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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 (마태복음 27:27~31)

by 【고동엽】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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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난  (마태복음 27:27~31)  


사랑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학자는 사랑을 ‘기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까지 썼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많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사랑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처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요 15:9).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영광을 가장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고난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고난받으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고난당하셨습니다. 고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을 살펴봄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깨닫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신 고난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받으셨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짜 보아라.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피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왜 성경이 피의 책일까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롬 3:23). 문제는 죄인인 인간은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파산하듯,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고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사 53:5; 벧전 2:24). 한 번만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무려 4번이나 피를 흘리셨습니다.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기도가 얼마나 힘드셨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더니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채찍에 맞으실 때, 피를 흘리셨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후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양 손과 양 발에 못을 박히시고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이유는 나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자유케 하는 능력이고, 해방의 영광이며, 죄와 저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능력의 피 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의인이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보혈의 능력으로 삽시다.



둘째, 우리의 아픔 때문에 당하신 고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배고픔과 갈증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피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이 고난당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사 53:10). 원어로 보면 “원하사”란 “기뻐하다, 갈망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아들로 삼으시려고 예수님이 고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대로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부터 채찍에 맞으셨습니다(요 19:1). 예수님의 손은 기둥에 묶여졌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맨살이 들어난 예수님을 양 쪽에서 교대로 어깨, 등, 허리를 가죽채찍으로 내리쳤습니다. 채찍 끝에 붙은 뼛조각이 예수님의 살을 뜯어냈습니다. 채찍에 달린 납으로 된 쇠공이 예수님의 뼈를 으스러뜨렸습니다. 얼마나 맞으셨는지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사 52:14). 왜 하나님은 예수가 채찍에 맞기를 원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묵묵히 채찍에 맞으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질병과 약함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사 53:3,5; 마 8:17).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함에서 치료 받고, 강해집니다.



셋째, 우리의 실패 때문에 당하신 고난


첫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다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그의 삶에는 가시와 엉겅퀴만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인류는 첫 아담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첫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줄 알았던 것처럼, 경제만 발전하고 과학만 진보하면 인류 사회에 새로운 변화와 축복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갑니다. 자녀가 부모를, 제자가 스승을 배신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멸시하고 천대합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평이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가 서로를 실패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인간을 실패에서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첫 아담의 실패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온 몸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자가 겪는 수치와 모욕을 몸소 당하셨습니다. 왕께 충성을 다해야 할 군인들이 왕의 왕 되시는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 27:28-30). 그들은 예수는 가짜 왕이고, 실패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조롱을 당하셨을까요? 실패로 인해 종노릇 하는 인간들을 구원코자 함입니다(히 2:14,15). 실패로 인해 절망하는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히 2:18). 실패로 인한 고통을 평화로 채우기 위함입니다(사 53:5). 세상이 우리를 실패자라고 멸시하고 천대합니까? 인내함으로 예수님만 바라봅시다(히 12:1,2).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승리와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가난 때문에 당하신 고난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요 3:35). 예수님에게는 부족함과 가난이 있을 수 없습니다(행 17:25). 그런데 가난해질 이유가 없으신 분이 가난해지셨습니다. 천국 보좌에 계셔야 할 분이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만물의 주께서 편히 누울 방 한 칸이 없다고 했습니다(마 8:20). 가진 것이 없어서 빌려서 사역하셨습니다. 빈 배를 빌려서 말씀을 전하셨고, 빌린 방에서 유월절 음식을 제자들과 잡수셨습니다. 빌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묻힐 무덤이 없으셔서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을 빌려서 장사지내기까지 하셨습니다. 왜 이처럼 가난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고 말씀합니다. 또한 우리를 복주시기 위하여 가난의 저주를 짊어지셨습니다(갈 3:13,14). 이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부자입니다. 부자(父子)이니까 부자(富者)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이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고후 6:10). 우리는 복의 근원입니다. 믿음으로 선포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잘 됩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부요함으로 통하는 지름길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자에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히 3:1),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갑시다.

출처/최성규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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