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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설교 : 날마다 형통한 삶 (창 39:1-3, 빌 4:11-13)

by 【고동엽】 2022.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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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형통한 삶 (창 39:1-3, 빌 4:11-13)

요셉은 꿈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죄란 아버지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과, 꿈을 많이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죄 때문에 졸지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것도 형들에게 죽을 뻔하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멀리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시련을 겪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시련은 꿈 때문이었습니다. 꿈을 꾸는 자는 꿈 때문에 시련을 당합니다. 이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형들이 팔아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고,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합니다. 술맡은 관원장이 그를 잊어서 감옥에서 오래 고생을 합니다. 이런 인생 역전 드라마가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한점의 오점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진로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그의 가는 길에 막힘이 없습니다. 막힘이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형통입니다. 그의 형통은 노예로 있었지만 주인인 보디발이 인정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간수가 인정합니다. 그의 형통은 공인된 형통입니다. 그는 억울하게 팔려가 종살이, 옥살이, 힘든 일을 하였지만 그의 걸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 105:7)라고 합니다. 요셉은 팔려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후에 그의 아버지와 70명의 식구들이 애굽에 이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살이, 옥살이가 그의 삶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의 삶이 그의 삶입니다.
형통이란 고통의 면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고난 후에 영광이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8-9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우리가 우겨쌈을 당하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지 아니하고”가 아닙니다. 형통은 고통 가운데서 더 잘 된 이야기입니다.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의 번역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훗날 그의 형들을 만나 하는 얘기를 보세요.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고 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형통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라는 분이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이 성공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통하면 뭐합니까? 내가 형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형통한 삶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요셉이 무엇 때문에 형통했으며 우리가 어떻게 형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형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요셉 이상의 시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굽은 것 같지만 이것이 참 길입니다. 흔들리는 것 같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꼬이고 안되는 것 같지만 이것이 푸는 비결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시련 가운데 형통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이 형통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 형통한 자의 비결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3절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요셉의 형통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형통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힘으로 형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합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는 되는 것입니다. 형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대로 형통하게 됩니다. 함께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창 21:20)”. 이삭에게 함께 하십니다. “네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창 26:24). 야곱에게 함께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창 28:15). 임마누엘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떨어진 것을 다시 붙여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성공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번성이 있습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성공, 번성이란 말은 하나님의 단어입니다.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23절에는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합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도 형통한 일입니다. 요셉은 문자 그대로 ‘미스터 형통’입니다. 사실은 요셉이 형통한 것이 아니라 형통이 요셉을 좇아 다닌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의 복입니다. 오래전 중국에서 탈출한 한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성난 폭도들이 창을 들고 따라옵니다. 선교사는 허겁지겁 보트에 올라탔습니다. 폭도들이 창을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사는 물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기적적으로 상처 하나 없이 이 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어떤 성경구절이 생각이 났나?” 이 때 선교사는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한 성경구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나와 함께 계셨다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창도 피합니다. 물 속에서도 구원함을 얻습니다. 형통한 삶을 삽니다. 잭 하일스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치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세요. 이런 자가 형통합니다.

둘째, 형통한 자의 범위는 범사입니다.
3절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합니다. 범사에 형통합니다. 형통하는 사람은 범사가 잘 됩니다. 범사가 아니면 형통이 아니지요. 부분적으로 형통하면 형통이 아니지요. “반통”이지요. 반통은 빈통이지요. 신명기의 주제는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손으로 하는 범사에”라고 합니다. 어떤 것은 복을 주시고, 어떤 것은 화를 주시고, 어떤 것은 형통하게 하시고, 어떤 것은 불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형통을 보세요.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자기 의지로 핍박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도여행을 갑니다. 무시아에서 자기 계획으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 드로아로 갔습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선교의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로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려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에 갈 때는 죄인의 모습이지만 로마로 보리라는 전도의 길이었습니다. 로마에 가는 길에 탔던 배가 파선을 당합니다. 배가 깨지고,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멜리데라는 섬에서 보블리오 추장의 딸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가장 좋은 섬김의 기회였습니다. 바울의 삶은 꼬이고 복잡한 삶이었지만 하나님은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고통 가운데서 더 잘 되는 것이 형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통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내웠노라”. 바울의 형통은 “모든 일에”입니다. 사실은 가는 곳마다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되는 곳에 가요.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잘될 일을 해요. 형통한 자는 삶의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삽니다. 그래야 잘되고 형통합니다. 사무엘도 형통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3:1에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라고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사람을 섬깁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사람 시중을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하나님의 위치가 바뀌면 만사불통입니다. 이것이 바로 되면 만사형통입니다. 이 세상의 만사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범사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 빼고 형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은 잘 안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잘됩니다. 우선은 어긋나 보이지만 바르게 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 8:28). 찬송가 434장은 부를수록 힘이 납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만사형통합니다.

셋째, 형통함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일입니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게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절). 요셉이 종살이하던 집의 주인도 요셉이 형통한 것을 인정합니다. 요셉의 근면, 정직, 성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형통을 보는 것은 성실함을 통해서 봅니다. 성실한 사람의 형통을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성공하라고 하시지 않고, 성실하라고 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실하면 성공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형통입니다. 성실을 모든 사람이 보게 하는 것이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야곱은 우물만 파면 물이 나왔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복권만 사면 당첨된다면 사람들이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은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옛 격언에는 “챔피언은 링 안에서 챔피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거기서 인정될 뿐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 안에서 진실된 삶 통해 인정받는 일입니다. “우리의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일이다”(마 5:16). 영광이란 말은 헬라어로 ‘독사’(doxa)입니다. 이 말은 ‘인정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즉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여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분이 “누군가가 당신을 처음 배신했다면 그건 그의 과실이지만 그가 또다시 당신을 배신했다면 그땐 당신의 과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형통치 못한 것은 우리의 과실일 수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삶 때문입니다.

결론
신명기 29:9에는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고 합니다. 형통한 것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궁인지사번역파비(窮人之事飜亦破鼻). 안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입니다. 어떤 책에 보니 “잘되는 분은 넘어져도 산삼뿌리 앞에 넘어지고, 안되는 분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라는 말이 있습디다. 우리는 안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런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실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됩시다. 이런 사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넘어져도 산삼뿌리 앞에 넘어지는 되는 사람이 됩시다. 날마다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모든 일이 주 안에서 잘되고 형통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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