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고난을 맞을까요? (벧전 4:1-11)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4장에서 우리는 고난의 참된 의의가 무엇인 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고난이 올 때 어떤 태도로 맞이해야 하는가, 어떤 태도로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전체를 살펴보면 사도 베드로는 특별히 “때”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1장 5절을 보면 어떤 ‘때’에 대해서 말씀했습니까?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는 이 고난의 천지를 기록하면서 그들 앞에 직면해 있는 소위 종말론적인 말세의 고난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장 11절을 보세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여기서도 이 ‘때’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관심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1장 17절을 보세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이 말씀은 나그네로 지내야 할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 20절에 보면 어떤 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여기 말한 “말세”는 언제를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셨을 때부터 말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시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이 말세에 대해서 혼동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말세가 왜 오지 않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전체를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역사는 벌써 종말의 시간에 접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부터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이 종말론적인 긴장의 시간인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이 언제 오실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 시간의 긴장이 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때’를 비밀에 붙여 두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살게 하신 것은 얼마나 지혜로운 처사인지 모릅니다. 만일에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였다면 우리는 마지막 때가 오기 1년 전까지는 제 멋대로 살다가 그 때에 가서 우리의 생활을 정리하려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역사를 완성하는 그 위대한 때를 신비의 커튼 속에 감춰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를 우리가 날마다 기다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를 보세요.
그 ‘때’에 대한 관심이 4장에도 나옵니다. 4장 2절에서 우리는 “육체의 남은 때”에 대한 관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4장 17절에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때’에 대한 긴장감이 베드로전서 전체에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5장 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와 시간은 아주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이 말씀을 들은 이후로 아마도 베드로는 시간에 대한 긴장감을 느끼기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사도 베드로가 이 “때”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베드로전서의 서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직후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핍박이 임할 것이었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서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일어 날 것이고 그때를 계기로 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서운 박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박해가 임하기 직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서 이 편지를 쓰고 있던 사도 베드로는 아마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이 박해에 대한 예감에 사로잡혀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고난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사도 베드로는 ‘이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 고난에 직면해야 하는가?’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영광스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네 가지 태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죄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면 고난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고난이 올 때 고난 그 자체도 문제지만 그 고난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오늘 주신 말씀 1-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고난이 올 때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의 충고입니다.
1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으십시오”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주시요,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도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고난을 받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이 고난에서 면제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주님이 고난을 대비해서 준비하셨던 것처럼 너희도 이 고난을 대비하는 갑옷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갑옷’이란 고대 헬라 시대의 전사들이 했던 무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투 태세를 갖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환난의 회오리바람이, 박해의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고난을 맞을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그 태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갖습니까? 고난의 마당에서, 고난의 전쟁터에서 어떤 태도로 전쟁에 임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태도가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어떻게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주님은 고난이 왔을 때 이 고난에 대해 불평하시거나 원망하여 죄를 범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닥치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온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이 고난을 수용하기로,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의 고난은 주님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으신 고난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죄, 아니 내 죄 때문에 받으신 고난이었습니다. 내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다가오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고난과 타협하기 위해서 죄를 즐기는 자리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고난에 대해서 훨씬 능동적인 자세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고난이 올 때 인간의 정욕을 좇아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난과 쉽게 타협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죄를 짓게 됩니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먼저 ‘고난이 왜 주어지는가?’ ‘이 고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상에서 사람이 드린 모든 기도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혹은 어쩔 수 없이 십자가 앞에 부딪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 고난이 주어졌음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 고난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을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서 얼마만큼 남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고난이 오느냐, 안 오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숭고한 관심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 고난 자체보다도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과거를 돌이켜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예수 믿기 전의 과거를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그런데 왜 돌아가려 하느냐는 말입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 속에 살았던,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하던 지난 때로 왜 돌아가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뜻’이란 말은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의 뜻’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의 뜻을 좇던 그 시간은 얼마나 무료한 시간이었습니까? 그 시간은 얼마나 무의미한 시간이었습니까? 그 시간은 얼마나 우리를 학대하는 시간이었습니까? 그 시간은 얼마나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까? 그 시간은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한 시간이었습니까?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그 지겨웠던 과거를 생각하며 내가 고난받을지언정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견고하게 머물러 서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보람의 삶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불신자에 대한 태도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4-6절까지의 말씀은 고난이 올 때 우리가 불신자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4절 말씀 보세요.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여기서 ‘너희’와 ‘저희’가 구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인들이고 ‘저희’는 죄 속에 빠져 살고 있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여기서 “달음질”이라는 말은 본래 ‘떼를 지어 달음질한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우리도 그리스도 밖에서 마음대로 죄 짓고 살 때에, 죄를 짓는 이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의 탁류 속에 휩쓸려 들어가서 떼를 지어 그 흐름 속에 같이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이 대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 대열에서 빠져 나왔다는 것 때문에 불신자들이 우리를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잘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잘못이 없는데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받는 박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처럼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박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삶이 변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지난 날의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 무법, 우상 숭배 속에 빠져서 사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었습니까? 그곳에서 우리는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때 분명 미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미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두 가지 각기 다른 삶의 갈등이 이 박해를 불가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들이 우리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들로부터 필연적으로 핍박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5절 말씀을 보십시다.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여기서 ‘저희’는 불신자를 말하는데, 그들이 우리를 비방하고 핍박하지만 결국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앞에 직고하고야 말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자 앞에 서서 그들의 삶을 후회하면서 슬피 울며 이를 갈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이 성경구절은 난해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 구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지만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들, 즉 베드로 당시 핍박을 받아 죽은 순교자들이 살아있을 때 복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리라”는 말은 그들이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되는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장 7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했습니다. 고난을 맞이해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요?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을 들으면 정신을 잃어버리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때 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넷째로, 성도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오면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의 시간이 올 때 더욱 힘써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로마 근교에 가면 카타콤이 있는데 거기에 숨어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식량을 날라다 준 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 고난을 담대하게 극복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되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사단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단은 기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단도 병을 고칩니다. 사단이 작은 귀신을 쫓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단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단은 다른 것은 다 해도 사랑은 못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고유의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고난을 당할 때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런 때 쫓기는 사람을 대접하는 일도 사실 위태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 다니는 성도들을 숨겨 주고 대접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이었습니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읽어보세요.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시간이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서로 대접하시길 바랍니다. 고난의 때 우리는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대접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미 주님께로부터 황송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셨습니까?
탕자의 비유가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바로 이렇게 우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내 죄를 죄 값대로 책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영생을 보장하시고, 내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을 주신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사랑의 대접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3장 2절을 보세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아브라함은 손님 대접을 잘 하다가 천사를 대접했습니다. 손님 대접 잘하다가 보면 주님을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10절 말씀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도 섬기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섬김의 극치입니다. 주님은 우리 위해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는데 우리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말씀 전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은사를 가지고 여러분을 섬깁니다. 여러분도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잘 깨달아서 그것으로 다른 성도들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 이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사’라고 하면 굉장한 능력만을 말하는 줄로 흔히들 생각합니다. 가령 병고치는 은사,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은사, 사람들 앞에서 늘 말씀 전하는 은사, 또 가르치는 은사, 전도를 잘해서 많은 사람에게 예수 믿게 하는 은사만을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만이 은사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여러 가지 은사들 가운데는 “서로 돕는 은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언제나 감동을 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가 설교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가 능력을 행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필요로 할 때마다 바울 곁에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이 “돕는 은사”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많은 은사를 온몸의 지체로 비유했습니다. 지체 중에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까? 온몸의 지체 하나 하나 중에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받은 고유한 은사를 가지고 서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하라”고 권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은사를 받지 않은 분야에서 일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자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너를 요구하고, 너는 내가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청지기로서 봉사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자기 재산이 없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인을 의식하면서 주인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주인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재산을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정신이 청지기 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우리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섬길 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은사를 사용하고자 하는 청지기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봉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을 보세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했습니다.
가령 내게 돈이 있어서 남을 도울 때 그 사람이 황송하게 생각하면 “황송해 하실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재물을 주셔서 주님의 재물을 가지고 도와드리는 것이니까 주님께 영광을 돌리세요”라고 말하십시오. 이때 이 사람의 봉사는, 이 사람의 구제는 정말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봉사 생활의 원칙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청지기 정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11절을 같이 보십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을 맞으면서 성도들이 서로 봉사하는 태도입니다.
이 어두움의 시기에 사는 성도들이 고난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대접하면서, 서로 섬기면서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정신대로 섬기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여러분, 예수 믿어 그리스도인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고난의 시간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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