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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결혼 (엡5: 22- 25, 31- 33)

by 【고동엽】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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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결혼    (엡5: 22- 25, 31- 33)

한 노처녀가 결혼 상대자를 찾기 위해 결혼 상담소를 찾아갔습니다. 소장이 상대방의 이상적인 조건을 컴푸터에 입력시키라고 하자 노처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키는 별로 크지 않고 날마다 정장을 해야 할 것. 그리고 걷는 걸 즐기는 건장한 상대면 좋겠어요."
곧 그런 상대의 신상명세서를 얻을 수 있다는 소장의 답변에 기대를 갖고 답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노처녀는 결과를 보고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이상적인 상대는 팽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결혼 5대 조건을 A, B, C, D, E로 구분합니다. 먼저 A는 age(나이), B 는 beauty(미), C 는 condition(건강), D 는 degree(학벌), E 는 economy(경제력)라고 합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무시하기 힘든 것이기는 하나 우리 성도들은 5대 조건에다가 둘을 더 붙여 조건을 말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F(faith)와, G(God)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준비하는 것보다 결혼예식을 준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대학생 선교회 가정 선교원은 준비 없는 결혼은 불행을 자초할 수 있다며 배우자 선택에도 충분한 시간을 가질 것을 제언합니다. 다음 11가지의 '배우자 선택기준'에 대해 진단해 어는 정도 일치되면 배우자감으로 고려해 볼 것을 권합니다.
1) 종교적 확신과 조화가 있는가?
2)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가?
3)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가?
4) 적응력과 융통성이 있는가?
5)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6) 동정 또는 동감할 수 있는가?
7) 안정감이 있는가?
8) 성격이 비슷하거나 상호보완적인가?
9) 비슷한 가정환경인가?
10) 연령과 건강은 조화로운가?
11) 서로의 삶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가?

결혼이란 무엇일까요? 창세기 2장 2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이 구절은 마치 신부의 아버지가 곱게 키운 딸을 신랑에게 넘겨주기 위해 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엄숙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신성한 결혼제도의 창시자이자 주관자임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결혼에 대한 첫 번째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즉 결혼은 인간의 행복과 번영과 건강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고안하신 복지제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혼이 진정으로 행복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적인 결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결혼은 행복한 결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의 원리대로 살지 않으면 언젠가는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에로스로만 이루어진 사랑은 생의 무의미라는 종착역에서 해체되어 버리고 맙니다. 결혼제도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표준대로 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두 번째 정의를 내린다면 결혼은 '인생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결혼은 성경의 거의 첫 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결혼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와있는 대로 성경의 거의 마지막 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결혼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는데 그 많은 기적 중 첫 번째 기적을 가나 혼인잔치에서 베푸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는 결혼 첫날부터 부조화와 부족함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그 필요를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도 결혼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결혼의 실패는 곧 인생의 실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져야 하는 축복의 터전입니다. 세 번째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시하신 것'이고 '인생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기에 '신중히 선택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인생을 설계하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인류사와 함께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는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백 번, 천 번 신중히 생각해 결혼 대상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부모나 가정을 빠져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자기의 가정에 만족이 없다고 새 가정을 꾸리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마치 냄비 속이 뜨겁다고 뛰어 나와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결혼하려는 사람은 책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결혼 적령기 이야기를 합니다. 언제가 결혼 적령기일까요? 남자는 30대 전후, 여자는 20대 중반쯤을 결혼 적령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진정한 결혼 적령기는 결혼할 당사자가 책임지는 존재가 되었을 때입니다. 나이가 40이 되도록 책임의식을 갖지 못 했을 때는 아직도 결혼 적령기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선택할 때 물질적인 면, 외적인 면에 지나치게 치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순수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혼수제도가 나빠지고 있습니까?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결혼에 지나친 조건을 붙이고 있습니다. 결혼하는 것이 참으로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지나치게 조건을 붙이는 것은 절대 자녀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심리학적으로 볼 때 부모의 이러한 행위는 질투라고 합니다. 결국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방해하는 훼방꾼 노릇을 하는 셈입니다. 결혼은 물질적이고 외적이고 육체적인 수준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생활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결혼생활이 금방 메마르게 된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들에게는 공통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들의 결혼 전의 주된 대화와 행동이 육체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수준에 의해 결혼한 사람들은 서로의 성적 매력이 가라앉고 나면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별로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야기할 공통점이 거의 없고 같이 행동할 공통점이 거의 없게 되어 결혼생활이 메마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외적이고 육체적인 조건으로 결혼하는 것이 얼마나 신중하지 못한 결혼입니까?
반면에 사랑한다는 명목 하나만으로 너무 무조건적으로 감정에 치우쳐 결혼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하다가 결혼생활에 조금 어려움이 생기면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습니까? 감정은 너무 쉽게 변하는 변덕쟁이이기 때문에 감정에만 의지해서 결혼해서도 안됩니다. 결혼은 정박아를 키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때문에'라는 조건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는 것에 '예스'를 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때문에'라는 조건적 사랑은 사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무조건적 사랑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신중하게 선택되어져야 합니다. 이성의 띠와 감정의 띠가 적절하게 조화된 결혼! 그러한 결혼이 성공적인 결혼이 될 것입니다.
결혼은 한 낯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일생을 같이 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결혼은 인생 최대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처음부터 다른 인생관과 삶의 목표를 가지고 출발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스런 일일까요. 기독교 신앙이란 단순히 한 ‘종교’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의 방향과 목적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결혼 문제에 대한 성경의 원리는 분명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15)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은 불신자와 결혼을 가리켜 “마귀를 장인으로 모시는 격”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게 되면 수많은 마음의 고생이 뒤따르게 됩니다.
어떤 신자들은 결혼 후에 상대방을 회개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불신자와 결혼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배우자가 하나님이 진정 택하신 사람이면 하나님은 그를 결혼 전에 개종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피하면, 이는 그 결혼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충분한 표시가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때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무엇이 옳은가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톰소여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불신자인데 실은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리고 올리비아 레인지던이라는 처녀는 신앙인이었는데 마크 트웨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올리비아는 마크 트웨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지고한 것이고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으며 더욱이 마크 트웨인을 개종시킬 수 있다고까지 자신만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처음에는 그런 대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마크 트웨인은 올리비아의 신앙에 대해 적개심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올리비아가 성경책을 크게 읽을라치면 마크 트웨인은 "나는 성경 따위는 안 믿어. 시끄러우니까 집어치워"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사이는 신앙으로 맺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마크 트웨인을 자기의 신앙으로 끌어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올리비아는 그렇게 신앙 생활을 포기한 채로 슬픔 속에서 몇 년간을 더 그와 함께 보냈습니다.
마침내 마크 트웨인도 자기 아내를 위로할 양으로 "여보, 기독교 신앙이 그렇게 좋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마지못해 허락했습니다만, 올리비아는 다시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이르고야 만 것입니다. 불신자와의 결혼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포기를 의미할 뿐만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마저도 잃고 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걷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결혼은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만큼이나 신성한 것입니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하였는데 부인은 신앙인이었고 남편은 불신자였지만 결혼 후에 남편도 예수를 믿기로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난 후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부인이 교회에 가는 것까지도 반대하는 입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냉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온 남편은 밥상을 치운 채 가방 속에서 이혼수속을 밟아온 서류를 꺼내 놓고는 도장과 인주까지 준비하여 내밀면서 "당신, 나를 택하겠소, 예수를 택하겠소? 만일에 예수를 택하겠다면 우리 서로 갈라섭시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당신을 버릴 수가 없소 예수님이 내게 한평생 동안 당신만을 섬기며 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먼저 당신에게 이혼하자고 했을 것이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남편이 등뒤에 와서 하는 말이 "정말 당신이 믿는 예수가 나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소? 여보, 내가 잘못했소. 그런 예수라면 나도 다음부터 교회에 나가겠소." 두 부부는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 이후 이 가정은 진실되게 신앙생활을 하며 지금껏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남편을 용서한 아내의 사랑이 남편을 녹였고, 예수님 때문에 이혼 직전에 이르렀던 가정에 행복이 찾아들었고 예수님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부부의 마음이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와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질까 두려움이니라"(잠22:24)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와 깊이 사귀면 그들의 영향을 받아 믿음에서 떠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방여인을 취하여 크게 범죄하였고, 에스라 10장과 느헤미야13장26절 이하에 보면 이방여인과 결혼함으로 그들의 우상문화를 끌어 들여와서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므로 그들을 용납지 않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6:14)하였습니다. 이는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황소와 말을 함께 묶어 마차를 끌도록 해보십시오. 말은 다리가 길고 황소는 다리가 짧습니다. 그래서 마차가 제 자리에서 뱅뱅 돕니다. 말과 소는 서로 물면서 싸우기 때문에 같이 마차를 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과 소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마차를 끌려고 하기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와의 결혼이 이와 같습니다. 또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미끄럼틀 위로 사람을 끌어올리기가 쉽겠습니까, 아니면 밑에서 끌어내리기가 쉽겠습니까? 신자는 미끄럼틀 위에서 불신자인 상대를 위로 끌어올리려고 하고, 불신 상대는 밑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미끄럼틀 위로 끌어올리는 것보다, 밑으로 끌어내리기가 더 쉽습니다. 결혼을 위해서 교제할 때는 일단 결혼만 하면, 쉽게 예수 믿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 분은 믿지 않는 남성과 결혼하여, 십 수년간 새벽마다 기도를 드림으로 마침내 남편을 예수 믿게 하였습니다. 그동안 그 여자 분이 겪었던 고통은 말할 수 없습니다.
부부가 함께 해로한다 해도 40, 50년인데, 그 기간의 1/4을 갈등 속에서 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것도 결혼 후 깨가 쏟아져야 할 시기에 말과 소의 갈등처럼 집안에서 벌어진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불신자와 교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교제를 당장 끊지 말고 결혼하기 전에 먼저 그(녀)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첫째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람을 만들고 난 후에 결혼을 해야 합니다.
"...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말2: 11- 12)
한 직원이 자기 사장을 보고 말했습니다.
"사장님, 이렇게 적은 월급으로는 영영 장가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나도 알아." 사장이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안되어서 나를 고맙게 생각할 걸." 이어서 사장은 말했습니다. "이 보게, 소크라테스도 말하기를 '결혼을 하지말고 있어 보라. 불행할 것이다. 그러면 결혼하여 보라. 그러나 결혼하여도 불행할 것이다' 라고 했다네" 계속해서 그는 결혼의 불행편을 제창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된 생각입니다. 결혼생활의 근본 목적은 낙원생활 보다 더 행복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에덴동산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좋고, 선하고,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여 배필로 주셨으니, 결혼생활은 낙원생활 보다 더 행복하고 좋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오직 주안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이라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18:22)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19:14)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전7:3)
"남편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3:7)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딛2:4-5)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3:18-19)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5:18-19)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5-6)
본문 에베소서 5장31절에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라고 했습니다. 결혼의 첫 번째 비밀은 “둘이 하나되는 비밀”입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둘이면서 하나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두 인격이 감정적인 융합을 이루어 하나의 기능을 발휘하는 동시에 각자의 특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독특한 관계는 두 개의 진흙 덩어리의 결합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두 사람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혼의 신비요, 비밀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상적(理想的)인 결합과 절묘(絶妙)한 조화(調和)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처야 할 과정과 결단(決斷)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자기의 반쪽을 잘라내는 결단입니다. 둘이 하나되기 위해 싫든 좋든 하나 되려면 자신의 고집, 욕구, 의견, 권리(權利)등 모두 절반만 주장해야 합니다. 둘째, 상대방의 절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런 일입니다. 셋째, 내가 포기(抛棄)되고 우리가 되는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부부가 되려면 함께 사는 지혜와 관용과 이해와 상호협력이 필요합니다. 최근 한국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통계가 보고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이혼율 세계 제2위의 나라입니다. 놀랍게도 이혼한 분들 중 80%가 결혼 1년 안에 이혼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는 결혼에 대한 바른 이해와 결단과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두 당사자의 결단에 따라 매일 행복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참혹한 전쟁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이해와 관용과 사랑의 섬김으로 천국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2절에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노라.” 했습니다. 두 번째 비밀은 그리스도안에서 맺어진 결합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가 결혼을 “하나의 가위”에 비유했습니다. 항상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그 둘 사이에 끼어 드는 모든 것을 잘라 버립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는 그 어떤 사람도 끼어 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그 가정을 망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끼어 들거나 끼어 들도록 방임하지 마십시오.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모셔야할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처음부터 작정된 중매자요, 결혼의 주례자이며, 가정의 건설자, 창조자, 치료자, 회복자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공급자이십니다. 이분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혼은 둘 사이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신 결혼입니다. 이 가정은 문제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성령님의 지시를 순종함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가정의 최고 권위자로 섬기고 있습니까? 어떤 가정은 그 최고 권위를 부모나 은사(恩師)나 친구나 선배에게 둡니다. 그러나 내 가정과 내 인생의 문제를 끝까지 책임지고 해결해 줄 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이십니다. 그러기 위해 결혼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어야 합니다.
본문 33절에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이 사랑과 경외함으로 하나 되는 심오한 비밀임을 교훈합니다. 이는 결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즉 남편은 사랑을 아내는 경외함의 값을 지불해야합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 몸과 마음과 목적과 이상이 하나되는 행복한 연합은 불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언약행위입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주심 같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배우자에 대한 헌신과 끝없는 사랑,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그런 헌신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때 성숙한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괴테는 “한 쌍의 남녀가 결혼하는 순간부터 저들은 서로에게 무한의 빚을 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가 요구할 때 무엇이든지 기쁨으로 빚 갚을 준비가 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신의 몸과 모든 소유가 자기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함께 공유해야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만족케 하며, 행복하게 하는데 결코 게으르지 말고 사랑과 경외의 마스터키를 선용해야 합니다.
또한 가정에 문제가 발생할 때 남편은 머리의 위치에서 아내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동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이때 아내는 남편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믿고 신뢰하며 따라야 합니다. 이로서 가정의 문제는 해결되고, 매일매일 창고 속에는 새로운 사랑과 행복이 가득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참 사랑과 경외로서 행복한 연합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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