는 앉은뱅이와 같고, 구걸하는 거지와 같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아니 당당하게 인정합시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앉은뱅이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많은 돈을 받아서 병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팔을 잡고 잠시 일어나는 시늉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다시 일어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없었지만, 아니 설령 그에게 비록 은과 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은과 금은 절대로 주지 않았을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베드로와 요한은 돈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봅니다. 아니 돈 몇 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장 호구지책으로 때울 수 있는 적은 돈을 주기보다는 확실한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걸인은 아무리 많은 돈을 얻어도 걸인 신세를 면키 어렵습니다. 앉은뱅이가 무슨 일을 하여 돈을 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돈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곶감을 빼먹듯이 돈을 다 쓰고 나면 다시 구걸할 도리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는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하도록 돕는 길은 많은 돈을 주기보다는 앉은뱅이 신세를 면케 해주는 일입니다. 곧 그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도움을 주는 비결이 됩니다. 베드로 때문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앉은뱅이 걸인은 일어나 걷고 뛰다가, 드디어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도 역시 베드로와 요한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그는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긍지와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할렐루야!

가끔 저와 작은 교회의 다른 목사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돈이 많다면, 시설과 비품을 잘 차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당을 근사하게 잘 지어놓기만 하면, 저절로 교인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가끔 도시의 교회들은 지금도 그런 재미를 보곤 합니다. 하지만 대개 도시의 작은 교회, 농어촌의 작은 교회는 돈도 별로 없지만, 어쩌다 많은 돈을 들여 교회 시설을 잘 꾸며놓아도, 약간의 부흥은 될지는 몰라도 큰 부흥은 되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멋지고 화려한 시설이 하도 많아서 그런지, 이제 교회는 돈과 시설로 세상 사람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는 많은 돈 때문에 오히려 분쟁을 자초합니다. 엄청난 시설 때문에 소중한 헌금을 과도한 유지비로 지출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솔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재물, 은과 금, 아니 다이아몬드가 많이 있어야만, 세상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었듯이, 앉은뱅이 교회를 일으키고 병든 세상을 고치는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돈과 재물, 시설은 한낱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알맹이가 들어 있지 않는 포장은 속임수가 아니면 뻥입니다. 뻥튀기 과자는 먹기는 즐겁고 가벼워도, 영양가가 별로 없습니다. 뻥튀기는 속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모레부터 설날이 시작되는데, 설날에는 대개 한과와 강정과 같은 과자를 많이 먹습니다. 한과와 강정은 보기 좋고 먹기도 좋지만, 속은 비어 있습니다. 중국과자에 공갈빵이라는 게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커 보여도, 속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먹을 게 별로 없고, 그래서 영양가치도 별로 없습니다. 새우깡이니, 감자깡이니 하는 과자도 맛은 고소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래도 과자는 과자일 뿐이니,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습니다. 웃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만약 교회와 사람이 공갈, 깡, 뻥이라는 이름을 가지면, 이것은 웃을 일이 아니라 큰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실없는 사람일뿐만이 아니라, 허풍과 거품이 가득한 사람이요, 그래서 가짜와 사기꾼입니다.

출처/이신건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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